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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종적이고 유동하는 신체들의 도시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6회 국제워크샵 참가기

- 하얀(수유너머N)

11월 18일 <유체도시를 구축하라!-대도시, 분열과 공존의 카오스적 교차로>라는 주제로 수유너머N의 국제워크샵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11월부터 2월까지, 세미나를 시작하기 전 세 달가량을 정기적으로 볼 사람들이기에 서로 소개를 하며 얼굴을 익혔다. 그들은 건축과를 다니는 분, 도시건축설계와 관련된 분 그리고 도시개발과 관련하여 사건과 관련이 되어 있거나, 그것과 관련한 강력한 기억의 자장이 여전한 사람들이었다. 그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도시를 구상하는 일은 건축가나 정책가의 몫이 아닌가’ 그렇기에 별 관련이 없는 분야라고 이번 세미나에 좀 거리를 두고 시작했던 나 같은 사람까지 이끌리도록 했다. 국제워크샵을 통하여 2008년 촛불집회 이후로 의도적으로 스스로 외면하고 비워두었던 공간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국제워크샵 세미나를 하는 동안 먼저 도시에 관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크게 이동해갔다.

1. 먼저 도시를 구성하는 것은 건축이나 기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중의 흐름에 의해서라는 것. 그리고 그것의 강력한 예들은 도시에 산재해 있다. 제인 제이콥스도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 하나의 예로 한국의 경우 노점상의 역할. 그러한 상인들은 오랫동안 거리를 사용하고, 거리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마주침’을 통해 그 일대를 지키는 일원으로 도시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건축적인 사고만으로 기획되고 구성된 도시의 경우 거리의 깔끔함을 추구하느라 재개발을 시작하면 먼저 위험하고 보기 좋지 않으며 청결하지 않다는 이유로 노점상 철거가 일차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오히려 깔끔하게 구성되었다는 ‘-지구’같은 곳은 밤의 시간에 거리가 공동화됨으로써 더욱 위험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2. 그러므로 ‘도시를 생각한다는 것’은 건축가나, 도시계발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렇기에 ‘도시를 생각하는 것’은 도시 속에 살아가는 자들의 권리이자 상상력의 활력(potentia)이다. 『뉴욕열전』과 『유체도시를 구축하라』를 쓴, 이와사부로 코소는 이번 국제워크샵 강의에서 ‘유토피아’에 대해 언급하는데, “유토피아는 몽상적인 것과 연계가 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무서운 것, 강력한 것, 현실적 힘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자본가와 정치권력이 자신의 유토피아를 실현하고자 도시를 기획하지만, 도시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 단위인 공통재(민중과 자연의 연합을 공통재라고 말할 수 있다면, 공통재를 하나의 주체로 상상해보는 것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역시 스스로의 유토피아를 상상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자본가와 정치권력에 의해 신체와 정신, 감성 모두를 착취당하고, 이제 거의 바닥이 들어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민중은 자본가와 정치권력을 지탱해온 가장 근원적인 주체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때가 되었다. 결국 도시를 생각한다는 것은 ‘반자본-반권력’의 틈에서 숨 쉴 구멍을 찾고, 살아남을 권리를 외치는 일과 다르지 않다.

3. 결국 도시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투쟁은 ‘권력이 꿈꾸는 도시’와 ‘민중을 포함한 공통재가 꿈꾸는 도시의 투쟁’이기도 하다는 것. 이 생각에 도달하면서 2008년 촛불 집회 때, 분명 시작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였으나, 그 다양한 이슈들, 한미FTA 반대, 정권심판, 교육문제, 비정규직문제, 등록금문제, 군 제도에 관한 문제,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문제 등이 한데 터져 나왔던 이유. 그리고 코소가 미국 9․11사건과 일본 3․11사건을 연결시키며, 뉴욕의 오큐파이 운동을 전 세계 총파업으로까지의 가능성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지점. 그 지점의 한 축이 바로 ‘반자본-반권력’을 향한 ‘공통재가 꿈꾸는 도시의 투쟁’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렇게 변화된 도시에 관한 생각들은 2008년 촛불집회, 우리가 멈추어있는 그 자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2008년 5월 이후 밤 시간 동안 시청과 종로 주변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사람이든 소든 간에 권력이 (감히!) ‘생명’을 정치적으로, 특히 경제적으로 악용하는 승인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와있다고 느꼈고, 그 느낌이 사람들을 거리로 나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집회가 계절을 넘기면서 모이는 사람이 조금씩 줄어들었고, 우리는 종로의 블록에서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가를 가지고 늘 고민했다. 그런 고민이 득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때로는 서로 의심을 하다가, 당시 사복 경찰의 체증이 급증하자 점점 적은 인원이 더 적게 분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처음 대하는 다양한 사람들, 이 이질성의 수용에 한계가 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 쯤, 결국 이질적인 것들이 한데 리듬을 타던 경험을 하고서도 그 경험을 긍정하는 데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멈추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국제워크샵, 특히 코소가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런 우리의 특유한 경험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 강력한 계기가 되었다. 내가 이해한 바로 코소는 도시를 건축 중심이 아니라 거리 혹은 치마타, 그리고 거리의 사건, 또한 그 사건의 민중들의 흐름으로 바라보았다. 도시 건축의 설계 속에 등장하지 않는 사람들, 신체들, 공통재들. 역시나 2008년의 촛불집회라는 하나의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그 사건을 일으키거나 말려들었던 사람들은 그들이 가졌던 그 다양한 이질성만큼이나 용산, 두리반, 마리, 희망버스, 사대강 살리기 등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에 수많은 이질성의 흔적을 더 새겨놓고 있는 셈이다. 이런 하나의 다양체로서 우리는 스스로 이질적 신체를 가진 만큼 수많은 타인의 이질성과 교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만큼 더 많은 도시적 사건에 매료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유체도시를 구축’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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