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가 특집

지식 경영학

- 안단호

#뉴턴역학의 탄생

누구나 과학을 접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통계학적 논리이다. 많은 사례나 실험을 통해 입증된 귀납적 사실이 진리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상이한 이론들이 서로 진리라고 주장하는 혼돈의 상태를 정리하기 위한 정치적 기술일 뿐이다. 마치 자동차를 시장에 내놓기 전에 하는 안전검사 같은 것이다. 그런데 안전검사를 통과했다고 해서 그 차의 성능이나 상품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듯이 이 정치적 기술은 전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과학은 어떤 대상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인정받고 있고, 그 중에서도 물리학은 모든 과학 분야의 종착점으로 화학, 생물학, 지구과학 모두 결국은 물리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여기에는 통계학 같은 안전장치가 아닌 다른 원동력이 작동하고 있다. 먼저 뉴턴역학이 탄생하게 되는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진리로 널리 알려져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관은 물체의 운동을 분류학적으로 포착한다. 천상의 물체가 운동하는 방식, 지상의 물체가 운동하는 방식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운동은 완전하기 때문에 오직 구형의 물체들만 존재하며 모든 운동은 원운동이다. 반면 땅의 물체는 변화, 수직, 수평운동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지상의 운동이란 녹슬거나, 수증기나 떨어지는 공 같이 위아래로 움직이거나, 던져진 공 같이 옆으로 움직인다. 여기서 수평운동은 외부의 동력이 없으면 멈추게 된다. 물리학적 관점에서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이것도 귀납법의 측면으로 봤을 때 완전히 틀린 이론은 아니다. 지상의 물체는 대부분의 경우 결국에는 멈추게 되어있다. 멈추지 않는 물체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이 특수상황을 연출함으로서 운동에 대한 새로운 형이상학을 만들게 된다. 천상의 질서와 지상의 질서를 하나의 질서로 보게 된 것이다.

갈릴레이는 한 가지 사고실험을 제안한다. [그림 1] 먼저 매끄러운 U자형 레일 끝에 공을 놓는다. 그렇게 되면 스케이트보드 선수가 양쪽 벽면을 타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이듯이 공 또한 반대편 경사의 일정 높이까지 오르게 된다. 이 때 반대편 경사가 점점 낮아지게 되어 완전한 수평이 되면 올라갈 일정 높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움직이게 된다. 이것이 관성의 법칙이다. 외부의 영향이 없으면 물체는 운동을 지속한다. 이로서 물체의 운동에 대한 플라톤적 구도가 완성된다. 순수한 등속 직선운동이 있고 그것을 음해하려는 외부세력이 존재한다. 지상의 물체도 외부세력만 없다면 천상의 물체처럼 운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로서 모든 분류는 해체되고 모든 현상에 들이댈 수 있는 하나의 관점만 남게 된다. 원인과 결과. 이 관점이 없다면 물리학은 존재할 수 없다.

한편 천상의 운동을 분석하던 사람들은 별들의 위치를 숫자로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것은 좌표계라고 불리는 인식의 틀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 당시에 수학을 연구하던 사람들이 제안한 것인데, 기준점이 설정되어 있다면 모든 위치는 세 개의 숫자로 표현이 가능하다. [그림 2] 결국 모든 공간적 대상을 계산 가능한 숫자로 변환시킬 수 있는 인식의 틀이 마련된 것이다. 천문학자들은 이것을 이용해 별들을 관측하면서 주기적으로 별들을 관찰하고 숫자를 남겼다. 티코 브라헤도 그런 학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평생을 별들을 관측하는데 보냈고 죽었을 땐 방대한 양의 숫자들이 남았다.

그림 1  갈릴레이의 사고실험

그림 1 갈릴레이의 사고실험

그림  2 구면좌표계

그림 2 구면좌표계

하지만 숫자들은 숫자일 뿐이다. 그 상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누군가 그것의 이름을 부를 때 숫자들은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된다. 케플러가 이름 부르는 자였다. 그는 티코 브라헤의 조수였는데 스승이 죽게 되면서 숫자들을 물려받는다. 하지만 케플러는 스승과는 다르게 지동설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이 숫자들을 그 틀에 맞게 다시 편성하여 분석하다가 몇 가지 규칙성을 발견해낸다. 그것이 케플러의 3법칙이다. 첫 번째로 행성은 원운동이 아니라 타원운동을 한다. 두 번째로 행성과 태양을 잇는 거대한 선은 시간당 일정한 면적을 그리며 지나간다. [그림 3] 세 번째로 행성운동 주기의 제곱과 태양과 행성 간 거리의 세제곱은 비례한다. 케플러는 이와 같이 천상의 질서를 지동설의 관점과 수학적 인식의 틀 안에서 찾는다. 생각하기 편한 것들의 조합으로 복잡한 것을 설명한다.

그림  3 케플러 법칙 두 번째

그림 3 케플러 법칙 두 번째

하지만 여전히 물리학이 되려면 몇 가지 요소가 남는다. 갈릴레이는 지상과 천상에 총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관점만을 제시했고, 케플러는 천상의 규칙성만을 찾아냈다. 이 간극을 메워야만 이론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그 간극을 메운 사람이 케플러가 죽은 10여년 뒤 태어났다. 그가 바로 뉴턴이다. 40대 초반 쯤 그는 갈릴레이와 케플러의 말들을 포섭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버린다. 그것이 프린키피아다. 여기에는 운동에 대한 3가지 법칙이 나온다. 첫 번째는 갈릴레이가 이야기 했던 관성의 법칙이다. 두 번째는 순수한 운동을 음해하려는 힘의 정체를 밝혀놓은 것이다. 그는 힘(F)이 운동량(mv)의 변화를 만든다고 말했고 그것이 흔히 알려져 있는 F=ma의 정체다. 여기서 변화를 구체적으로 다루려면 수학적 틀이 필요하다. 그는 미분과 적분 개념을 만들었고 그것을 통해서 이 운동의 3가지 법칙을 구체적인 상황에 맞게 변형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작용 반작용의 법칙인데 이것은 관찰 대상의 내부와 외부를 규정지으면서 시작한다.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뉴턴은 운동량의 변화를 일으키는 힘은 오직 외부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상황에 대해서 외부와 내부를 규정짓는 절대적 기준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반면 상대적 기준을 만들기는 쉽다. 그래서 관찰자가 골라잡은 물체들이 내부로 규정되고 만약 그것들의 운동량의 총 합이 변하게 되면 외부에서 힘이 가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내부에서 주고받는 힘이 문제인 것이다. 만약 물체들이 서로 부딪혔을 때 서로에게 작용하는 힘이 정확히 반대가 아니라면 두 물체의 운동량의 합은 유지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 실험이 보여주는 규칙성에 위배되기 때문에 성립해야만 한다.

이 세 가지 법칙은 여러 가지 물리량들의 정의와 관점만을 이야기 할 뿐 실제로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되어있지 않다. 그래서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소개한다. 모든 물체 사이에는 힘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 힘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서로 힘을 작용하는 두 물체의 질량에 비례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운동의 3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적용하면 케플러의 3법칙을 연역적으로 유도해낼 수 있다. 게다가 지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운동들 또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만유인력의 구체적 수식은 실험으로 유추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험이 보여주는 숫자들로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종류의 개연성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99, 201, 303, 407과 같이 100정도 씩 커지는 숫자들 다음에 나올 숫자는 이론적으로 이야기하기에 따라서 501이 될 수도 있고 499가 될 수도 있다. 단지 크게 다르지만 않다면 우리는 이론과 실험의 차이를 ‘오차’로서 관리할 수 있다. 결국 뉴턴이 만유인력이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의 역제곱에 비례한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수학적으로 타원을 만들어내기 위한 인위적 결과물이지 그것이 자연의 근본적 원리는 아니다. 조금 더 강하게 이야기하자면 과학은 설명방법일 뿐 진리와는 관련이 없다. 케플러가 뉴턴과 같은 방식의 설명을 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에 등장한 아인슈타인 역학이 보여주듯이 오히려 과학은 그 진리를 찾는 것이 계속 실패할 때만 유지된다. 과학은 숫자들을 설명할 맥락을 제공할 뿐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포착된 뉴턴역학 발생의 특성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일어날 수 없다고 판단되었던 것이 어떤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지 포착하고, 그 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2) 개념들을 수학적로 정의하고 대상에서 그 숫자를 뽑아내는 방법을 정한다. (3) 숫자들을 보면서 가능한 규칙성들을 포착한다. (4) 앞의 세 가지 과정들을 통해서 만들어진 담론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몇 가지 키워드나 원리를 만들어 규칙성들을 수학적으로 연역한다. (5) 다른 현상들에도 적용하여 이상이 없는지 확인한다. 이런 과정의 반복이 과학을 유지시켜왔다. 과학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어떤 요소들을 포섭하면서 탄생한다. 이것은 통계학이나 귀납적 추론이 보여주는 것과는 아주 다른 절차다. 하지만 여기서 과학의 정당성이나 논증과 같은 측면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이상한 결과를 도출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국가다.

#국가

뉴턴역학의 성공은 국가라는 장치를 만들어내게 된다. 푸코는 ‘안전, 영토, 인구’에서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과 교회의 사목제도에 의해서 개별적으로 통치되던 유럽의 사람들은 16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기계론적 세계관에 의해 더 이상 자연이 신에 의해서 통치되는 것이 아니라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신이 세계의 각 구성요소를 세밀하게 지켜보고 돌보는 것으로 생각되다가 자연이 인간이 인식 가능한 법칙들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생각이 퍼지게 되자 사람들은 자신들을 돌볼 신이 아닌 다른 장치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런 흐름이 정치가라는 새로운 집단을 만들어내게 된다.

정치가는 처음에는 현대와 같은 직업적 개념이 아니었다. 그들은 특정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고 종교적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당시의 통념으로는 신만이 유일한 복종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정치가들은 과학적 세계관에 의해 신이 더 이상 사람들을 통치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복종해야 할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 장치로서 국가이성을 이야기했다. 군주가 백성들에 대해서 가족의 아버지와 같이 구성원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잘 돌보기 위해서 신과 같은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군주는 이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통치해야 한다. 하지만 군주들은 이 주장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항상 교황의 권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개인적 권익만을 수호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요구가 생기지 않으면 주장은 아무런 생명력이 없다.

그러나 30년 전쟁을 통해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지고 더 이상 종교가 권력행사를 할 수 없게 되자 군주들은 서로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방식으로 국제관계를 재편하게 된다. 전쟁을 제도화 하여 각 국가는 군대를 만들고 외교를 통해 서로의 세력을 견제했다. 힘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서로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때문에 서로의 국력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고 여기서부터 백성들을 잘 돌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개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소득은 얼마인지, 얼마나 태어나고 죽는지를 알고 잘 돌보는 것이 국력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사람들의 생필품이나, 건강, 직업과 관련된 지식과 복지제도 혹은 통제를 위한 경찰제도 같은 것들이 생기게 된다.

이런 경향은 국가와 학문의 상호작용도 만들어내게 된다. 신학이 종교와 영합했다면 과학은 국가와 영합한다. 경제학이 대표적이다. 경제학은 뉴턴역학과 같이 모든 인간의 경제적 활동을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법칙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으로 간주되면서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는 어떤 이론적 인간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런 개인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이론적으로 창조하고 그것이 보여주는 결과가 실제 현상과 어느 정도 일치하면 그것을 설명한 절차까지 모두 진리로 받아들인다. 뉴턴역학이 진리로 받아들여진 것과 같은 과정이다. 흔히 이것을 과학적 방법론이라고 부른다. 결국 국가는 이 검증된 이론을 사용해 제도를 만들고 국가를 운영한다. 그리고 이 제도에서 배제된 인민들은 ‘오차’로서 관리된다. 국력과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오차들이 강해지거나 많아져서 정치나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까지 이론과 형식 그리고 제도는 유지된다. 그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지식 경영학

부숴버려라, 형제들이여, 이 새로운 서판 또한 부숴버려라! 세상에 지쳐있는 자들과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 그리고 옥리들이 이 서판을 내건다. 보라, 이것 또한 예속으로 끌어들이는 설교의 하나이니!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크나큰 동경에 대하여

뉴턴역학의 탄생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어떤 대상을 다르게 설명함으로서 인식의 영역이 아니었던 것을 인식의 틀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이 진리나 검증과 같은 본질적 가치에 치중하게 될 경우 지식은 끊임없이 어떤 종결 점을 향해 수렴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경우에도 지식은 그것을 포착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당화하는 도구로 쓰이게 된다.

그것은 국가와 학문의 상호관계가 아주 잘 보여준다. 과학이나 통계학적 지식은 국가에 개인이 예속되게 만드는 장치다. 국민은 학계와 국회가 검증한 제도에 복종해야 한다. 그래서 제도 밖에서 형성되는 수많은 다른 삶의 양식들은 그 기준에 방해가 될 뿐이다. 결국 권력을 지닌 전문가의 어휘와 논리가 다루지 못하는 개인들은 배제된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서판을 끊임없이 만들고 부수는 과정을 반복해서 말들이 정체되지 않고 순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오차로 관리되던 요소들을 파악하고 그것을 배려하는 새로운 지식과 삶의 양식을 구성해야 한다. 그 방법은 말에 다른 말들을 덧붙여 결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절차를 만드는 일이다. 이것은 각각의 개인들이 전문가와 같은 남이 자신을 설명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때, 자신의 어휘와 말을 그리고 삶의 양식을 생산하려고 노력할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개인’이 ‘지식’을 ‘경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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