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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횡단 접속을 위하여 -고소 이와사부로 / 이진경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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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횡단 접속을 위하여
-고소 이와사부로 / 이진경 대담-

사회: 고병권 / 통역: 윤여일, 신지영

고병권: 이진경 선생님과 고소 선생님, 책을 통해서는 서로 알지만 살아온 삶과 운동의 경험은 그와 다르겠지요. 서로에게 자신을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두 분의 삶과 운동은 개인적으로 매우 독특한 것이지만 어떤 점에서는 사회적으로 하나의 유형을 이룬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소 선생님이 미국에 처음 간 게 1980년이죠? 당시 대한항공을 이용했는데, 직전에 있었던 광주항쟁 때문에 공항에서 삼엄한 몸수색을 당하셨다고 들었는데, 이진경 선생님에게도 운동을 시작하는 데 있어 광주는 매우 중요한 계기였다고 들었습니다. 80년부터 어떤 길들을 걸어오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고소: 미국으로 이주한 건 미국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일본을 탈출하고 싶어서였습니다. 70년대 후반 저는 일본의 신좌파 학생운동권 내부의 위계질서와 내부폭력(우찌게바)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압적인 문화로부터 탈출하고 싶었죠. 처음엔 프랑스로 가려고 했습니다. 68혁명 이후의 지적 흐름을 동경했거든요. 들뢰즈와 가타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프랑스로 유학 갔던 선배들은 전부 일본으로 되돌아오는 거예요. 반면에 뉴욕으로 간 선배나 친구들은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더라고요. 그러면서 뉴욕의 도시와 그 문화에 어떤 매력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고, 막판에 뉴욕으로 이주하기로 한 거죠.

뉴욕대학(NYU)에서 2년 동안 공부하면서 계속 체류하기 위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대부분의 일본 친구들은 식당 종업원 일을 하면서 힘들게 지냈죠. 저도 청소도 하고 빌딩관리도 했는데, 어쩌다가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 화가 포찌(Poggi)를 만나 그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면서 예술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당시 뉴욕에는 유럽의 지식인들이 많이 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타리와 만나면서 그에게 많은 영감과 자극을 받았습니다.

포찌를 떠나 갤러리에서 일했고 건축설계와 그래픽 디자인 일로 생활했습니다. 당시 제 마음 속에는 세계 변혁이랄까 그런 것에 대한 열정이 사라졌습니다. 일본 신좌파에 대한 나쁜 기억이 아직 가시지 않았죠. 대신 뉴욕의 새로운 분위기에 고취되어갔습니다. 80년대 뉴욕은 아주 흥미로운 도시였습니다. 한마디로, 아트와 액트의 경계가 지워지는 사건과 공간이 형성되어 있었죠. 로어이스트사이드(Lower East Side)의 거리들, 스쾃팅, 여러 사회센터, 아트갤러리 등, 뉴욕 특유의 공간에서 사귄 사람들이 주로 아나키스트들과 자율주의 활동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본의 마오주의자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아나키즘은 여러 사상이 뒤섞여 있지만 제게는 무엇보다 자기조직화의 기술과 실천 이론으로 다가왔습니다. 사람들간의 관계를 평등하게 조직하는 방법, 친구들과 비폭력적으로 대화하는 방법 등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나키즘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있었죠. 저는 이전까지 자본주의 세계 분석의 틀로서 맑시즘을 갖고 있었는데, 아나키스트들과 만나면서 맑시즘적인 자본주의 분석과 아나키즘적인 자기 조직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90년대 반세계화 운동에도 참여했고 9.11 이후 반전운동에서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그런 운동들이 점차 쇠퇴하면서 지켜 있었다고 할까, 그러다 작년 Occupy 운동에 참여하면서 그 안에서 민중적 변혁의 새로운 추세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고병권: 고소 선생님은 70년대 일본의 신좌파에 대한 어떤 거북함과 불화로부터 출발해서 맑시즘과 새로운 아나키즘이 결합된 어떤 곳에 이르셨는데요. 이진경 선생님은 어떠세요? 레닌주의자에서 출발해서 코뮨주의자에 이른 경로가 어떻게 됩니까?

이진경: 82년에 대학 입학했습니다.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지 2년 후죠.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는 광주항쟁의 유령들, 그 이전에 전태일의 유령이 떠돌고 있었죠. 그 유령들이 나를 변혁운동에 뛰어들게 했습니다. 85년까지 민중항쟁은 자생적 운동이었습니다. 85년부터 레닌주의에 입각한 전위조직을 만들어 목적의식적인 변혁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90년에 체포되어 징역을 살았고, 91년에 감옥에서 현실사회주의가 망하는 걸 보면서 지금까지 내가 한 건 뭘까 고민했습니다. 익숙하게 여겨졌던 이념들로부터 떠나야 했지만, 어차피 이념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 변혁의 필요 때문에 운동한 거라면 다시 하자고, 다르게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맑시즘조차 변혁해야 했어요. 푸코와 들뢰즈, 가타리를 공부했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고민하는 동료들 속에서 코뮨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유+너머를 만든 것도 그런 맥락이었습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운동 속에서 코뮨이 생성되어야 한다는 맑스의 생각이 고소씨가 말한 맑시즘과 결합한 아나키즘의 ‘자기조직화’와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수유+너머가 분열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고소씨의 <뉴욕열전>에 보면 좌파 안에서의 분열생성(schismogenesis)을 긍정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을 고소씨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분열생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고소: 매우 어려운 문제이고, 지금 점거운동에서도 일어나는 문제, 문제인 동시에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의 한 가능성입니다. 지금 미국의 점거운동은 이진경 선생님이 말한 자생적 운동의 국면에 있습니다. 검거운동의 주체들은 수많은 어피니티(affinity) 그룹들, 즉 일상의 공유와 친밀감으로 형성된 그룹들입니다. 코뮨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런 어피니티 그룹들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어피니티 이상의 코뮨을 보여준 사례가 수유+너머이겠죠. 분열생성과 관련하여, 최근에 제가 속한 어피니티 그룹 안에서 남성 마초이즘의 문제가 불거져나와 그 과정에서 페미니스트 그룹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두 그룹 모두에 제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그렇다고 페미니스트 그룹이 폐쇄적인 건 아니고, 다른 그룹에 속한 사람도 많고 그룹 차원의 관계도 맺고 있죠. 이런 점에서 분열생성 내지 들뢰즈의 분열분석(schizoanalysis)이 의미가 있습니다. 몰화(molar)와 분자화(molecular)란 개념으로 설명하면, 몰적인 것에서 분자화가 일어날 수 있고 분자적인 것에서 몰화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제가 겪은 일본의 신좌파는 몰화가 극화되어 더 이상 분화화가 일어나지 않은 경우입니다. 최근 점거운동 내에서 2012 메이데이 때 인터내셔널 총파업을 논의하고 있는데, 이를 위한 연맹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경제적, 장소적 차원에서 몰적인 기반을 구축해야 하죠. 문제는 그런 몰적인 조직이 총파업 이후에도 남아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분자화되어야 하는가 하는 겁니다. 아나키스트 조직을 건설하자는 주장도 있고 필요 없다고 하는 주장도 있죠, 이런 논쟁적인 상황이 분열분석을 필요로 합니다.

이진경: 다른 데서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속했던 ‘서사연(서울사회과학연구소)’이나 지금의 ‘수유+너머’ 역시 일종의 어피니티 그룹이었던 듯해요. 그런 어피니티 그룹이 코뮨의 구성 조건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그 어피니티 그룹이 몇 갈래로 나눠져 대립과 투쟁, 분기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런 분열 속에서 그룹 내부의 차이가 적대로 전화되는 것을 가슴 아프게 경험했습니다. ‘저들은 왜 저럴까? 나는 할 만큼 했는데’ 그런 생각도 많이 했죠. 하지만 그들 역시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적대의 정서 속에서 분열은 생성이 아니라 서로를 갉아먹는 독이 됩니다. 차이를 긍정하는 게 참 어려우면서도 긴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게 필요합니다. 제가 불교철학에 관심을 돌린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어피니티 그룹의 문제는 그 친밀감 안에 안주하는 경향입니다. 외부에 대한 비판, 차이에 대한 공포, 이런 게 외부 없는 ‘공동체’로 전락케 만듭니다. 외부성을 갖지 못하는 공동의 무능을 극복하기 위해선 차이를 긍정하는 자세와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소: 어피니티 그룹에 대한 문제의식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저도 지금 이 문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데요, 제가 말한 어피니티 그룹은 이진경 선생님이 말씀하신 코뮨보다 훨씬 덜 제도적이고 유연한 소규모 집단입니다. 가령 거리에서 행동할 때는 저놈이랑 하는 게 좋다, 하지만 공부할 때는 다른 놈이랑 하는 게 좋고, 술 마실 때는 또 누구랑, 이처럼 연구주제나, 행위의 성격, 성향에 따라 여러 어피니티, 저희,는 더 일상적, 이런 연구주제에 따라, 행동할 때는 그놈과 하는 게 좋다, 연구, 공부, 술마시다 보면 다른 어피니티 그룹이 생깁니다. 서로 겹쳐지죠. 여러 개의 어피니티 그룹이 교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동할 때는 이 그룹과 함께, 가타리 공부할 때는 또 다른 그룹과 합니다. 이진경 선생님이 말씀하신 외부로의 개방이란 문제는 정말 지금 절실히 느끼는 문제입니다.

지금 점거상황에서 큰 행동이 생길 때는 분열이 생길 수도 있고, 서로 비판하기도 하죠. 각자 나름대로 자기 상을 갖고 충돌하기도 하고. 보수적인 사민주의 그룹이나 노조도 있어서 성공하려면 그들과의 관계도 중요해요. 이것이 어쩌면 제게 가장 절박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운동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역동성. 제가 크게 영감을 받은 것은 가타리의 횡단적 접속(transversal connection)입니다. ‘그룹 횡단성’이라고 할 수 있죠. 의식적으로 다른 그룹들과 관계를 맺으려 합니다.

고병권: 이미 어느 정도 해명은 된 것 같습니다만, 그대도 다시 한 번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서로 다른 집단, 심지어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는 두 집단에 모두 참여한다고 하셨는데,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번 아큐파이 운동과 관련해 보자면 소위 ‘블랙블럭’(일정한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는 전술)에 대한 큰 논쟁이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그런 전술에 동의하느냐, 그 전술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느냐의 문제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전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들과 함께 운동을 해나가느냐, 해나갈 수 있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2008년 한국의 촛불집회에서도 7월초에 그런 문제들이 크게 부각되었죠. 일부는 준법적이고 평화로운 시위를 주장하고, 다른 일부는 일정한 물리력을 행사해서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려고 하고. 그 둘이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인식을 했고, 실제로 큰 갈등이 있었죠. 다시 묻겠습니다. 서로 동의하지 않는 관계, 심지어 서로 적대적인 관계의 사람들이 운동을 함께 해 나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고소: 여러 사람들이 분리된 페미니스트 그룹과 분리 이전 어피니티 그룹 양편에 속해 있고 횡단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 이 양편을 연결하려 하냐 하면, 이들의 차이가 적대적으로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양쪽에 다 제가 소중히 여기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블랙블럭 문제는 사실 미국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건 폭력인가, 비폭력인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에서 폭력/비폭력 문제는 불법/합법의 문제로 오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캠페인이 커질 때 그것은 법의 선을 넘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적절한 순간에 법을 넘는 행동이 필요할 때도 있죠. 그리고 엄밀히 말해 블랙블럭은 어떤 그룹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건 전술의 이름이죠. 어느 때 그 전술이 필요하고 적절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택하는 전술이지, 특정 집단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리고 원래 데모대를 경찰의 폭력으로부터 지켜주는 역할을 해주는 역할을 했지요.

최근에 어떤 바보같은 저널리스트가 ‘블랙블럭은 아큐파이 운동의 암적 존재다’는 글을 썼죠. 그도 그렇고 미국 사회에서는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와 비합법과 합법의 문제를 계속 혼동합니다. 게다가 따져보면 문화권마도 폭력에 대한 감각은 아주 다릅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은 상당히 전투적입니다.

고병권: 지난 번 그레이버가 쓴 글에서 본 이집트 청년이 생각나네요. 비폭력 시위 전략이 갖는 중요성이 논의되자, 그 청년이 그랬다는 군요. “당연히 우리도 비폭력주의자입니다. 아무도 화기(firearms) 같은 건 쓰지 않아요. 기껏해야 돌멩이를 던질 뿐이죠.” (웃음) 다만 폭력 시위를 다룰 때는 다른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시위대 내부 문제랄까요. 시위대 일부가 과격하게 돌변하면 시위에 참여가 어려워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체상의 이동이나 연령 혹은 어떤 불안정한 사회적 지위 때문에요. 장애인이나 노인, 어린아이, 미등록이주자 등 말이죠.

고소: 물론 기존 대중이 떨어져 나가는 문제도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겁니다. 나는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는 역시 다종다양성의 문제라고 믿습니다. 가령 시위 중 몇 개의 존(zone)을 만들어 그린존(green zone), 레드존(red zone), 블랙존(black zone) 등을 나누어 다양한 전술이 구사 가능하도록, 그래서 자신이 지지하고 원하는 전술을 구사하는 지역에서 시위를 함께 벌일 수 있도록 돕는 겁니다. 이것은 시위의 다양성을 유지하며 시위하는 많은 대중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죠. 물론 여기서 말하는 존(zone)은 지역 내지 어떤 물리적 구역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요, 행위의 존(zon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 다양한 존을 잘 코디네이션 할까, 저는 그걸 고민합니다. 이런 조정이 어디까지 가능할까 생각합니다. 이런 게 잘 안되면 분파가 생기고 일이 망가집니다.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잘 되어 갈 때는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다종다양성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부분들을 잘 섞고 혼합하고 조정해야 합니다.

이진경: 방금 말씀하신 걸 들으며 하나의 개념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조닝 위드아웃 존(zoning without zone)[구역없는 구역화]이라고 할까요, 격자화[그리드]된 도시에서 싸울 때 하나의 방법으로서 말이죠. 서울도 그렇고 파리 같은 도시에서 도시의 중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는 다른 도시형태, 다시 말해 격자화된 미국의 도시 같은 곳에서 가능한 전술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그런 구역화[조닝, zoning]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격자화(그리드화)된 도시에서 싸울 때 서로 생각이 다르고 움직임도 다른 집단을 전술적으로 한 데 모으는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유체도시’ 비유를 들자면, 유체적 조닝이라고 할까요? (웃음)

고소: 아주 기발한 개념입니다. 제가 구역화[조닝]의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번 뉴스쿨(the New School) 점거가 이루어졌을 때 이야깁니다. 큰 그룹 하나는 다운타운의 폴리스퀘어(Foley Square)에 모여들었죠. 그런데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나가 도로를 막았습니다. 경찰은 그때 메인 부대를 막고 있었는데요. 시위대 한 그룹이 방위를 하고, 다른 그룹이 도로를 봉쇄했습니다. 다른 그룹은 메인 부대를 지키고, 다른 그룹은 뉴스쿨로 이동해서 그곳과 어떤 협상을 진행했지요. 이것이 바로 합법과 비합법의 공존하는 조닝의 한 사례입니다.

고병권: 이번 아큐파이 운동을 보면서 한국의 지난 2008년 촛불시위를 자꾸 떠올려보았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때 이미 서울에서는 제너럴 어셈블 리가 여러 차례 열렸습니다. 한국의 민중들은 자발적으로 늦은 밤 여러 곳에서, 서로 각자의 이야기를 토해냈거든요. 거기서 어떤 공감을 이루기도 하고, 일부는 어떤 결정을 내려 어떤 행진을 하기도 하고 그랬죠. 경찰이 참 곤혹스러워했어요. 나중에는 그런 모습이 사라지고 다시 전통적인 집회가 되고 말았지만, 상당 기간 동안, 제 기억에 밤 늦게 사람들은 크고 작은 제너럴 어셈블리를 열었어요. 우리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지만. 다만 이번에 뉴욕에서 보며 깨달은 건 우리에게는 ‘퍼실리테이터(조력자)’나 ‘코디네이터’, 즉 이 회합의 진행을 돕고, 여러 구역화, 여러 시위 전술들이 다중적으로 함께 진행될 수 있게 돕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 같아요. 인권단체에서 인권지킴이들이 조끼를 입고 시위대 사이를 누비며, 경찰 폭력도 감시하고 인권 침해 문제도 잘 다루었지요. 하지만 그것도 중요하지만, 시위대 내부에서 제너럴 어셈블리의 진행도 돕고, 물리력을 쓰는 시위대부터 간단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시위대까지, 그리고 합법적 협상을 진행하는 사람들부터 비합법적 행진을 전개하는 사람들까지, 그 사이를 조정하고 돕는, 시위대 내부의 조정자들이 시위대 사이를 오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조력자들, 이런 촉매자들을 우리 사회가 빨리 키워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두 분 선생님의 삶과 운동, 사유의 궤적에서 시작해서 현재 우리에게 어떤 운동의 전략 내지 기술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는데요. 개인적으로 참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급히 마련된 자리였는데도 중요한 말씀 들려주신 두 분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특히 아큐파이 운동의 사례를 통해 실감나게 문제를 짚어주신 고소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이 자리 모두가 그렇게 느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서로 독특한 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뭔고 공통적인 것, 특히 공동의 리듬을 타는 게 많은 것 같습니다. 서로에게 정말 많이 배우고 서로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고맙습니다. 이렇게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이번 대담은 여기 지면에 소개된 것보다 훨씬 더 길게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예술과 사회적 액티비즘, 아트(art)와 액트(act)의 수렴 경향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만 지면 관계상 다 담지 못했습니다. 더 상세한 내용은 앞으로 <부커진R>을 통해서 독자여러분께 전달될 거라고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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