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노동잔혹사

실습생 ver 2.0

- 김민수(청년유니온)

ver 2.0

언제 썼는지 가물가물하지만, 예전에 병원 실습생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본 적이 있다. 오늘은 실업계 고등학교 실습생에 관한 이야기를 ver2.0으로 풀어 보려 한다. 주 70시간의 노동 끝에 쓰러진 기아자동차 실습생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실습생이다

디자인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인 A는 교복 매장에서 근무하며 후배들의 허리둘레를 측정한다. 로봇 고등학교 학생 B는 패스트푸드점에서 근무하며 패티를 뒤집는다. 로봇을 다루던 섬세한 손길로 만든 햄버거는 분명 더 맛있을 거다. 같은 고등학교 학생 C는 편의점에서 담뱃갑에 바코드를 찍고 있고, 미디어 고등학교 학생 D는 다른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을 진열하고 있다. 공업고등학교 학생 E는 레스토랑에서 자신은 사먹지도 못할 음식의 주문을 접수하고, 미래 산업을 공부한 학생 F는 충청남도 계룡시에서 군인의 자격으로 국가의 부름을 실습하고 있다.

통합진보당 권영길 의원실이 서울시 교육청에 요청한 ‘서울시 특성화고 학생들의 기업체 실습 파견 현황’에 근거한 내용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현장실습으로 파견 된 학생들의 상당수가, 학교 교육과정과 무관한 업무에 종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아르바이트 포털 사이트를 15분 동안 검색하면 바로 투입될 수 있는 업무들이 현장실습이라는 거창한 미명 아래에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현 정부는 실업계 출신 주제에 무슨 진학이냐며, 실업계 고등학교에 높은 취업률을 강제했고, 그 결과가 위와 같이 웃기지도 않은 취업(실습 파견) 현황으로 드러난다.

4대강 오리알

더 큰 문제는 행정당국의 모르쇠 속에 실습생들이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학생인가? 근로자인가? 교과부는 ‘실습생 = 근로자’를 주장하며 담당 공무원들의 업무 과부하를 배려하고 있고, 고용노동부 역시 마찬가지 논리를 펼치며 책임을 피하고 있다. 부양 의무를 서로에게 떠넘기려고 다투는 자식들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러할까. 국가의 보호라는 시민권을 상실한 실습생들은 ‘4대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한다.

취업? 문제는 학력 간 격차

현 정부는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진학률을 자랑스럽게 보도함과 동시에, 실업계 출신 학생들의 대학 진학에 대해서는 혀를 차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교육의 의미를 상실한 현장실습이 무분별하게 진행되는 것 또한 ‘실업계 출신은 졸업 후 취직해야 한다’ 식의 비현실적인 판타지에 기인한다. 저열한 산업현장과 부실한 현장실습 운영에 대한 고민 없이, 특성화 고등학교에 막무가내로 취업률과 현장실습을 강제하는 비합리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는 최근 발생한 기아차 실습생의 사고와 위에서 밝힌 현장실습 실태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데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학교 안’이 아닌 ‘학교 밖’에 있다.

고용률에서부터 학력 간 격차가 나타난다. 더 이상 낮출 눈높이가 없는 고졸 이하의 학력을 가진 이들이 대졸자에 비해 더 낮은 고용률을 보인다. 고용 시장에 진입하였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 되지는 않는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소 김수현 연구원의 2011년 8월 고용동향 분석에 따르면, 고졸 임금근로자와 대졸 임금근로자의 월평균 임금 격차는 113만 2천원이다. 또한 고졸 임금근로자의 58.4%가 비정규직 노동자인 반면, 대졸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은 27.0%에 불과하다. 고용형태의 차이는 근속기간의 차이로 드러나며, 이는 더 큰 임금격차로 귀결 된다.

이 조건에서 실업계 출신 학생들의 대다수가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인 판단이다. 더욱이 산업 현장에서 죽음에 가까운, 혹은 죽음에 이르는 노동을 실습한 이들이 고졸 출신 노동자의 삶을 선택하길 바라는 것은 가히 공상과학이다.

청소년들을 편의점과 죽음의 노동으로 밀어 넣는 현장실습은 중단 되어야 한다. 고졸 노동자의 삶이 가치 있는 선택이 아닌 불가피한 선택이 될 수 밖에 없는 현재의 경제구조는 개선 해나가야 할 문제이지, 덮어놓고 밀어 붙일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충실한 직업훈련, 전공을 살리는 양질의 일자리로의 연계, 그리고 이에 부합하는 현장실습의 재구성을 통해 실업계 고등학교는 본연의 역할을 회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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