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가 특집

푸코의 진실말하기와 탈핵

- 김상수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한 지 1년이 지났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전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이다. 지난해에 냉온정지되었지만 지금도 원자로의 온도가 상승해 멜트다운의 위험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1년이나 지난 지금도 가끔씩 방사성 먼지들이 한반도를 쓸고 지나갈 거라는 기후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이에 원자력 발전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신과 불안도 커지고 있다. 국내에는 이미 21기의 원자로가 발전에 이용되고 있으며, 일본에 이미 건설된 원자로와 앞으로 중국 동부 해안에 건설될 원자로까지 합하면 한국은 거대한 핵발전의 자장 안으로 들어가 있는 셈이다. 이런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발전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정부와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극히 낮다.’, ‘핵 발전 없이 전력수급이 불가능하다’, ‘친환경적이고 저렴한 에너지’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일반 국민들은 정부와 전문가들이 내놓은 자료와 증거들로는 안전성을 판단하기 어렵다. 방사능을 에너지 소비량과 원자력 발전의 의존도 등의 통계 자료를 들이 대면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수밖에 없다. 진실을 아는 것만이 중요하다면 엔지니어 등의 전문가 입장으로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와 같은 사건이 국내에서 일어날 확률은 극히 낮습니다.” 하지만 그 진실을 인식하고 납득하는 것으로 족할까?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요구하면, 중립적이라고 여겨지는 전문가가 제시하는 진실을 던져준다. 설령 그 전문가가 ‘통계적 위험 평가'(PRA)와 같은 황당한 잣대를 들이댈지라도 평가가 끝나는 순간 우리는 전문가의 결론을 진리라고 믿는다. 1975년, 그 ‘통계적 위험 평가’를 통해 노심용해가 뉴욕 양키스타디움에 운석이 떨어질 확률정도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4년 후 스리마일 섬에서 냉각장치 파열로 인해 핵연료가 누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보편적이기는 커녕 진리와도 전혀 상관없는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우리는 혹시 그 전문가를 제 3의 심급으로 놓고 객관적이라 믿으며 그에게 통치되고 예속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선택하여 자기 스스로 온전히 자신의 삶을 지배할 수 있을까?

모두가 보편적 진리에 집중할 때 미셸 푸코의 주체에 대한 연구는 꽤 흥미롭다. 우리는 ‘옳냐 그르냐’를 먼저 따지려고 한다. 하지만 푸코는 진리에 복종하려 하지 말고 진리의 효과를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진실이 낳는 존재변형의 효과가 중요하다. 어떻게 진실의 주체가 될 것인가, 그 진실과 우리 자신이 맺는 관계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듣는 우리에게서 변화와 실천 속에 진실이 알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과연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사건이 우리 앞에서도 나타날 것인가? 그 진리를 판별하는 것은 지금으로선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우리는 어떤 변화와 실천을 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praemeditatio malorum에 집중한다. 스토아주의에서 praemeditatio malorum을 최악의 것들에 대한 시련에 대한 수련으로 규정했다. 최악의 불행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고려해야 하며 그것은 불확실성의 여지를 갖는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라 최악의 체험이며 곧 닥칠 불행이어야 한다. praemeditatio malorum은 미래에 대한 상상적인 사유가 아니라 미래를 소거하여 현실로 축소하는 일이다. 원자력 발전소의 최악의 경우를 확률적 관점으로 보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저 확률적 수치를 얻을 뿐이다. 대신 스스로 움직이고 변화하면서 진실에 관계 맺는 능동적인 주체가 되어야 한다. 원자력 발전소가 최악의 결과로 다가올 때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상상한다면 그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현실을 바꾸어가고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문 지식인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 것일까?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에서 인용하는 에피쿠로스학파에게 진실말하기(parhêsia)는 단지 자기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변화시키는 작업을 위해 유용한 것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게 주체의 변형에 관여하는 테크닉이다. 세네카의 진실 말하기의 목표는 ‘진실의 인식’이 아니라 타인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정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청자를 수동적으로 이끌고 스스로 판단하는 의지를 꺾어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답을 이미 가지고 있으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가 생각하는 정답으로 이끌고 유도하는 것이 과연 지식인의 역할일까?

푸코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인식의 눈만을 옮기며 사태를 관망하고 진실을 이야기해주는 것보다는 직접 실천하여 사건에 뛰어들어 진실을 전달해주는 것을 택했다. 높게 나는 비행기의 편한 좌석에 앉아 작게 보이는 군중들을 보며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것이 아니다. 군중들과 함께 움직이며 그들과 함께 높은 산을 오르려 하는 것이다. 노동자 호세와의 대화에서 푸코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식인이란 생산장치가 아니라 정보장치에 접속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설득시킬 수도 있고, 신문에 글을 쓰거나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도 있다. 그는 또한 과거의 정보장치에도 접속되어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직접 소유하지 못하는 어떤 종류의 책들을 읽고 그 독서가 제공하는 지식을 갖게 된다. 따라서 그의 역할은 노동자의 의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노동자의 의식은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역할은 노동자의 이 의식, 이 지식이 정보체계 안에 들어와 널리 유포되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해서 결국 현재 진행 중인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또는 노동자들이 이런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지식인의 해야 할 일이란 이미 형성되어 있는 노동자의 의식에 찬물을 끼얹어 자신이 원하는 생각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사태를 지식인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지식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노동자의 의식에 대한 고정관념과 생각을 버리고 정보장치의 역할을 하면 된다. 정보장치가 되어 노동자 가까이에서 지식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정보력을 통해 노동자의 의식을 널리 퍼뜨릴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방사능에 대한 공포에 찬물을 끼얹어 정신 차리게 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일까? 전문가와 지식인은 정보체계와 국민들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국민들의 의식들이 유포되어 있는 것을 도와야 한다. 어느 누군가는 원자력 발전소 근처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공포를 느끼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식인들은 이러한 위협과 공포가 남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널리 알려야한다.

최근 지식인으로서 나서서 핵의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단체가 속속 설립되고 있다.

지난달에는 탈핵 법률가 모임 ‘해바라기’가 출범해 신고리원전 5,6호기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청구를 신청했다. 지난해 11월 100명이 넘는 인문 사회 이공계 교수가 모여 “탈핵에너지교수모임”이 결성하고 원전의 위험성을 알리는 데 주력한다. 올해 1월에는 ‘핵 없는 사회를 위한 의사회’가 창립되어 탈핵과 치료와 진단을 위한 방사선의 남용을 막기 위해 의사들이 모였다. 또, 각 야당들은 정당정책 토론회를 통해 탈핵을 위한 에너지정책 및 원전정책에 대해 신빙성 있는 계획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런 전문가 집단의 행동들은 각자 자신의 전문성으로 정부의 역학조사 발표를 분석하고 반박하고 정확한 정보를 알려 국민들이 원전에 대해 직접 판단할 수 있도록 한다. 국민들 대신 판단과 결정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각종 지식들을 제공하여 직접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대다수의 개인들이 수많은 가능한 상황에 대해 맹목적이지 않게 반응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국민들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아닐까?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고 한국에 첫 비가 내리던 날, 방사능비가 내릴 거란 소식으로 온 국민이 걱정하였다. 그 날 우산을 써야할 지 말아야 할 지 애매한 가랑비가 내렸다.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핵의학과 선생님들이나 방사선 검출기 연구실의 석박사 등 방사선이나 핵물리학 쪽 전문가들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방사능비에 모두 동일한 반응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비를 조금이라도 맞을까 철통같이 우산을 쓰는 사람도 있는 반면, 이깟 비쯤 좀 맞으면 어떻겠냐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자는 평소에도 피폭을 많이 받으니 조금이라도 피폭을 덜 받겠다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이쯤 적은 피폭이 뭐가 대수란 이유였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공통으로 인정한 것은 그 날 내린 비의 방사능 수치는 매우 미량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사람들이 진실에 대해 반응하는 행동들은 상반되었다. 미량의 방사능에 대해 ‘건강에 영향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면 스스로 평가한 확률에 근거하여 ‘안전하다’를 손쉽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확률은 어디까지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확실성에 대한 척도일 뿐 불확실함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 역시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 잘 모른다. 그렇다면 ‘안전하다’ 대신에 ‘안전한지 모르겠다.’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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