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의 뒷골목

우생학-순수와 우월을 지향하는 근대의 폭력 (2)

- Beilang(동아시아사상사연구자, 뉴욕이타카)

5. 세계적 추세로서의 우생학

우생학은 20세기 초의 세계적 조류였고 1907년에서 30년대 초까지 미국 각주에서 단종법이 시행되던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단종법이 널리 채택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20년대 말 캐나다, 덴마크, 스위스 그리고 30년대에는 독일, 스웨덴, 핀란드 그리고 아일랜드 등 다수의 국가가 단종법을 제정하여 70년대까지 유지한다. 이런 세계적 추세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실은 미국이 나중에 유태인 대량학살로 이어지는 독일의 우생학 연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 록펠러 재단은 1920년대부터 30년대까지 독일의 우생학자들과 깊은 연관을 맺으며 주요 유전학 연구소에 상당한 연구자금을 지원하여 독일의 우생학 연구를 발전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유태인 학살로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이 붙은 악명 높았던 멩겔레(Mengele)도 간접적으로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은 적이 있다. 멩겔레의 상급자로 직접 지원을 받은 페르슈어(Verschuer)는 종전 후 전쟁범죄로 기소되지도 않고 버젓이 미국 유전학회의 회원이 되었고 후에 뮌스터 대학 학장까지 지내다 죽었다.)

히틀러는 집권 이전인 20년대 중반에 쓴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이미 미국의 인종차별주의 정책들을 칭찬하며 미국 여러 주에서 시행되고 있던 단종법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한 바 있고 그의 유태인 강제 수용과 대량 학살 정책은 미국이 원주민들을 다룬 방식에서 영감을 얻은 바가 크다고 알려지고 있다. (Ward Churchill의 <Indians Are Us?: Culture and Genocide in Native North America> 참조) 일방적 모방을 떠나 우생학의 경우 지속적인 직접 지원이 있었다는 것은 겉으로 들어난 외형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폭력’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실제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미국이 독일 우생학과 유태인 집단학살의 기원이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가 있을 정도다. (Edwin Black의 <War Against the Weak: Eugenics and America’s Campaign to Create a Master Race> 참조)

우생학은 나라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역학아래 놓여 있었다. 진보적 세력이 타자에 대한 배려를 앞세워 우생학적 접근을 반대하고 시장과 경쟁을 앞세운 정치적 보수가 지지했을 것 같지만 실제 역사의 전개를 볼 때 이런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1933년 나치 독일이 유전병 방지 목적으로 만든 ‘강제 단종법’을 홍보하는 포스터. 정책의 극단성을 의식한 듯 “우리는 홀로가 아니다”라는 구호 아래 단종법을 제정한 나라(왼쪽)와 제정 예정인 나라들(아래와 오른쪽)의 국기가 실려 있다.

1933년 나치 독일이 유전병 방지 목적으로 만든 ‘강제 단종법’을 홍보하는 포스터. 정책의 극단성을 의식한 듯 “우리는 홀로가 아니다”라는 구호 아래 단종법을 제정한 나라(왼쪽)와 제정 예정인 나라들(아래와 오른쪽)의 국기가 실려 있다.

우생학의 발상지이며 제국주의 국가였던 영국이 단종법을 만들지 않은 것과는 달리 네덜란드를 제외하면 제국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현재 교육 그리고 성평등, 국가 청렴도 등 온갖 긍정지표에서 세계 최상위를 휩쓰는 모범적 복지국가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단종법을 일찍이 만들고 가장 적극적으로 시행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나치 독일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인구 당 가장 많은 강제 단종시술을 한 나라는 스웨덴으로 알려져 있다.) 아직 복지국가적 정책이 자리 잡기 이전이지만 30년대에 단초가 되는 정책들이 시행되기 시작했고 비교적 작고 동질성이 강한 이들 국가야말로 복지국가적 발상 아래 구성원에 대한 통제가 손쉽게 ‘타자’의 배제로 이어질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주의의 얼굴을 한 복지국가의 모습과 비인간적인 단종법이 역사적으로 충돌 없이 공존해왔고 나아가 서로를 필요로 한 것처럼 보인다는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봐야할까? 괴물이 되어버린 시장과 사적 영역을 제어할 수 있는 공적 세력의 대항마로 지금 국가를 다시 호명해내지만 그 국가는 시초부터 리바이어던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민주의’로 불리는 ‘사회주의’ 형태의 국가에서마저 아니 그런 국가에서 더 적극적으로 단종법이 집행되었다는 사실은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불편한 진실이다.

6. 미국 우생학과 교회 그리고 여성운동

우생학이 미국 내에서 가졌던 위상도 단순치 않다. 예를 들면 진화론에 반대하고 있는 보수적 교회세력 대 과학의 진실성과 그것이 주는 진보적 가능성을 믿는 진보세력의 구도는 지금껏 이어져오고 있긴 하지만 우생학은 당시 개신교 세력의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물론 카톨릭 교회와 보수 근본주의 교회의 반대가 있었지만 상당수 주류 교회세력은 커가는 과학의 위상을 빌어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나아가 새로운 과학적 연구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교회의 책무이며 우생학이 진정으로 더 낳은 세계로 이끌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우생학을 수용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면 주요 교단의 수백 명의 목사가 전국에서 우생학을 ‘전도’하는 해괴한 모습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다른 집단에 비해 대중에 미치는 영향력이 월등했던 그들의 열렬한 우생학 지지는 우생학 전파에 상당한 역할을 했고 우생학 신봉자들은 적극적으로 이들의 영향력을 이용했다. 그래서 미국에서 우생학 전파의 일등공신이 개신교회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을 정도다. 그리고 개신교의 우생학 신봉 이면에는 일찍 다윈주의를 받아들인 일부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역할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우생학의 반유태주의적 성격을 인지하고 있던 일부 유태인마저 이런 흐름에 동참한 것은 우생학의 파급력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이런 신념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처구니없는 것인가는 이후 역사가 생생히 증언하게 된다.

우생학이 가졌던 더욱 흥미로운 역사적 접점은 20세기 초 여성참정권 운동과 함께 태동한 진보적 사회개혁 운동인 여성운동이다. 미국 여성운동의 원조로 추앙받고 있는 마가렛 생어(Margaret Sanger, 1879-1966)는 당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여권운동가로 우생학과 여성운동이라는 배타적으로 보이는 두 흐름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 지를 잘 보여준다.

마가렛 생어의 1910년대 사진. 그녀의 도발적이고 전투적인 운동방식은 이후 여성운동의 하나의 전형이 되었다.

마가렛 생어의 1910년대 사진. 그녀의 도발적이고 전투적인 운동방식은 이후 여성운동의 하나의 전형이 되었다.

뉴욕 빈민가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생어는 유명한 폭로 소설 <정글>의 저자인 업튼 싱클레어, 아나키스트인 에마 골드만 등 당대의 급진적인 인물들과 어울리며 아나키즘 운동에도 뛰어들었고 여성의 권리에 눈을 떠 산아제한과 낙태의 자유야말로 출산과 유산, 불법 낙태, 육아에 시달리며 사는 여성들의 권리 신장에 가장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당시 불법이었던 피임과 낙태의 자유를 위해 맹렬히 활동하며 1916년 미국 최초의 ‘산아제한 클리닉’을 열고 (‘산아제한(birth control)이라는 말은 생어가 처음 만든 것이다) 현재 여성 의료의 중심이 된 ‘플랜드 패런트후드’(Planned Parenthood Federation of America)를 세운다. (여기서 제공하는 낙태시술 때문에 낙태를 반대하는 보수 정치세력에 의해 종종 정치적 시빗거리로 등장한다.) 당시로는 상당히 급진적인 여성의 성적 선택권과 성해방을 주창하며 반복된 체포와 투옥에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고, 당시로는 드물게 흑인여성, 유태인, 이민자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런 그녀가 후에 여성운동에 비판적인 보수세력에 의해 인종차별주의자이며 우생학 신봉자였다는 비난을 받게 된 것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그녀가 인종차별적이었다는 비난은 근거가 있긴 하지만 ―그 당시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운 백인은 거의 없었다― 그녀의 실천적 면모를 볼 때는 별 의미가 없다. 그녀의 활동은 당시 대표적 흑인 지식인, 운동가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그녀가 타인의 인종차별적 행위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는 많은 근거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상당한 양의 글을 보면 그녀가 우생학을 신봉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우생학에 내재한 인종차별주의도 함께 수용한 것처럼 보인다. 1920년대 초에 생어가 쓴 글에는 자신이 요구하는 피임과 낙태의 자유는 부적응자를 도태시키려는 우생학의 목적과 부합하며 지금은 많은 비난을 받지만 머지않아 우생학처럼 널리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나아가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정신장애, 신체장애를 가진 부적응자들의 증식을 억제하여 문명을 유지시키는가 하는데 있다는 우생학의 근본취지를 반복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생어는 이민자들에 대해서는 미국이 어떻게 그들을 악랄하게 억압하고 착취해왔는지 고발하고 그들이 미국을 얼마나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를 역설하면서 이런 문제를 피하는 방식의 하나로 교육을 통한 모성의 해방―남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임신과 출산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을 제안하고 있다. (Sanger, <Woman and the New Race> 1920 참조))

생어는 우생학적 목표를 강제적인 방법이 아닌 ‘자율적인 동기’를 통해 달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인종을 쇄신하고 문명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무엇을 강요하는 방식보다는 개개인 내면에서부터 그런 동인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위생과 성교육 그리고 피임과 낙태라는 수단을 통해 자발적으로 이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단순한 교육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과학적 이해에 기초한 성모랄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성해방주의자였고 피임과 낙태의 자유를 통한 여성의 해방을 소리 높여 외치며 실제로 그러한 삶을 실천했던 생어가 그와 동시에 교육을 통한 규율의 내면화와 과학에 의해 규제된 성윤리를 주창하며 사회의 우생학적 발전을 도모한 것이다. 이런 인도주의적 여성운동과 배제적이고 억압적인 우생학의 평화로운 공존, 그리고 자유와 해방의 메시지가 바로 자율에 의한 규제와 통제로 이어지는 상황은 성과 여성의 몸 그리고 출산의 정치성과 함께 대한 근대의 양면성, 과학의 양면성과 관련이 있다.

20세기 초의 상황을 보면 우생학 나아가 과학 일반은 논란의 지점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교회와 국가, 정치적 진보와 보수세력 등 갈등하는 사회적 힘들의 합의점 내지 타협점에 가깝다. 유전학은 사회의 개량을 목적으로 하는 근대적 과학의 산물이지만 하늘나라를 이 땅에 구현한다는 기도교의 이상과 부합하는 면이 있고 따라서 사회를 개량함으로써 신의 섭리를 인간의 손으로 이룬다는 신학적 해석을 가능케 했다. 여성운동의 경우에는 생어의 경우에서 보듯이 여성에게 피임과 낙태를 가능케 한 과학적 지식은 바로 여성이 스스로 임신과 출산의 통제하여 자신들의 몸을 통제하고 어느 정도의 삶의 자유를 가능케 한 동시에, 사회가 원치 않는 이들의 임신과 출산을 폭력적으로 막을 수 있는 억압의 수단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는데, 만약 개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임신과 출산을 사회의 필요와 요구에 맞춘다면 외부의 강압적 개입 없이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필요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여전히 우생학을 기독교 친화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지 그리고 여성해방의 도구를 찬양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우생학적 사회인식을 승인으로 이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런 의문은 논리적으로는 여전히 타당한 질문으로 남아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시대의 요구와 필요에 의해 타협된다.

인종의 개량을 통해 문명을 진보시키고 인간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역사적 진보에 대한 믿음과 소명 의식 (그리고 그 반대로 이대로 두면 문명이 퇴조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당시 널리 공유된 역사인식이자 정서였고 과학이라는 인간의 손에 쥐어진 가장 강력한 무기로 이제까지 자연의 손, 혹은 신의 뜻에 맡겨진 인간의 운명과 역사의 흐름을 인간 스스로가 환경을 통제하고 자신을 조작하여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 역시 당시의 조류였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하는 근대적 주체로서의 자유로운 개인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근대국가의 집단논리와 자본의 필요에 순응하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이율배반적 요구는 과학이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 이상적인 사회적 전망 속에서 타협되고 만 것이다.

유전적 질병을 가진 이들은 살아서 사회에 큰 부담이 될 뿐이라는 우생학적 메시지를 형상화한 1937년 독일의 포스터.

유전적 질병을 가진 이들은 살아서 사회에 큰 부담이 될 뿐이라는 우생학적 메시지를 형상화한 1937년 독일의 포스터.

세계사의 큰 조류에서 밀려나 있었던 조선에서조차 19세기 말에 우생학 담론이 등장하고 20세기 초에는 널리 퍼져나갔듯이 제국주의 국가, 비제국주의 국가 그리고 식민지 할 것 없이 우생학이 널리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그것이 시대적 과제나 요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미국의 경우 20세기 초의 자료들을 보면 정계, 학계, 재계, 교육계, 교회, 군대 할 것 없이 우생학적 사고는 널리 자리 잡고 있다. 우생학을 실천하기 위한 정책에 관해서는 편차가 존재하지만 인간의 우열에 대한 믿음, 그 우열이 유전적으로 결정된다는 생각, 그리고 ‘우’의 인정과 ‘열’의 배제에 의한 적절한 우열의 배치를 통해 사회가 제대로 유지되고 개선될 수 있다는 생각은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런 “상식”은 물론 기존의 인종주의와 과학의 이름을 빈 지식 담론에 의해 합리화되고 강화된 것이었다.

7. 현재형인 우생학

비록 나치의 만행으로 단죄되고 도덕적으로 합리화할 수 없는 말이 되어버렸지만 우생학은 그것을 단죄한 자, 단죄 받은 자가 공히 열렬히 지지했던 사상이자 사회적 실천이었다. 단종법은 공식적으로 70년대에 전 세계에서 대부분 폐기되지만 그것이 우생학적 요구와 문제의식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생학 연구의 주목적이 유전적으로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인간들을 제거 내지 도태시켜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으로 그 안에 이미 자본주의의 논리에 입각한 국가공동체의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 다시 말해 강제적 단종 같은 폭력이 단순히 몇몇 정신 나간 인간들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아직까지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자본주의’라는 고상한 제도와 ‘국가’라는 신성한 공동체 자체의 논리이며 ‘인종차별주의’ 같은 오래된 믿음에 기대어 그 폭력성이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정교하고 내면화한 형태로 우리를 옥죄고 있다.

과학의 힘은 나날이 커가고 있고 과학을 좌지우지하는 자본의 힘도 더욱 팽창해가는 이 시대에 우생학은 죽기는커녕 내면화한 개인의 욕망과 그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구매하는 상품으로 더욱 생생히 살아 있다. 이제 인간의 유전자의 구조가 모두 밝혀지고 그것을 조작할 수 있는 기술도 나날이 정교해져 생명이 인위적으로 복제되고 조작될 수 있는 시대에, 이전처럼 국가 권력이 자의적으로 단종과 같은 폭력을 공공연히 행하지 않는다고 우생학을 과거형으로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바람직한” 형질이 그대로 인간의 우열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그것이 개인의 경제적 가치로 이어져 그런 형질의 획득을 위해 만인이 투쟁하는 시대에 진입했다. 인간의 정자와 난자가 이미 상품이 되어 그 “우월”에 따라 가격이 매겨져 팔리고 있고 “정상적”인 자손에 대한 욕구는 더 정교한 태아검진을 통해 더욱 많은 생명들의 “자발적” 포기로 이어지며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에서 더 많은 개입으로 이어질 것이다. 아름다움, 뛰어난 지능, 건강, 장수를 가져다준다고 믿는 인간의 우월한 형질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그런 욕망을 만족시킨다는 명목으로 값비싸고 위험천만하며 비윤리적인 온갖 장난질은 과학의 이름으로 교육의 이름으로 그리고 자기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상품이 되어 팔리고 있다. 태어나기 전부터 죽는 순간까지 더 많은 폭력적 개입을 “자발적”으로 구매하느라 허덕이는 시대가 된 것이다.

내면화된 개인적 욕망이 아니라도 국가는 자원이 희소해지거나 분배의 문제에 직면하면 언제든 공적 정책들을 우생학적 판단에 따라 집행할 수 있다. 앞서 스칸디나비아 복지국가의 예에서 보았듯이 다수의 복지를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공리주의적 접근은 다수의 동의를 얻어 민주주의적 절차에 의해 승인될 가능성이 아주 크고 또 실제로 그래 왔다. 소위 선진 복지국가의 예들은 국가에 우리 삶을 내맡길 때 그 국가가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국가 구성원의 안녕에 복무할 때조차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앞서 얘기한 개인의 건강, 지능, 아름다움 등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공중보건’이라는 개념 자체가 역사적으로 우생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구성원의 우열에 따른 자원과 혜택의 차등적 배분을 가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생명의 기본조건인 깨끗한 물과 공기가 희소해 질 때 누가 그걸 먼저 차지하고 누가 먼저 배제될지, 치명적인 병이 돌고 치료약이 한정되어 있을 때 누가 먼저 치료를 받게 되고 누가 먼저 배제될지를 생각해보라. 우리시대의 우생학적 서열이 그 순서를 결정하리라.

8. 맺는 말—근대적 ‘개꿈’ 넘어서기

자원과 권력의 분배를 둘러싼 갈등이 점점 가열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생학은 아마 다른 옷을 입고 세상을 다시 휩쓸 것만 같다는 불길한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아니 그 불길한 미국 우생학의 뒷골목은 이미 한국에서 생생히 펼쳐지고 있다. 숱한 사람들이 더 나은 외모를 위해 비싸고 위험한 성형수술을 기꺼이 감내하고, 숱한 어린이들이 키를 크게 하기위해 성장 호르몬제를 복용하며 세계 최상위 학업성취도를 자랑하는 어린 학생들이 과외와 학원으로 뺑뺑이 돌며 자유로운 삶을 차압당하면서도 공부 못한다고 한 해에 수십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상한 국가가 인류역사에 존재한 적이 있던가? 그들은 어린 나이에 벌써 자신의 “열등성”과 그 우생학적 함의를 깨달아 버린 것이 아닐까? 국가나 집단이 강요하지 않아도 개인 스스로 자신의 “열등성”을 깨닫고 일찍 죽음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억지로 키를 키우고 죽도록 공부하고 얼굴과 몸매를 뜯어고치는 우생학적 전쟁을 치르게 만드는 이 시스템이야말로 진화된 “용감한 신세계”가 아닐까?

20세기 초 미국 우생학의 음습함과 중반 나치 독일의 끔찍한 사악함이 한국에서 조금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끔찍함 뒤에는 근대를 규정해온 성공의 꿈, 우월에 대한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이런 ‘개꿈’의 원조는 미국이다. 생각해보라. ‘선진’, ‘성공’, ‘우월’ ‘아름다움’ 등의 바람직한 것을 규정하는 표준이 어디 있는지를. 아무리 온갖 패악질을 해도 “선진국”의 모델은 ‘미국’이며 “성공”의 기준은 빌 게이츠에서 지금은 스티브 잡스가 되었고 “우월”과 “미모”의 전형은 백인 미국인이다. (개인적으로 소위 진보적 매체와 인사들에게서 만이라고 그놈의 잡스 타령 따위의 미국 타령은 제발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 이런 인종주의적, 우생학적 집단 개꿈의 원조 미국을 해체하지 않으면 이런 근대적 개꿈은 개인의 헛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목격하듯 집단적 폭력과 광기로 이어진다.

골튼은 우생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자연이 맹목적으로 천천히 그리고 무자비하게 행하는 것을 인간은 신중하게 빠르게 그리고 무리 없이 할 수 있다. 인간에게 그런 힘이 주어진 한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요즘 잘 쓰는 표현을 빈다면 동식물과 자연환경 일반에 자행해온 폭력적 삽질을 인간 생명 자체에도 가하겠다는 인간의 전지전능에 기초한 이 오만하고 자가당착적 발언 속에 우생학의 폭력, 근대의 폭력은 내재되어 있었고 우리는 여전히 아니 더더욱 그 폭력에 휘둘리며 살고 있다. 그는 “우생학은 기존의 종교를 대치하는 새로운 종교다”라는 말도 했다. 맞다, ‘자본’을 신으로 섬기고 ‘강함’과 ‘지배’ 그리고 ‘무자비함’을 덕목으로 하는 멋진 신세계의 종교!

응답 1개

  1. 이정림말하길

    일본도 한 인종하네요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