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가 특집

진실에 대한 용기: 철인왕과 거지왕

- 고병권(수유너머R)

1. 파레지아: 진실을 말하는 용기

푸코가 1982년에서 84년까지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에서 한 강의들, 다시 말해 그의 생애 마지막 강의들은 ‘파레지아(parrhēsia)’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고 있다. 그리스어 ‘파레지아’는 ‘진실을 말하기(telling the truth)’ 정도로 옮길 수 있는 말이다. 여기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참[진리, 정답]’을 말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실에 대한 단순한 믿음을 이르는 말은 아니다. 문법학자나 기하학자가 참이라고 믿는 것을 말하고 가르칠 수는 있지만 그것은 ‘파레지아’가 아니다. 파레지아에서 진실을 말하는 이는 자신이 말한 것에 결박된다. 이는 ‘살아온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살아가라’는 고대의 잠언을 떠올리게 한다. 파레지아란 자신이 살아오면서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 또 앞으로 그에 따라 살아가게 될 그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푸코는 여기에 ‘용기’라는 항목을 추가한다. 즉 진실을 말하지만 그것이 어떤 위험을 감수하는 것일 때의 행동을 파레지아라고 부른다. 자신이 진실을 말함으로써 그것을 듣는 상대방과의 관계가 위험에 처할 수 있음에도 그것을 과감하게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또한 파레지아이다. 단지 참인 사실을 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파레지아란 요컨대 자신이 진실로 믿는 것, 자신의 행동,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규제할 그 진실을 말하는 것, 그것도 자신이 맺고 있는 어떤 관계의 해체를 각오하고서 그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파레지아를 발휘하는 이는, 진실을 말함으로써 결국 그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게 된다. 파레지아란 진실을 말하면서, 진실을 말하는 이로써 자기 자신을 제시하는 것이다. 말년의 푸코는 주체가 진실한 자로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이런 구조, 앎(진실)과 주체가 맺는 이런 구조의 역사성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 연구를 단순한 인식론적 구조(epistemological structure)의 연구와 대비해서, (넓은 의미에서는 인식론의 범주에 묶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단순히 참된 인식의 여부와 그 조건을 물었던 통상적 인식론과 구분하여) ‘alethurgy’-‘진실론’으로 옮길 수 있을까?-이라고 불렀다.

푸코는 이 문제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들에서 끌어낸다. <주체의 해석학>, <자기와 타인에 대한 거번먼트>, <진실에 대한 용기>(이 책은 ‘자기와 타인에 대한 거번먼트 II권’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등이 모두 그렇다. 그러나 푸코의 문제설정은 고대적이면서 매우 현재적이고, 철학적인 동시에 윤리적이고, 정치적이다. 나는 푸코가 <자기와 타인에 대한 거번먼트>라는 강의를 칸트에서 시작하는 게 매우 흥미로웠다. 이는 아카데미(대학강단)의 철학이 오래 전에 잃어버린 파레지아의 전통, 즉 삶의 실재와 해방에 대한 관심이 근대 사회에서 어떻게 다시 나타났는지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푸코에 따르면 칸트는 세 비판서들, 특히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참된 인식이 가능한 조건’을 연구하는 근대 철학의 전통을 기초지었고, 이 전통은 오늘날 영미의 분석철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칸트는 또한 다른 전통을 철학에 다시 들여놓았다. 프랑스 혁명 이후, 그가 계몽과 혁명에 대해 물었던 저작들, 가령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나 <학부들의 투쟁> 등에서는 전혀 다른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 저작들은 우리의 경험이 이루어지는 현재적 실재, 우리 자신의 존재론에 대한 물음을 다루고 있다. 내가 속해 있고, 내가 딛고 서 있고, 내 경험이 이루어지는 형식 그 자체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을까. 푸코는 그것을 “자신의 현재적 실재에 대한 수직적 관계”라고도 불렀다.

잘 알려진 것처럼 칸트는 ‘계몽’의 비밀을 계산가능성이나 효율성이 아닌 ‘용기’에서 찾았다. 계산가능성의 증대, 효율적인 일처리는 이성의 사적 이용일 뿐이다. 이는 마치 기계 부품처럼 움직이는 것과 같다. 칸트가 보기에 계몽은 이런 게 아니었다. 계몽의 비밀은 이성의 사적인 사용이 아니라 공적(public)인 사용에 있다. 그것은 마치 학자처럼 공중(public)을 향해서 용기를 내 발언하는 것이다. 가령 교황의 부당한 지시를 받은 성직자는 이성의 사적 사용을 통해 효율적으로 그 지시를 이행할 수도 있지만,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해 그 부당성을 공중 앞에서 제기할 수 있고 해야 한다. 그것이 계몽의 정신이다. 그래서 칸트가 내세운 계몽의 표어는 ‘감히 알려고 하라(Aude Sapere)’였다. <학부들의 투쟁>에서도 이런 정신은 확인된다. 다른 전문학부와 달리 오늘날 ‘교양학부’에 해당하는 ‘철학부’는 진리와 관계하는 한에서 자신을 무조건적으로(자격이나 조건을 제한을 두지 않고) 개방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푸코가 말한 ‘파레지아’는 바로 이 ‘감히 알려하고’ ‘감히 진실을 말하는’ 계몽의 정신 속에 들어 있다.

2. 파레지아와 민주주의 -페리클레스(BC 5세기-4세기 말)

사실 푸코에게 ‘주체와 진리(진실)의 관계’는 그다지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푸코는 ‘주체에 관한 진리’(진리담론)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깊은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진실’의 고백을 듣는 ‘사목권력’에 대해서도 연구를 한 바 있다. 그런데 그는 주체가 자신에 대해 고백하거나 맹세하는 실천들을 추적하면서, 기독교에서와는 아주 다른 ‘진실 말하기’가 고대 사회에 존재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고 했다. 가령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 그것은 단지 인식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돌보는 문제이기도 했다. 자신에 관한 진실을 말하는 문제, “사람은 자신에 대해 진실해야 한다”는 원리는 고대의 여러 텍스트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자기 실천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파레지아’ 개념의 기원이—혹은 최소한 중요한 기원 중의 하나가— 정치 영역에 있었다는 점이다. 푸코는 <진실에 대한 용기>의 첫 강연에서 이전 강연을 요약하면서 ‘파레지아’ 개념이 근본적으로 정치적 개념이며, 정치적 실천과 민주주의라는 문제설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즉 정치적 실천, 무엇보다 ‘민주주의’라는 문제설정에서 파레지아 개념은 시작되었고 이후 개인의 윤리, 도덕적 주체의 형성 쪽으로 전개되어 갔다는 것이다. 푸코는 바로 여기에 ‘자기와 타인의 통치’, 다시 말해 ‘자신과 타자에 대한 거번먼트’라는 관점에서 ‘주체의 진실 말하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민주주의와 파레지아 사이에는 어떤 순환성이 존재한다. 파레지아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토대이지만 역으로 파레지아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 사회는 어떤 위험(권력 없는 자들의 증오, 지식 많은 자들의 조롱, 부유한 자들의 매수, 경쟁자의 시기 따위)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 그런 역량을 갖춘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탁월함에 기초해서 타인들에게 어떤 탁월함을 행사하려고 경쟁한다. 이것이 고대 아테네에 존재했던 아곤(Agon)의 구조다. 이런 고대 민주주의의 구조는 한편으로 이 장에 참여할 시민의 보편적 권리를 규정하는 헌정 내지 정체(politeia)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파레지아를 행할 역량 내지 능력의 행사와 관련된다. 그것은 법적 권리 보장의 문제라기보다 정치적 인간 그 자신의 역량과 관계되고, 그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계이며, 자신이 윤리적 지휘(conduct) 역량과 연관된 것이다. 이 점에서 푸코는 민주주의를 ‘폴리테이아’이면서 또한 (그리고 근본적으로) ‘뒤나스테이아(dunasteia)’라고 부른다.

기원전 5세기, 페리클레스 치세 때의 그리스가 한 예이다. 푸코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것은 전제군주나 폭군과는 다른 방식, 즉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그것을 행사했다. 그는 중요한 정치적 제안을 하면서 그 제안이 무엇보다 그 자신의 것임을, 다시 말해 자신이 진심으로 그것을 믿고 있으며, 바로 자신의 삶과 동일시할 수 있는 그런 것임을 주장했다. 가령 그가 한 주장은 이런 식이었다. <나는 진실을 말하며, 당신들이 원한다면 그 진실을 함께 하자. 그러나 그 진실을 함께 한다면 당신들은 그 결과에 대해서도 나와 똑같이 떠맡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페리클레스의 것이었다고 발뺌할 수 없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요컨대 용기를 가지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탁월한 이들의 경쟁(특이성들의 경쟁). 그것이 민주주의였다.

3. 철인왕과 거지왕 -플라톤과 디오게네스(BC 4세기)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퇴락한다. 푸코의 <자기와 타인에 대한 거번먼트>의 전반부가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문헌들, 특히 ‘페리클레스적 계기’에 많이 할애되었다면 후반부는 ‘소크라테스-플라톤적 계기’에 집중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의 퇴락과 함께 정치적 파레지아가 철학적 파레지아로 변해가는 국면이다. 이는 물론 파레지아의 문제가 정치 영역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철학 영역에만 한정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기원전 4세기로 넘어오면서 아테네 민주주의가 쇠퇴했고, 파레지아는 점차 철학적 실천 영역으로 그 강조점이 옮겨졌다는 것이다(어찌 보면 철학적 실천이 정치적 의미도 갖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플라톤의 ‘철인왕’의 경우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말하는 것은 이제 중요한 철학적 실천이 되었다.

아마도 이런 변화의 상징적 사건은 민주정체 아래서 소크라테스가 처형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아곤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고 아테네는 혁명과 반혁명이 교체되고 있었다. 40대 중년이 되어 나라 일에 관심을 가졌던 플라톤은 기대를 건 정권(‘30인정권’)이 피비린 내나는 폭력을 휘두르고 사악한 횡포를 부리는 것을 보았고, 나중에는 다시 그것을 뒤집은 민주파의 보복을 보았고, 무엇보다도 과거 민주파의 도피를 도왔던 자기 스승 소크라테스가 민주파에 의해 처형되는 장면도 보았다. 아테네의 풍속과 제도는 황폐해졌고 오직 당파들의 이해에 따른 보복만 오가는 현실, 누구나 진실인 양 말을 떠들어대지만 지지를 얻기 위해 아첨하거나 매수하는 말들 뿐이었다. 나쁜 파레지아 혹은 나쁜 민주주의가 나타난 것이다(혹은 파레지아와 민주주의의 죽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플라톤이 이때 떠올린 생각이 ‘철학하는 왕’이었다. 강력한 권력을 가졌지만 또한 정의로운 사람이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이 공허한 폭력 사태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러한 결심은 도시 체제가 몰락하고 큰 국가, 즉 제국이 등장하게 되는 역사적 상황을 예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는 당시 새롭게 제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던 시라쿠사의 왕 디오니시우스 1세에게 기대를 걸었다. 궁정으로 간 철학자. 철학자의 임무는 왕이 자신을 돌보도록, 그리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여러 도시들의 여러 목소리(phonē)들을 조화롭게 하나로 모을 수 있도록(심포니, symphony), 파레지아를 발휘하여 왕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시라쿠사를 세 차례나 방문했지만 플라톤의 ‘철인왕’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과정에서 플라톤이 ‘철학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의 파레지아가 어떻게 발휘되었는지를 보는 것이다. 첫 방문에서 낙담한 플라톤에게 왕의 처남이자 플라톤 철학에 큰 공감을 표하던 디온(Dion)이 ‘때가 왔다’며 초대했을 때, 그는 그 초대를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디온이 자신에게 “결국 당신은 철학을 말(로고스, logos)로만 하는 사람이고 행동(에르곤, ergon)에 나서지는 않는 것 아니냐”고 물을까를 염려했다고. 플라톤은 철학의 실재가 ‘로고스’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로고스를 행하고 그에 따라 사는 데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자란 철학을 자기 삶을 통해 입증해야 하는 자라는 것이다.

디오니시우스 1세에 이어 왕이 된 디오니시우스 2세 역시 “철학에 귀동냥한 게 많았고”, 심지어 그것으로 철학책을 쓰기도 했지만, 플라톤은 그를 결코 철인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플라톤은 그에게 목숨을 걸고서 알려주려고 했다. 철학은 말이 아닌 행동이고 무엇보다 일상을 가꾸는 실천이라는 것을. 철학자란 자기 삶으로 자기 철학을 입증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노년의 플라톤(<일곱번째 편지>)은 이 점을 정말 힘주어 강조했다(나는 푸코 역시 플라톤의 이 점을 매우 강조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철인왕’이란 철학담론을 정치 권력을 통해 구현하는 사람이 아니다. 푸코가 강조하듯이, ‘철인왕’이란 ‘철학을 하는 사람’과 ‘힘(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일치일 뿐이다. 그리고 ‘철학을 한다’는 것은 삶을 가꾸는 법을 아는 것이다. 이 ‘앎’이란 책 몇 권 읽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플라톤에 따르면, “오랜 사귐과 공동생활을 통해”,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혼 안에서 생겨나 스스로를 길러내는 것”이다. 사람들과 부대끼면서[tribe] 거기서 생겨나는 불꽃이 자기 몸에서 짜낸 기름을 태우며 타는 것이다.

철학의 실재가 삶을 가꾸는 데 있다는 점에서는 ‘거지왕’ 디오게네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푸코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대한 긴 분석을 마치고 디오게네스를 비롯한 ‘견유주의’의 파레지아로 넘어간다. <진실에 대한 용기> 후반부가 견유주의에 대한 설명이다. 디오게네스는 철학적 담론과 철학적 실천에 대한 생각에서 플라톤과 통하는 면이 있기는 했지만, 그 방법은 완전히 달랐다. 궁정으로 간 플라톤과 달리 디오게네스는 길에서 살았다. 그의 실천은 철학적 독트린이나 현실의 군주 권력과 철저히 외면적 관계를 맺었다.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과의 일화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디오니시우스왕에 대한 태도에서도 그랬다. 견유주의자들(the Cynics)은 플라톤과 디오니시우스 왕의 이야기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고 이런 일화를 만들었다. “길에서 직접 샐러드를 씻는 디오게네스에게 플라톤이 말했다. <네가 디오니시우스 왕에게 조금만 공손했다면 손수 샐러드를 씨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답했다. <네가 네 샐러드를 직접 씻는 법을 배우면 디오니시우스 왕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푸코가 묘사하는 디오게네스는 어쩌면 철학의 실재성에 도달하기 위해 철학에서 가장 빨리, 가장 멀리 달아난 철학자인지도 모르겠다(아마도 푸코가 견유주의에 대해 “항상 철학의 안과 바깥에 동시에 있었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견유주의자들은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하나는 긴 길로서, 로고스를 통해서, 담론을 통해서, 독트린을 배워서 도달하는 길이다. 다른 하나의 길은 짧은 길로, 매우 힘든 길이지만, 곧바로 장애물을 돌파에서 직선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것은 말이 필요 없는, 어찌 보면, 조용한 길이다. 그것은 곧바로 실천하는 삶이다. 그래서 디오게네스는 플라톤처럼 어떤 독트린을 만들지 않았고(그래서 플라톤처럼 정전이나 학파를 형성하지 않았다), 지배적 삶과는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삶의 유형을 곧바로 찾아 나설 것을 요구했다.

견유주의자들의 기이한 행동과 자발적 가난, 조롱, 역설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이 ‘다른 곳(elsewhere, ailleurs)’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인류의 ‘개’, 인류라는 본대에 앞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다른 삶을 찾아나서는 ‘첨병’의 역할을 자임했다. 그것이 그들의 파레지아였다. 그들은 참된 삶은 다른 곳, 다른 길에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보여주려고 했다. 그것이 다른 세계(other world)가 아니라 다른 삶(other life), 삶의 다른 형식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세계의 모든 가치 전도, 맑스가 ‘물구나무섰다’고 했고 니체가 ‘모든 가치의 전도’라고 불렀던 어떤 전도를 그들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시도했던 셈이다. 이 때문에 디오게네스는 ‘화폐위조범’으로 불렸다. 삶의 가치를 전도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적 군주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주권자였다. 그들은 자기 삶과 운명의 주권자였다. 그들은 삶의 진실을 보여주고자 했는데, 그 진실이란 그것을 알게 되면 어떤 두려움이나 슬픔, 어떤 결핍감도 느끼지 않는 삶의 원리를 깨닫는 것이고, 오히려 삶에서 느끼는 고통이나 가난마저 자신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내 삶을 가꾸는 일, 즉 나 자신에 대한 거번먼트이자, 내가 속한 인류의 운명을 가꾸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하고 세속의 권력에 거리를 두었던, 그러나 또한 자가 삶의 주인이었고 자기가 속한 인류의 거번먼트에 관심을 가진 거지왕의 모습이었다(푸코는 또한 이것이 근대에 예술과 혁명 속에서 어떻게 되살아났는지, 철학 바깥, 다시 말해 예술과 정치 속에서 어떻게 다시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언급했다).

파레지아에 대한 푸코의 연구는 그 자신의 말을 빌자면 “전혀 예기치 않은” 물음의 발견으로 시작되었고, 계속 진행 중에 있었지만(푸코는 마지막 날 강연에서 “내년에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삶의 기술, 삶을 가꾸는 기술들을 역사적으로 추적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생애가 돌연 중단됨으로써 끝나고 말았다. 생애의 끝에서 그가 새로 시작하려 했던 연구는 내게 철학(철학적인 삶)과 정치(해방, 혁명, 코뮨)에 관한 많은 영감들을 떠오르게 했다. 그러나 그는 어떻든 말을 하려하다 멈추고는 강연을 끝내버렸다. “이런, 너무 늦은 시간이군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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