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가 특집

푸코의 정치적 실천과 통치성의 사유

- 박정수(수유너머R)

1977년 무렵부터 사망할 때까지 푸코의 사유는 통치(gouvernement)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후기 푸코 하면 떠오르는 ‘생체권력’, ‘안전’(security), 주체화의 윤리, ‘자기에의 배려’도 통치(성)의 사유로 귀결된다. 마지막 이태 동안의 강의 제목이 ‘자기와 타자의 통치’인 것도 이를 보여준다. 보통 ‘통치’ 하면 ‘정부’나 ‘정치’를 연상하는데 푸코는 통치와 정부(정치)가 동일시된 사실 자체를 아주 낯설게 본다. 도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국가의 임무가 국민을 통치하는 거라고 여기게 되었을까? 혹은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사람들은 자기 삶의 통치를 국가에 의탁할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이런 의문 속에서 푸코는 통치와 정치, 통치와 지배(군림)는 원래부터 다른 것이고 그 사이에는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간극이 있음을 본다. 사람들의 품행을 특정한 방향으로 인도하는 제반 실천들을 뜻하는 ‘통치’라는 심상한 단어에 푸코가 그토록 집중한 이유와 효과는 무엇일까? 푸코가 ‘통치’(gouvernement), 혹은 통치성(gouvernementalit)에 몰두한 것은 77년 무렵이다. 77~78년의 콜레쥬 드 프랑스 강의 제목은 비록 ‘안전, 영토, 인구’이지만 실제로 연구하고 싶은 주제는 ‘통치성의 역사’라고 했다. 이 무렵 푸코의 정치적 개입은 절정에 이르렀다. 70년대 초부터 감옥을 중심으로 한 투쟁, 소련과 프랑코 정권의 반체제자들을 위한 투쟁, 이민자와 기층 노동자들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던 푸코는 77년의 크루아상 사건과 78년의 이란혁명, 81년 폴란드의 쿠데타에 논쟁적으로 개입하면서 통치 문제를 사유했다.

통치받는 자의 권리

77년 독일적군파(바더 일당)의 변호사였던 크루아상이 프랑스로 망명하고 강제송환의 위협을 받았을 때 푸코는 ‘통치받는 자의 권리’를 내세우며 항의를 조직했다. 망명권을 통치받는 자의 권리로 파악할 때 그것은 국가권력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교정한다. 18세기 이래 국가는 피지배자에 대한 지배(군림)의 도구가 아니라 영토 내 피통치자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 관리하는 통치성으로 존속해 왔다. 따라서 피통치자의 망명은 지배자에 대한 투쟁의 정당성 때문이 아니라 통치이성을 저버린 정부에 대한 정당방위로서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차이 때문에 경찰국가로 치닫는 서독을 비판하고 그 지배권력에 대한 투쟁의 정당성 속에서 독일적군파와 그를 변호한 크루아상을 옹호한 들뢰즈와 푸코의 사이가 멀어졌다. 푸코는 독일적군파의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명확히 반대하면서도 크루아상의 망명권은 통치받는 자의 정당방위로서 옹호한 것이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통치받는 자의 권리는 인권과 다르다. 인권은 시민권의 연장선상에서 규정된 법적 개념이지만 통치받는자의 정당방위는 사법적인 권리가 아니다.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는 계약이나 법으로 규정된 관계가 아니다. 통치자가 피통치자에게 행사하는 권력은 법으로 정해진 권한에 구애받지 않고 피통치자의 생명과 영혼, 품행과 실존의 제 국면에 직접 작용한다. <안전, 인구, 영토>에서 푸코가 해명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18세기 이래 국가는 지배의 정당성이 아니라 통치의 정당성, 즉 개별적이면서 통계적 차원에서 영토 내 인구의 생명과 영혼, 실존과 품행을 인도, 보호, 관리하는, 즉 인구의 삶을 통치하는 기구로서 합리화되어 왔다. 그 통치국가의 기본전제는 “나는 너희가 경계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너희에게 보증한다”는 안전협정으로, 이 안전협정은 사회계약의 법적, 시민적 범주를 넘지 못하는 인권(인간의 보편적 권리)보다 훨씬 더 일반적이고 절대적이다. 통치받는 자의 권리가 절대적인 것은 그것이 법적 권한 바깥에서 주권자가 피통치자에게 행사하는 통치권의 절대성에 대응하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통치의 영역은 법의 외부이며 그렇기 때문에 통치자의 권력과 피통치자의 권리는 법으로 한정할 수도 없고, 상대화될 수도 없다. 이와 관련하여 77년 6월 푸코는 소련의 통치자, 브레즈네프의 프랑스 방문에 항의하기 위한 집회를 몇몇 반체제자(dissident)들과 개최하면서 ‘반체제’를 통치받는 자의 절대적 권리로 규정한다. 소련의 반체제자들과 연대하는 것은 그들이 소련체제 대신 프랑스의 정치체제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의 통치체제에 반대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장래의 지배자’이기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항구적인 반체제자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항구적인 반체제자란 자신에게 주어진 통치 시스템을 참을 수 없어서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이의를 표명하고 그 때문에 소추되는 사람들이다. 1년 후 푸코는 <안전, 영토, 인구>에서 주어진 통치 시스템에서 이탈하는 행위에 ‘반체제’라는 부정적 단어 대신 ‘대항통치’라는 이름을 붙인다. 주어진 통치질서를 거부할 뿐 아니라 그 통치 시스템의 목표와 요소들, 절차와 테크닉들을 타자의 지배가 아닌 자기의 지배로 방향전환하여 반체제적인 통치를 실천하는 걸 뜻한다. 카톨릭의 사목권력에 대항하여 금욕주의와 공동체, 신비주의, 성서 회귀, 종말론에서 발생한 대항통치가 역사적인 예이다.

통치성의 역사와 국가

<안전, 영토, 인구>란 제목으로 서구 근대국가가 통치권력의 결집체로 등장하게 된 과정을 통치성의 역사 속에서 검토한지 5개월 후 1978년 8월과 11월에 푸코는 이란 혁명의 현장으로 뛰어든다. 이탈리아 일간지 <일 코리에레 델라 세라> 편집부장의 권유로 이란 사태의 르포르타주를 집필하기 위해서이다. 푸코는 그것을 ‘이념의 르포르타주’라 불렀다. 책 속의 이념이 아니라 봉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하는 이념의 현장을 기록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 이념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통치이념이다. 그것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샤의 총칼에 대항한 이란 민중들을 보면서 푸코는 서구 근대인들이 백안시한 종교적 ‘영성’의 통치성과 정치성을 주목했다. 푸코가 만난 이슬람 지도자 중 대표적인 인물이 샤리아트 마다리(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을 페르시아어로 옮긴 사회학 교수)인데 그는 성직자(호메이니)가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데 반대했다. 시아파 지도자들은 메시아(숨은 이맘)가 돌아올 때까지는 권력이 불순하다고 여겼으므로 국가를 장악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들의 학교, 사회활동, 재원을 국가의 침해로부터 보호하고 자기 스스로의 통치영역을 최대한 확장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푸코는 이런 알리 샤리아티의 행동과 교육을 열렬히 찬양했는데 샤리아티는 대학에서 추방된 뒤 테헤란 북쪽의 종교연구소에서 ‘정치적 영성’에 관한 교육을 통해 이슬람-혁명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통치성의 역사에서 국가의 통치이성은 서구에서 18세기 말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겨우 200년 동안 지속했을 뿐이다. 그 이전의 통치이성은 주로 종교와 철학에서 나왔다. <안전,인구,영토> 마지막 강의를 <말과 사물>의 마지막 문장으로 번역한다면 ‘18세기 말에 그랬던 것처럼 어떤 사건이 그 배치를 무너뜨리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통치국가의 얼굴이 마치 해변의 모래사장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씻기듯 이내 지워지게 되리라고 장담할 수 있다’가 될 듯하다. 이를 위해 푸코는 근대국가의 통치성과는 다른 통치성을 찾아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대의 종교집단과 철학집단을 뒤진다. 푸코가 이란 봉기의 힘이 된 이슬람에 주목한 것도 근대 국가통치의 대항통치로서 이슬람의 통치이성에서 오래된 미래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슬람 혁명이 호메이니의 철권통치로 완결되면서 푸코는 한치 앞도 못보고 이슬람에 부화뇌동한 지식인으로 호된 비난을 받는다. 이에 푸코는 <르몽드>지 1979년 5월 11일에 게재된 ‘봉기는 무용한가?’에서 역사발전의 필연성이란 관점에서 봉기의 진실을 재단하는 전략가의 모럴이 아니라 역사의 밑에서 역사를 단절시키는 힘을 관찰하는 지식인의 모럴을 제기한다. 여기에는 80년대부터 푸코의 사유 중심에 들어온 ‘주체성’의 개념과 ‘진실-말하기’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타자의 통치와 자기의 통치

역사의 밑에서 역사를 단절시키는 힘의 분출, 그것이 봉기의 본질이며 이런 반시대적 힘의 봉기에 의해서만 주체(위인이 아닌 아무나의 주체)는 역사에 도입되고 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80년대부터 논의된 푸코의 윤리적 주체 형성의 테크놀로지, ‘자기에의 배려’가 한갓 개인적인 도덕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체의 해석학>과 <성의 역사> 2,3권, <자기와 타자의 통치>에서 세심하게 탐색된 ‘자기-배려’의 역사는 <안전,인구,영토>에서 시작된 통치성의 역사를 고대로까지 확대하여 구체화한 결과이다. 기독교의 사목적 통치와 근대 통치국가로 수렴된 서구 통치성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 푸코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적 통치기술과 헬레니즘 시대와 초기 로마의 철학적 통치술이 타자를 지배하는 통치술과는 다른 자기-통치의 전략과 절차, 기술의 역사가 있음을 추적한다. 푸코는 고대의 이 자기-통치(배려)의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기독교의 사목적 통치성의 배치로 변환되었는지 고찰하는 한편, 기독교와 근대국가의 통치성 안에서 어떤 대항-통치, 어떤 자기-통치의 역사와 주체가 출현해 왔는지 고찰한다. 이처럼 타자-통치술로서의 정치학과 자기-통치술로서의 윤리학은 목적(질서와 행복)과 적용 대상(개인과 집단)으로 구분되는 상이한 영역이 아니라, 동일한 통치성 내의 대립된 힘의 방향으로만 구분된다. 즉 자기-배려의 통치술은 언제든 지배와 복종의 통치술로 변질될 수 있으며, 지배의 통치성 안에는 그로부터 이탈하는 대항통치의 실천과 주체가 언제든 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구분의 진실은 어떻게 획득될까? 이란의 봉기에서 이슬람 통치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은 새로운 지배권력에의 예속으로 수렴될까 아니면 근대적 통치로부터의 해방으로 이어질까? 그 봉기의 진실은 무엇일까? <봉기는 무용한가?>에서 푸코는 그 진실은 혁명을 관조하는 자의 머리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봉기에 참여한 자들의 열광과 힘의 방향 안에, 그들 안에서 일어나는 실존의 변형 안에 있다고 말한다. 80년대 이후 푸코가 통치기술에서 진실-말하기(parrsia)가 지닌 중요성과 그 역사를 추적하면서 밝히려고 한 것도 이것이다. 진실은 모름지기 중립적이고 전문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의 말 속에 있다는 근대인의 생각이 얼마나 예속적인 태도인지, 타자의 통치에 복종시키는 진실이 아니라 타자의 통치에서 이탈하여 자기-통치의 실천에 내속하는 진실-말하기의 역사가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항구적으로 도래할 거라고 푸코는 말한다.

좌파에게는 다른 식의 통치술이 있는가

푸코가 권력분석 대신 통치성 연구에 집중하게 된 또 다른 계기는 좌파세력과 관련해서이다. 70년대 초반 마오주의자와의 ‘인민재판’에 관한 논쟁에서 푸코는 ‘재판’이라는 진실검증의 형식, 즉 제3의 중립적 심급에 의한 진실 판정이라는 부르주아적 사법-통치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난 좌파에 대해 강력히 문제제기했다. 이후 푸코는 끊임없이 사회주의자에게 과연 통치에 관한 문제계가 있는가 아니면 국가에 관한 문제계만 있는가? 라고 물었다. 푸코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게 아니라 국가적 통치, 근대적 통치기술들로부터 이탈하는 대항통치를 조직하는 것이다. 81년 5월, ‘좌익의 민중’이 자신들의 후보(미테랑)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푸코는 그래도 약간의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81년 12월 13일, 폴란드의 야루젤스키 장군이 몇달 동안의 소요와 ‘연대노조’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프랑스의 신생 사회주의 정부는 그건 폴란드의 내정문제라며 사회주의적 인터내셔널리즘을 배신했다. 이에 푸코는 폴란드의 쿠데타와 프랑스 정부의 방조에 항의하는 집회를 조직했다. 형제 당에 대한 내정 불간섭, 신생 사회주의 정부를 곤경에 빠뜨릴 수 없다는 진영론,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현실추수는 푸코가 보기에 지배-피지배 구도에 갇혀 부르주아적 통치성에 고스란히 복종하는 태도에 불과하다.

정권이 교체된다고 지배-피지배 관계가 바뀌는 것도 아니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통치 메커니즘이 저절로 바뀌는 건 아니다. 사회주의에 적합한 통치성이 존재할까? 어떤 통치성이 엄밀하게 사회주의적일 수 있을까? 푸코에 따르면 사회주의적 통치가 있다면 그것은 사회주의라는 정치 이념으로부터 직접 연역될 수 없다. 그것은 발명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돌보고 자신의 영혼을 지도하고 자신의 일상을 조직하고 자신의 능력을 훈육하고 자신의 쾌락을 관리하고 자신의 진실을 체화하는 삶의 제 통치술들을 사유하고 실천하는 단위는 무엇일까? 국가? 시민사회? 가족? 개인? 1983년 늦여름, 푸코는 ‘다른 식으로 통치하기’라는 주제에 골몰했다. 프랑스에서의 좌익권력이 연달아 실패한 이유를 분석하면서 사회당에 부족한 것은 바로 ‘통치기술’이라고 판단했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와 단절하는 대항통치술을 발명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좌파 정당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사명이다.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권교체와 야권연대에 올인하는 한국의 진보 정당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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