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 남은 사람들

식민지 여성의 정치와 문화 (2)― 권애라와 김시현

- 권보드래

한참 게으름을 부리는 사이 인터넷에 권애라 관련 글이 늘었다. 박진영 선생이 광익서관을 추적하다 권애라에까지 시선이 가 닿았나 보다(http://bookgram.pe.kr). 더 보탤 말이 없다 싶지만 두 토막으로 나눠 쓰려고 준비한 몫이 있어 췌사를 무릅쓰기로 한다. 스캔들화돼 버린 권애라의 젊은 시절을 엮다가 남편 명색으로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하는 대목에서 멈추고 말았는데, 글을 잇다 보면 결국 남성의 보조자인 여성, 연애와 결혼에 의해 규정되는 여성을 소묘해 내고 말 것 같아 미리 씁쓸해지긴 하지만 말이다.

권애라의 후반생은 전반부와 단절적이다. 식민 말기부터 권애라의 삶은 오직 그 남편, 김시현과의 연관을 통해 조명되는 듯 보인다. 김시현은 거물이다. 『한겨레신문』1989년 12월 1일자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지만―그 밖에 양형석․허종 선생 등의 논문이 있다― 김시현은 의열단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고 해방기에는 좌우합작운동을 벌였으며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두 차례에 걸쳐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러면서도 1952년에는 이승만 암살을 꾀했다가 실패, 1960년 4월 항쟁으로 풀려날 때까지 옥살이를 했으며 평생 그렇듯 권력에 맞서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식민지시기에 총 여섯 차례에 걸쳐 18년(15년이라고도 한다) 여의 옥살이, 제 1 공화국 시절 9년의 옥살이― 하여 무려 27년여를 감옥에서 보냈다는 전설적인 일화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의열단이라면 약산 김원봉을 연상하기 마련이지만, 김시현도 그 못지않은 비중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1923년 국내 잠입 당시에는 대형 폭탄만도 여섯 발을 들여와 식민 권력에 대한 총공격을 기획했다. 근래에야 조명받기 시작했지만 해방 후 행보도 예사롭지 않다. 좌우합작운동에 투신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전쟁이 초기 전면적 양상을 벗어난 후에는 종전(終戰) 운동을 후원했으며 마침내 이승만 암살 계획을 세웠다. 분단 체제에서 남․북 어디에도 회수되기 어려운 삶을 산 셈이다. 한국전쟁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시현은 서울에 잔류해 있었으며 그런 만큼 전쟁의 참상을 속속들이 목격한 것 같다. 김시현은 특히 ‘서울 사수’ 방송을 녹음한 후 피난길에 올라버린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지도자가 국민을 속이고 저버린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한국인들의 트라우마로 새겨져 있거니와 김시현은 “민족을 버리고 간 놈이 무슨 대통령이냐. 역적이지.”라고 되뇌었다고 한다. 국민의 피를 애타하지 않고 분단에 아파하지 않는 대통령이 사라져야 진정 민주적․애족적 정부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 김시현의 믿음이었다.

‘개성 난봉가 부른 권애라’, ‘연애는 자유라고 외친 권애라’, ‘바나나 먹으며 거리를 활보하는 권애라’는 식민 말기부터 오로지 김시현의 아내로서 출현한다. 김시현이 참석했던 1921년 극동민족회의에 권애라도 파견됐었다고 하니 둘이 만난 것은 아마 그 회의석상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한동안 둘 사이엔 어떤 연관도 감지되지 않는다. 권애라는 귀국해 떠들썩한 풍문의 주인공이 되었고 김시현은 1923년에 체포되어 6년 여 옥살이를 했다. 같은 시기 권애라는 대한부인회 고문이었던 이병철과 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본부인이 있었다니 정식 결혼은 아니었겠지만 부부 동반으로 모임에 출석하고 아들 딸 낳고 시집살이까지 했던 모양이다. 흥미진진 권애라를 좇던 군중은 낙망했다. 충주 시집에서 순 조선식으로 차리고 알뜰한 살림꾼으로 산다는 소문에는 ‘너도 별 수 없구나.’와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 보자.’가 착종된 야릇한 심사가 따라 다녔다.

사상가이자 운동가였던 권애라지만 1920~30년대의 조선 사회는 권애라를 스캔들을 통해 기억했다. 운동가로서의 이력은 오직 그의 품행 불방정에 떠들썩한 관심을 쏟을 만한 전제에 불과하다는 듯. 그 무책임하고 방자한 시선은 독과 같았을 터이다. 소설가 김명순처럼 그 시선에 밟혀 간 이도 있었고, 허헌의 딸 허정숙처럼 근본 오불관언, 제 나름의 삶을 완성한 듯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군중의 탐욕스런 시선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하중이다. 위축이나 과잉을 피하기 어렵다. 더욱이 이병철은 ‘너무나 조선인 남성다운’ 인물이었던 것 같다. 1933년 권애라는 기대대로 이혼을 단행한다.

권애라의 인생에 김시현이 등장한 것은 그 이후다. 권애라는 중국에서 활동 중 아들 김봉년과 함께 1944년(1942년이란 설도 있다) 일본 특무대에 체포되는데, 이 모자가 중국으로 간 것은 김시현 때문이었다고 한다. 1941년 봄 창경궁에서 처음으로 세 식구가 상봉, 김시현을 따라 국경을 넘었다는 것이다. 여러 기록을 대비해 보아도 김봉년이 1922년생인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그 자신의 술회에 따르면 아버지를 만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요, 부모의 혼인 신고와 자신의 출생 신고도 해방 후 비로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권애라는 김시현의 정치적 분신처럼 활동한다. 중국에서의 활동, 1952년 김시현 투옥 이후의 바라지, 김시현 사후 1970년 국회의원 출마에 이르기까지, 권애라의 궤적은 ‘의열단원 김시현의 부인’이라는 몫을 벗어나지 않는다. 1973년 권애라가 세상을 떴을 때도 그 이름은 ‘고 김시현씨의 부인’으로 났다.

1922년생인 김봉년은 권애라와 김시현 사이 소생이었을까? 이병철과의 사이에서 낳았다는 아들의 출생년도가 같다든가, 김시현 역시 본부인이 있었다든가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 봉년의 내력은 더 복잡하기 쉽다. 그게 뭬 중요할까마는, 전반부와 후반부가 단절된 권애라의 인생에서 아들만은 연결의 고리였구나 생각하면 새삼스럽긴 하다. 애국투사 김시현의 부인이 되는 순간 권애라에게 20대 적 활달하던 시절은 봉쇄되었겠지만, ‘애국’과 ‘현모양처’ 속에서도 그 기운이 꺼지진 않았을 터이다. 3․1 운동의 저항 정신과 연애 자유의 담대한 정신은 오히려 걸맞는 짝일 수 있으련만, 단절의 내력은 길고 스캔들의 분리 효과는 확실하다. 여성에게 스캔들은 탈출구이자 함정이어서 좀처럼 생의 한 요소로 융합되지 못한다. 그래도 최근 몇 년 새 예외가 없지 않았으니 세월이 흐르긴 한 것일지.

응답 2개

  1. 지나다말하길

    재밌어요. 이승만을 암살하려 한 김시현, 이유인즉, “서울 사수’ 방송을 녹음한 후 피난길에 올라버린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분노” 때문, 그런 일이 있었군요. 20년대 때는 여자가 바나나 먹으며 거리를 활보하면 말이 많았군요…

  2. 케이말하길

    우- 권애라의 전후반 단절된 생에 어쩐지 자꾸 감정이입이
    되는 것이, 재미있네요. 게다가, 어쩐지 비시대적이고 조곤조곤한 ‘정경부인체’ 은근 중독성 있다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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