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이 여인을 보라! – 남의 집을 기웃거리는 집 없는 사람들의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 –

- 황진미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중에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혼자로 남아 깨어나,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뭇잎 떨어져 뒹굴면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불안스레 방황할 것입니다…..

-릴케 <가을날> 증에서

<세상의 모든 계절>은 ‘집’이 있는 사람과 ‘집’이 없는 사람에 관한 영화이다. 물론 여기서 ‘집’은 물리적 공간(house)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정서적 유대(home)을 뜻하는 말이다. 위의 한용운 시에 나오는 땅, 집, 민적(民籍)도 물리적 실체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닐 것이며, 릴케의 시에 나오는 ‘집’도 부동산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계절>은 위 시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의 ‘집’이 있는 자와 집이 없는 자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이다. 대지에 굳건히 뿌리내린 톰&제리 부부의 삶과 그것을 부러워하며 불안스레 이리저리 방황하는 메리의 뿌리 뽑힌 삶. <당신을 보았습니다> 가 1인칭 시점으로 그린 메리의 시이고, <가을날>은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그린 메리의 시인 반면, <세상의 모든 계절>은 3인칭 관찰자 시점의 메리의 영화인 셈이다.

<세상의 모든 계절>이 메리의 영화라는 점에 이의를 제가하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영화의 플롯은 톰 부부를 중심으로,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이들이 순차적으로 주변 인물들과 만나는 형식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톰&제리 부부가 영화의 주인공이고 지인들은 조연일 거라 생각하기 쉽다. 그중 메리는 가을을 제외한 세 계절에 모두 등장하므로 ‘주요 조연’쯤 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메리의 역할을 맡아 불세출의 연기를 보여준 레슬리 멘빌이 2010년 전미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제작자나 평단은 메리를 주인공으로 보고 있다. 영화는 톰&제리 부부를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을 방사형으로 배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톰&제리 부부를 구심점으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인상적인 라스트 신은 톰 가족의 화목한 대화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톰 가족에 둘러싸인 메리를 길게 클로즈업하는 숏으로 맺는다. 영화는 톰&제리 부부라는‘안’을 통해 메리를 비롯한 외로운 인간들이라는‘밖’을 비추는 구조이며, 영화의 시선은‘밖’을 향해 있다. 비유하자면 <세상의 모든 계절>에서 톰&제리 부부는 토크쇼의 호스트 같은 역할이다. <세상의 모든 계절>은‘톰&제리’토크쇼에 초대된 게스트들에 관한 영화이며, 톰&제리 라는 안정된 프리즘을 통해 굴절, 분산되는‘집 없는 자들’의 불안을 지그시 응시하는 영화이다.

1. 지독한 절망과 우울의 냄새

독립된 단편영화인양 보이는 오프닝 시퀀스는 마치 오페라의 서곡처럼 영화전체의 분위기와 주제를 압축하여 보여준다. 어두운 표정의 중년부인이 불면증을 호소하며 의사의 진료를 받는다. 의사는 불면증을 일으키는 원인을 찾기 위해 다각적인 질문을 던지지만, 환자는 다 귀찮고 짜증스럽다. 수면제를 처방받기 바랄 뿐이다. 카메라는 의사가 만삭임을 보여주고, 이후 환자에게 폐경유무와 가족사항을 묻는 질문이 이어진다. 환자는 폐경이고, 남편과 자식은 모두 떠난 상태이다. 만삭의 의사는 충만함을 상징하고, 폐경에 가족이 다 떠난 환자는 불모와 고독을 상징한다. 의사는 환자가 불안하고 우울하다는 소견을 밝히며 상담사에게 가서 상담을 받을 것을 권고한다.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고 출연진의 이름 자막과 더불어 톰&제리 부부의 주말농장 일과 톰의 지질공학자로서의 업무를 비춘 화면이 빠르게 지나가고, 상담사인 제리가 그 환자를 상담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제리는 환자에게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인지 묻는다. 환자는 질문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그녀는 삶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다른 삶(different life)”가 필요하다고 하며,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답한다. 지독한 절망과 우울의 냄새이다. 사실 의사나 상담가는 환자의 고통을 번역하는 일종의 매질(media)이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윤동주 <병원>중에서)는 시구처럼 제리는 환자의 고통에 가닿을 수 없다. 이후 영화는 톰&제리 부부라는 매질(media)에 비춰진 메리와 켄과 로니의 쓸쓸함과 공허함을 펼쳐 보인다.

2. 내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메리는 자신이 행복하고 자기 삶에 만족한다고 말한다. 작지만 정원도 딸린 아파트에 직업도 안정적이고 건강도 좋고 독립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모습은 불안해 보인다. 끊임없이 곁눈질로 낯선 남자의 시선을 의식하고, 제리의 삶을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 남자에게 여자가 있음을 아는 순간 실망하는 표정이 스치고, 짧은 순간에도 감정기복이 심하다. 사실 메리는 자존감이 낮다. 일찍 결혼했다 이혼했고, 유부남과 사귀었다가 헤어졌다. 술에 취하면 좁은 월세 아파트에 혼자 사는 신세를 한탄한다. 지금도 나이에 비해 상당히 예쁘지만 남자들은 그녀의 실제 나이를 알고 도망간다.“온전한 사람, 자유로운 영혼, 독립적인 여성, 긍정적인 여자” 등의 수사를 과장되게 남발하고 비서 업무나 학력 등을 부풀리기도 하지만, 역시 낮은 자존감의 증거이다. 히스테리오닉 성격장애(hystrionic personality disorder)를 연상시키는 그녀는 “내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어”(different life?)라고 말한다. 외로운 데다 주위를 배려하는 능력이 부족한 탓에 허둥대거나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등 민폐가 심하다. 그녀는 잠을 잘 자지 못하고, 냉장고는 텅 비었고, 요리는 못한다. 메리는 톰&제리의 집에서 아늑함을 느낀다. 톰&제리는 둘 다 요리를 할 줄 알고, 경작을 즐긴다. 메리는 요리와 경작을 하지 못하고 이를 해줄 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원사 겸 요리사 겸 남자친구)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요리하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요리와 경작은 ‘집이 있는 자’이자 ‘뿌리내린 자’의 특성이자 재능이다. 메리는 톰&제리의 안정된 애정관계를 부러워하며, 톰과 부부의 아들 조에게 과도한 애정을 표하기도 하고, 심지어 조의 여자친구를 시샘하기도 한다. 톰&제리 부부에게서 느껴지는 안온한 가정의 행복을 온몸으로 원하기 때문이다.

3. 조난당한 들짐승 같은 몰골로 만나 나누는 짧은 포옹

이런 메리에게 추파를 던지는 남자도 있다. 톰의 친구 켄은 나이 들어 젊은이들에게 사회적 주도권을 상실한 상황에 박탈감을 느낀다. 친구들이 죽고 유대감을 상실한 채 직장에서 판에 박힌 일을 하는 켄은 자족감을 느끼지 못한다. 켄은 자신의 결핍을 메리에게 들이대며 풀고자 한다. 그러나 메리는 켄이 뚱뚱한데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안정해 보여 싫다. 톰의 형 로니는 평생토록 그를 돌봐주던 제빵사 아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어찌 할 바를 모른다. 2년 전 집을 나간 아들 칼은 장례식에 시간 맞춰 도착하지 못한다. 칼은 자신도 없이 장례식을 치른 데다, 톰의 가족이 와서 장례식을 도맡는 것이 못마땅하다. 톰 부부는 아들 과 사이가 좋고 아들이 데려온 여자친구와도 대화가 잘되지만, 로니 부자의 관계는 그렇지 못하다. 서른 살의 조가 원만한 성격의 인권변호사인데 반해 마흔 살의 칼은 사회적 안정도 성숙한 인격도 갖추지 못했다. 아내의 장례식 뒤, 톰의 집에 머물게 된 로니는 멍한 눈빛으로 TV를 본다. 그때 메리가 처참한 몰골로 찾아온다. 메리가 조카뻘인 조에게 흑심을 품고 조의 여자친구를 시샘하는 것을 본 이후, 제리는 메리를 한동안 초대하지 않았다. 메리는 제리의 냉대로 비참함을 느껴,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것조차 잘 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톰&제리 부부가 주말농장에 간 사이, 집을 보던 멍한 눈빛의 로니와 벌벌 떠는 불청객 메리가 만난다. 자신의 일상을 영위할 수 없는 두 사람이 주인 없는 집에서 조난당한 들짐승 같은 몰골로 만나 나누는 짧은 포옹. 그러나 톰&제리 부부가 돌아오고, 아들커플이 와서 화기애애한 식사와 환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메리와 로니는 다시금 황폐하고 허망한 눈빛으로 우두커니 앉아있다.

4. ‘따뜻한 집 밥’이 먹고 싶어 남의 집을 기웃거릴 때

사람들은 노년의 평화와 가정의 행복을 소박한 꿈 인양 말한다. <세상의 모든 계절>을 보고 “나도 톰&제리처럼 늙고 싶다”는 감상을 피력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리 만만한 꿈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계절>은 그러한 노년이 무척 고귀한 가치를 지닌 것임을 잔잔하게 웅변하는 한편, 누군가에게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지복의 삶이라는 사실을 신랄하게 일깨운다. 비단 경제적 불평등만이 문제가 아니다. 어떤 이에게는 안정된 인간관계와 인격이 있고, 누군가는 불안과 우울과 외로움뿐이다. 제리는 이를 “운이 좋았다”고 겸양되게 표현하고, 메리는 이를 “자격이 있다”고 부러움에 차서 말한다. <세상의 모든 계절>은 정(情) 혹은 복(福)의 불평등에 관한 영화이자, 요리와 경작을 할 수 있는 자기충족적인 인간들과 그렇지 못한 탓에 결핍에 시달리는 자들의 극과 극을 체험시키는 영화다. 요리와 경작을 할 수 없는 이들은 그러한 배우자를 찾는데 진력하거나, 그마저도 번번이 실패하면 남의 집을 기웃거린다. 집이 없는 자들, 정이 고파 헤매는 자들이 ‘따뜻한 집 밥’이 먹고 싶어 남의 집을 기웃거릴 때, 집주인은 그들에게 쪽문은 열어주지만, 집을 통째로 내어주지는 않는다. 영화는 불균등한 행복과 교양 있는 이웃의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며, 윤리에 대해 반문한다. 자신의 집을 갖지 못한 가련한 이의 민폐를 어디까지 관용할 것인가. 거기까지가 ‘행복한 자’의 윤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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