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학교 교육은 겉과 속이 다르기도 하단다.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과거 시험으로 관리를 뽑았기 때문에 양반의 자식들은 누구나 거의 다과거 시험을 준비했어. 벼슬자리가 돈과 명예를 움켜쥐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정치권력을 차지해야 가문을 일으킬 수 있었지. 조선 후기 기록을 보면 지방 선비들이 과거 시험을 치르려고 어찌나 많이 한양에 몰려들었는지 과거시험장에서 밟혀 죽는 일까지 벌어졌단다. 운명을 바꾸는 수단이 오로지 과거 시험 합격뿐이고 그리하여 벼슬자리 하나 꿰어차면 그야말로 부귀영화를 얻을 수 현실이라 하자. 그런데 좁은 공간에 응시자가 많이 몰려있는데 그들이 모두가 한꺼번에 좁은 문으로 시험장에 먼저 들어가려 한다면 밟혀서 죽는 일이 안 일어나는 것이 이상하지.

해방 직후 국민보통교육이 시행되자 배우지 못해 무시당한 설움을 풀려고 일반 서민들도 허리띠를 졸라매며 자식을 가르치기 시작했단다. 그렇게 폭발적인 교육열이 생긴 까닭은 아마 배워야 학교 선생, 그도 못하면 면서기라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야 가난도 면하고 신분도 상승하니까. 산업화나 도시화 이전이라서 사기업의 일자리가 아주 적었고 공무원이나 공기업의 일자리를 벼슬로 생각하던 시절이었지. 그러다가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사기업 쪽이 공기업보다 월급도 더 많고 승진도 빠르고 직업도 안정되니까 한 때 잘나가는 사기업의 일자리를 선망했지.

그러나 1997년 11월에 국가 부도 상태일 때에 국제구제금융(IMF)에서 돈을 빌리는 조건으로 노동 유연화 조항이 들어있는 협약을 맺은 후 사기업의 노동자들은 언제라도 쫓겨날 수 있으며 신규 채용도 비정규직으로만 하여 노동 조건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단다. 노동 유연화란 사용자의 자유를 늘려 노동자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사용 조건을 없애거나 약화시키는 것을 뜻한단다. 거꾸로 노동자 입장에서는 노동자 사용조건이 더 나빠지는 노동경직화였어. 그리하여 이후에는 수많은 역사적인 투쟁을 거쳐서 이룩한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규정들이 사라지니까 노동자의 삶이 그 이전보다 훨씬 불안정해지고 고달파졌어. 그래서 다시 공무원이나 공기업에 취업하고 싶다는 수험생이 많아져 요즘은 보통 몇 십대 일의 경쟁이라더라.

하버지가 지금 왜 남다른 우리나라의 교육열과 취업과의 관계를 애기하겠니. 대한민국의 그 자랑스러운 교육열이 사실은 완전히 빗나갔다는 것과 그래서 꿈을 잃은 수많은 아이들이 마지못해 살고 있다는 것과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해도 갈 곳이 없거나 갈 곳이 있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진 못할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란다. 뿐만 아니라 대안 교육을 얘기하고 싶어서다.

지적인 호기심에 따라 즐거움으로 자기완성을 향하는 자발성이 교육의 원동력이었다면 우리의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오늘처럼 답답하지 알았을 거다. 그랬다면 대안 학교라는 것도 필요가 없었겠지. 우리나라 교육목적은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인간을 기르겠다는 거지.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비뚤어진 부모들의 교육열 속에는 홍익인간을 뒤집어 놓은 인간을 기르겠다는 감춰진 목적이 있어. 그건 돈과 권력과 명예라는 사회적 자산을 독차지하겠다는 이기적인 인간을 기르겠다는 숨겨진 교육 목적이지. 그런데도 모두가 다 일등을 할 수는 없다는 것과 뒤쳐진 사람은 앞선 사람의 뒤치다꺼리나 하며 살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 대개의 부모나 교사가 아이들에게 너만은 뒤쳐지지 말라고 아첨을 하게 되는구나. 무엇 대문일까. 아니면 누구 때문일까.

아이들의 미래의 사회적인 위치 즉 계급이 고등학교에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너도 알아야 한단다. 중학교는 모두 똑같은 교육과정(공부내용)으로 공부한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종류가 다르면 교육과정도 다르단다. 네 때도 중학교 때 성적으로 줄을 세워서 맨 앞자리 몇은 과학고나 외국어고로 진학하고 그 뒤 몇 자리는 자립형 사립고로 진학을 할 거야. 중상위나 중간까지는 일반계 국공립이나 사립 고등학교를 가고 중하위나 하위는 실업학교를 가게 될거야.

그런데 대학 입학 때는 면접 과정에서 이른바 명문대라는 곳들이 불공정하게도 과학고나 외국어고 졸업생에게는 가산점을 주어 합격시킨단다. 명문대 졸업 후에도 공무원 시험은 안 그렇지만 사기업 공채에서는 보이지 않는 내부 규정으로 명문대 졸업생에게 가산점을 주어 합격시키거나 승진시킨다. 그래서 사회의 최상위 계급에서 만난 이들끼리 자본과 권력과 명예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담합하여 사회적 자산을 전리품이나 사냥물처럼 나누듯이 나눠 갖는단다. 경쟁과정에서 끝까지 살아 남은 자가 개개 누구일까.

이미 고등학교 때 계급이 분리되기 시작하지만, 보이지 않는 경쟁의 시작은 멀리 유치원 때부터지. 특수한 예외들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아이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종류가 그의 미래의 사회적인 위치 즉 계급과 결정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한국인이면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단다. 목공예가 즐거워서 실업학교에 간 것이 아니라 성적이 뒤쳐져서 실업학교에 갔고 또 거기서도 성적순에 밀려 목공을 선택하게 됐다면 관심이나 취미나 소질에 없던 것을 배우는 과정이 즐거울 리가 없지.

목공으로 진선미를 경험하고 표현하여 자기의 가능성을 실현한다는 본래적인 교육 목적은 간판으로나 걸려 있고, 돈벌이만가 실제적인 교육 목적이 되어 버렸지만 오늘날은 개인의 손으로 만든 가구가 수익을 내기는 어려워. 그래도 학교를 그만두면 사회적으로 유령이 되니까 목공을 마지못해 배우겠지만 졸업 후에도 정말 목공일을 하게 될 건지는 아무도 모르지. 목공일이 아니라면 시키는 일을 닥치는 대로 해야만 살게 될지도 몰라.

아이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에 학교의 종류에 따라 분리되는 계급은 대개 부모의 경제력과 교육열에 달려있어. 끝까지 경쟁대열에서 살아남아 전리품 챙기듯이 사회적 자산을 움켜쥘 아이가 누구겠니. 아마도 똑같은 방식으로 사회적 자산을 움켜쥐었던 사람들의 자식들일 거다. 불평등을 평준화시키는 또는 평준화시켜야 되는 교육의 역할이 우리나라에서는 거꾸로 사회적 자산과 계급을 세습시키는 불평등을 고착시키고 있어.

사회적인 자산을 움켜쥔 자들의 욕망이 과열된 교육열로 치달아 자식에게 막대한 사교육비를 투자하기 때문에 경쟁대열에서 그들의 자식만이 끝까지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지. 그러나 가진 것이 적어서 경쟁의 끝까지 자식의 뒷바라지를 할 수 없거나 아이에게 차마 경쟁을 강요하지 못하는 부모의 아이들은 조금씩 되로 밀리다가 결국 따라가지 못하고 낙오될 수밖에 없단다.

많은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여 남보다 앞서가면 사회적 가치인 돈을 더 많이, 권력을 더 크게, 명예를 더 높이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을 자라면서 끝없이 반복해서 들었으므로 자신이 차지할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의 계급과 존재감을 확인하려 할 것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대열 전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일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교육을 바라보는 많은 한국인의 기준은 잘한다는 것이 자기완성을 향하여 어제의 나보다 새로와졌다는 질적인 변화 개념에 따른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남들과 비교된 위치라는 외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에 따른 기준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만약에 남보다 앞선 것을 확인하는 순간만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가치나 의미를 느낄 수 있다면 학교생활이 얼마나 삭막한 것인가. 나보다 잘하는 사람에게 비교하면 비참할 뿐이므로 점수나 등수로만 확인되는 존재감이란 어쩌면 영원히 느끼지 못할 욕심이 많은 사람도 많을 게다. 또 앞서 간다 해도 언제나 쫓기는 처지이기 때문에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내디디려고 발버둥 치기만 할 뿐 멈춰 서서 만족할 겨를이 없을 게다. 이 경쟁 대열에 한 번 끌려 들어온 사람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경쟁대열을 이탈하려 하지 못할 것이며 한 발자국이라도 앞서가려고 애쓰다가 죽은 되에야 자유로울 것이다.

교육을 시장 논리로 대하는 오늘날의 교육 관료들과 학부모들은 시장의 거래에서 수단 방법은 가리지 않고 한 푼이라도 더 남기려는 경쟁 지상주의와 결과 지상주의 논리로 공부를 시키려 한단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름의 시험을 자꾸 치르게 하여 점수와 등수로 줄을 세우고 앞서라고 교육부가 시·도 교육청을 시·도교육청은 시·군 교육청을 시·군 교육청은 개별학교를 다그치고 몰아댄다. 그 몰아대는 방법이 교육 예산이라는 돈줄을 잡고 풀거나 묶는 치사한 방법을 쓴다. 목적도 방법도 돈이 결정하고 이끌어가는 사회 모순이 학교 교육에 더 비뚤어지게 투영된 결과가 상급학교로 갈수록 고학년이 될수록 경쟁이 치열하게 되지.

오로지 성적만 좋으면 되고 인간성 교육은 뒷전으로 밀린 것이 아니라 포기 해버렸나 보다. 교실 안에서 억압과 욕설과 괴롭힘과 폭행이 등이 일상화되어 있잖니. 이걸 고치려고 담임이나 교과 담임서생님이 얼마나 애쓰시니. 물론 애쓰시는 분도 계시지만 보고도 못 본 척하는 분들이 더 많아. 그런 분들 중에는 전인교육의 책임을 가정에 더 많이 있고 학교는 수업 잘하여 성적을 올리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진 분들도 계시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학부모들은 교육이 제대로 사람 꼴을 만들어 내야한다고 전인교육의 책임을 학교로 미룬다.

아이를 대하는 사람이 누구든 대하는 곳이 어디든 아이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려 한다면 책임이 생기기 때문에 책임소재를 따진다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지. 누가 어디서 아이를 대하든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아이들도 친구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할 수 있게 되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모두 제로섬게임에 참가해서 만인이 만인을 향하여 잇속을 다툰다는 인간관계로 인간을 대하고 아이들도 어른들의 처세술을 배우고 있어. 시장에서 경쟁한다는 것은, 돈벌이를 잘한다는 것은 남이 손해나더라도 나는 이익을 보자는 것을 뜻해.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목적을 나의 목적으로 삼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나의 행복으로 삼는 사람은 돈벌이 경쟁에서는 아주 무능한 인간이 되고 말아. 다른 인간을 나의 돈벌이 수단으로 보지 않으면 어떻게 이익을 얻을 수가 있겠어.

그러므로 돈과 인간을 동시에 섬길 수가 없다면 인간을 섬기는 인간을 기를 것인가 돈을 섬기는 인간을 기를 것인가를 가정과 학교에서는 결정을 내려야 돼. 그런데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 하여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하는 인간, 즉 인간을 섬기는 인간을 기르겠다는 우리나라의 교육목표는 밖에 내거는 그냥 간판에 불과해. 개인적이고 실제적이고 내면적인 교육목표는 경쟁력 있는 인간, 즉 사회적 재화를 더 많이 차지하는 인간, 돈벌이 잘하는 인간을 기르는 거야. 만약에 돈벌이 잘하는 인간을 기르는 것이 실제적인 목적이 되었다면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바람직한 인간성을 갖추는 것은 오히려 달갑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바람직한 인간성이라는 것이 돈의 노예가 되어 돈만을 섬기기보다는 인간을 섬기려함으로써 돈벌이에 무능한 인간을 만드는 거니까 달갑지 않을 수 있어.

그래서 인간성은 갖춘 아이는 점수나 등수에 앞서라고, 경쟁력을 갖추라고, 악착같이 욕심차리라고 배운 아이들에게 뒷전에 밀려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거야. 이제 학교폭력이 너무 심각해지니까 가정과 학교가 그동안 관심에도 없던 전인교육에 대한 책임을 서로 미루는 거야.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세운다는 것도 교육목표와 정책과 현실에서 곁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되는데 그것이 괴롭고 싫기 때문에 교육의 본질을 되찾아 갈 수가 없는 거야. 그저 한다는 말이 입시과열로 인성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단번에 해결되지 않으니까 학교에 경찰을 배치하자는 거야. 이는 폐렴을 단순한 감기로 보고 항생제가 아니라 해열제만 주는 진단과 처방이라 할 수 있지.

조직폭력과 같이 힘이 센 몇 아이들이 뭉쳐 다니며 약한 아이들을 일상적으로 괴롭히면서도 그들은 그냥 장난쳐본 것이라며 피해자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어. 어른들은 사람보다는 돈에만 관심을 갖게 되고 아이들도 커갈수록 친구보다 돈으로 환산되는 성적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괴로움과 슬픔에 대한 공감에서 오는 도덕적인 행동기준을 세우려는 노력을 포기한지 오래란다. 만약에 공감능력을 되찾지 못한다면 할 일과 말 일의 기준을 세울 수가 없게 된단다.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세우지 못한 인간이라면 이익을 위해서나 재미를 위해서 무슨 짓은 못하겠니. 그 결과로 우리 사회와 교실이 얼마나 불안하고 삭막해졌니. 그리고 사이코패스나 좀비같은 인간들 때문에 사회적인 에너지 소모가 얼마나 크며, 그들 때문에 생긴 피해의 복구가 가능한 건지, 기리고 치료비용은 얼마나 들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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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하버지가 쓰는 편지 | 학교 교육은 겉과 속이 다르기도 하단다._윤석원(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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