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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배우 시리즈 2 – 타케우치 유코

- AA

보통 사람들은 영화를 말할 때 감독을 먼저 언급한다. 하지만 TV는 연기자가 중심이다. 요즘은 드라마 분야에도 스타 PD나 작가가 생기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TV 영상물에 관심이 있는 일부고 김수현 작가 정도 되지 않는 이상은 어떠한 드라마를 언급할 때는 배우가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국내도 그럴 진데 해외 드라마는 스크롤에 글자로 다가오는 감독이나 작가의 이름보다는 얼굴을 보여주는 배우가 먼저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TV드라마 속에서 꾸준하게 자신의 캐릭터를 지키고 있는 배우 4인을 차례로 소개하기로 한다.

시청자를 화나게 하지 않는 예쁜 여배우 – 타케우치 유코

얼마 전 TV채널을 돌리다가 개콘 ‘꺾기도’의 사부 김준호보다 더 나를 공황상태에 빠뜨린 키스씬을 보았다. 태어나서 그토록 몰입 안 되는 키스씬을 보는 건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나이 차이 때문에 더 그런가? 아니다. 몇 년 전 국내 드라마 <봄날>에서 고현정과 조인성의 투샷을 떠올려 보면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오로지 연기력의 부재 때문이다. 세상엔 예쁜 사람이 많지 않은데 불행하게도 그 중 연기 못하는 배우들은 너무 많다. 얼굴 예쁜 정도의 반만큼이라도 연기를 해주면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 판이다. 그래서 떠올렸다. ‘저 배우는 예쁜 얼굴로 드라마를 망치는구나.’ 하고 시청자를 화나게 하지 않는 여배우, 타케우치 유코.

타케우치 유코는 우리 나이로 올해 33세로 국내에서는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로 다소 인지도가 있는 편이다. 로맨스 드라마에 잘 어울려 한때 ‘일본의 맥 라이언’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던 그녀의 사생활은 종종 스포츠신문을 장식하곤 했지만 얼굴’만’ 예쁘고 연기를 못 한다고 전국구 규모로 욕을 먹은 일은 없었다. 대부분 예쁘고 잘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발탁하는 것은 미관상(!)의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시청자들의 대리만족을 위해서가 아닌가. 그래서 타케우치 유코는 시청자와 제작자 양쪽에서 사랑받는, 예쁜 여배우다.

96년에 목요괴담 시리즈의 단역으로 데뷔하여 예쁜 얼굴로 영화와 드라마를 꾸준히 오고가던 그녀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1년이다. 인기그룹 스맙의 리더 나카이 마사히로와 짝을 이루어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남자 주인공을 따뜻하게 감싸는 히로인을 연기했던 TBS 드라마 <하얀 그림자>와 인기 절정의 톱스타와 비밀 결혼한 귀여운 여인으로 나왔던 후지TV 드라마 <데릴사위>가 2001년 상반기에 차례차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귀엽고 건강한 캐릭터와 청순가련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안정적으로 연기한 타케우치 유코는 드라마의 히트와 함께 ‘사랑스러운 여배우’ 리스트에 오를 기반을 마련한다.

기세를 이어 2002년, 타케우치 유코는 처음으로 게츠구(후지 TV의 월요 9시 드라마. 대대로 이 편성시간의 드라마에 히트작이 많아 배우에게는 명실상부한 스타임을 인정받는 기회이기도 하다.) 에 입성한다. 이 작품은 양식점〈키친 마카로니>를 배경으로 하는 홈드라마로 평온한 삶을 살던 나베시마가(家)에 장남 켄이치로가 약혼자라며 타케우치 유코가 연기하는 무기타 나츠미를 데려오며 시작된다. <키친 마카로니>는 장남 외의 3형제가 아버지를 도와 꾸려나가고 있었는데 켄이치로가 나츠미와 함께 와서는 나츠미만 남겨놓고 가게의 돈을 몽땅 싸들고 바로 사라진다. 사실 나츠미는 켄이치로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있어 하루의 가장 큰 행복인 점심시간에 먹고 싶은 음식을, 가보고 싶은 가게에서 맛보던 중 다짜고짜 켄이치로에게 끌려 나와 엉뚱한 제안을 받은 것이다. 2년 전 가족들과 싸우고 나온 뒤 인연을 끊었으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돌아가려 하는데 그냥 갈 순 없으니 약혼자라도 데리고 가야한다고 설명하는 켄이치로를 무시하려 했던 나츠미는 ‘맛있는 오므라이스’를 먹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는 셈치고 켄이치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대책 없는 집안의 말썽꾸러기 장남 켄이치로가 사라진 뒤 가족들은 식당 문을 닫으려 하지만 나츠미는 <키친 마카로니>의 오므라이스를 맛 본 뒤, 이런 식당을 닫을 수 없다며 무작정 그 집에 눌러 앉으면서 차남, 3남, 막내 모두와 미묘한 러브 라인이 형성된다.

월드컵과 겹친 방송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균 시청률 20%에 가까운 인기를 받은 이 드라마의 볼거리는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오므라이스를 비롯해 햄버거스테이크, 크로켓, 돈가스 등 우리에게 익숙한 양식이 맛깔나게 매 회 등장하는 것이 그 첫 번째. 두 번째는 지금은 확실한 연기자로 인정받은 츠마부키 사토시, 야마시타 토모히사, 야마다 타카유키, 에이타 등이 대거 출연하여 10년 전의 전도유망한 햇병아리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타케우치 유코, 그 자체다. 해맑은 미소의 여인 무기타 나츠미를 연기한 타케우치 유코는 이 드라마의 중심이자 이유인 듯 빛을 발한다. 게츠구 주연은 물론 원톱의 주연 역시 처음이었지만 이 드라마가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최적의 캐스팅이었음을 입증한 것은 그녀의 미소였다. 보통 로맨틱 코미디를 보다 ‘왜 저런 민폐 여주인공에게 모두 반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는데 이 드라마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그런 의문을 품는 것 자체가 불경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그녀는 반짝거린다. 필자 같이 느낀 사람이 많았는지 드라마에는 그녀의 웃는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잡힌 장면이 하이라이트처럼 매 회 등장했다. 누구나 웃는 얼굴은 예쁘다지만 예쁜 사람이 예쁘게 웃으면 모든 어둠을 불식시킬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그녀의 미소는 이후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런치의 여왕>으로 톱여배우의 반열에 오른 다케우치 유코는 이후 영화 <환생>과 앞서 소개한 드라마 <웃는 얼굴의 법칙> 등의 작품을 거치며 2004년 후지 TV 드라마 <프라이드>에 도달한다. 시청률의 남자, 일본 최고의 스타 기무라 타쿠야가 2년만에 게츠구의 로맨스 드라마로 복귀한다는 것과 일본 드라마계의 유명 작가 노지마 신지가 각본을 맡았다는 점 등으로 방송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타케우치 유코가 연기한 무라세 아키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회사 친구들과 함께 회사가 소유한 아이스하키 실업팀의 경기를 보러 갔다가 기무라 타쿠야가 연기하는 아이스하키 선수 사토나카 하루와 만나게 된다. 하루는 잘 나가는 인기남이지만 한 번도 여성을 사랑한 적은 없다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잘 생겼는데 마초인 스포츠맨’이고 아키는 성공해서 돌아오면 결혼하자는 말만 남기고 떠나서 연락도 없는 남친을 2년째 기다리고 있는 ‘예쁜데 구식인 순종여성’이다. 하루와 아키는 아키의 남자 친구가 돌아올 때까지 계약 연애를 하기로 하지만 모든 러브 스토리가 그렇듯 둘은 결국 진짜 사랑에 빠진다. 하루가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린 엄마로 인해 품고 있던 ‘여성에 대한 불신’을 아키가 종식시켜주고, 아키는 전 남친을 무작정 기다리는 자신에 대해 믿음이 없었지만 하루를 만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어 두 사람이 사랑을 확인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아키의 전 남자친구가 미국에서 무슨 대단한 상을 받고 돌아와 결혼하자며 찾아오는데… 뭐 이런 줄거리다. 드라마 자체는 다소 오글거리고, 각본을 쓴 노지마 신지의 다소 뒤틀린 ‘여성형’으로 인해 캐릭터들이 전형적인 전통적 남녀상에 길들여진 편견에 절어 있으므로 편하게 볼 수만은 없다. (필자는 볼 때마다 이 드라마가 본인의 길티 플레져임을 확인한다.) 하지만 굳이 이 드라마를 소개하는 이유는, 필자가 본 일본 드라마 중 가장 ‘케미’가 폭발하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로맨스 드라마에서 남녀 배우가 붙는 투샷을 결정짓는 중요한 것이 흔히 말하는 ‘케미’, 케미스트리다. 시청자가 화면 속 주인공들에게 몰입하게 되면서 아드레날린의 분비로 인해 화르르 몸이 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강렬한 신체적 반응이 일어나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키게 하는 바로 그것 말이다. 로맨스 드라마에서 주연 배우들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케미 발산’은 흔하게 발견할 수 있지만 대부분 남성 배우 쪽에 더 강하게 집중된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공중파의 러브씬에서 발화점이 되거나 리드를 하는 역할은 남자 배우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기무라 타쿠야라는 배우는 십수년간 일본 여성들의 ‘안기고 싶은 남자’ 넘버 원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쉽게 그러한 화학 반응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고 이 드라마에서도 그러한 역할을 잘 수행했다. 그런데 그러한 기무라 타쿠야와 짝을 이룬 여배우들은 이전까지 대부분 강한 캐릭터였다. 기무라 타쿠야의 ‘전통적 남성성’에 대적할 만한 강하고 특이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여야만 러브씬에서 기무라 타쿠야에게 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라세 아키를 연기한 타케우치 유코는 러브씬의 장면에서 ‘전통적 여성성’으로 정면승부를 걸었다. 표정, 손짓, 눈빛, 목소리, 말투 등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표현한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은 마치 ‘로맨스 드라마의 훌륭한 모범답안’ 같은 모습이었다. 해맑은 미소를 무기로 톱 여배우가 된 타케우치 유코는 이 드라마로 ‘로맨스 드라마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누릴 만큼 러브씬에 있어서 여느 여배우와 비교 불가한 우위의 위치에 서게 된다.

<프라이드>는 마지막 회 시청률이 약 29%에 달했을 만큼 성공을 거두었고 드라마 방영 후 개봉한 그녀의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역시 많은 관객을 불러 들였다. 하지만 청순가련으로 계속 밀고 나가면 지루해질 텐데 위험하지 않을까 싶었을 때 그녀는 결혼, 그리고 이혼 소송으로 작품 대신 연예 뉴스에 더 많이 출연하는 시기를 겪었다. 시끌벅적했던 이혼의 수순을 끝낸 그녀가 컴백작으로 고른 작품은 네기시 키치타로 감독의 영화 <사이드카의 개>였다.

모든 것이 엄마의 절제와 통제 속에서 진행되던 삶을 살던 초등학생 여자 아이 카오루의 삶에 엄마 아닌 어른 여자가 들어온다. 아빠 같은 남자와는 못 살겠다며 엄마가 집을 나간 후 아빠가 데리고 온 요코라는 여성. 그런데 엄마와는 정반대로 콜라도 마음껏 마시게 하며, 과자도 아무 그릇에나 듬뿍 담아주고, 슈퍼에 함께 가서도 먹고 싶은 것을 고르게 해준다.이 영화에서 타케우치 유코는 카오루에게 정반대의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요코로 등장한다. 요코는 사이드카에 타고 있는 개처럼 그어진 선 안에서 얌전히 지내고 있던 소녀 카오루에게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전거 타기를 가르쳐주며 그녀에게 자유를 누리는 적극적인 삶을 사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동안 유지하던 청순가련 헤어스타일도 촌스러운 80년대의 굵은 펌으로 바꾸고 앉을 때도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등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의 캐릭터를 보여준 타케우치 유코는 이 영화로 그 해 일본 영화계의 시상식 대부분에서 여우주연상을 받는다. 이 영화는 국내에서는 부산 국제 영화제와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이기도 하다.

시끌벅적한 이혼 뒤 성공적인 캐릭터 변신을 완수한 그녀는 그 이후 세상에 나오기 위해 알을 깨기 시작하는 새끼 병아리처럼 다양한 캐릭터에 도전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드라마 <장미 없는 꽃집>에서는 눈이 안 보이는 척 하며 착한 꽃집 부녀를 속이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2010년 방송된 <여름의 사랑은 무지개 색으로 빛난다> 라는 드라마에서는 딸을 혼자 키우다가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미망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요즘 방송중인 드라마 <스트로베리 나이트>에서는 성질이 불같고, 사건 해결에 집착이라 할 만큼 집념을 가지고 있는 형사를 연기하고 있다. 청순가련이나 해맑은 미소와 같은 그녀의 특기를 펼칠 만한 씬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캐릭터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캐릭터든 여배우 연기 못해서 망했다할 만한 작품은 없었다. 그녀의 출연작에 후진 작품도 물론 존재하지만 그녀의 연기로 인해 시청자들이 화를 내며 작품을 외면하는 경우는 없었다는 것은 일견 당연한듯하나 현실적으로 예쁘기만 하고 연기 못하는 배우들이 널려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몹시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파격적이라고 할 만큼의 변신은 아니어도 평면적인 캐릭터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희망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단순하게 명랑하고 쾌활하다거나, 청순가련하다거나 하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일차원적인 미녀가 아니라 어딘가 비밀이 있거나, 무언가 아픔이 있을 것 같은 캐릭터의 무게를 조금씩 자신에게 싣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어찌되었건 그녀는 여전히 예쁘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듯 ‘예쁜 것’만이 장점인 배우로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다.

덧붙여, 물론 일본에도 얼굴만 믿고 발연기하는 배우들은 쌔고 쌨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국내에서 ‘예쁘다’ 라는 형용사와 동급으로 인식되는 여배우가 일본의 한 드라마에 주연으로 진출해서 가뿐히 드라마를 말아 드셨다. 가만히 있어도 예쁜데 굳이 예쁘게 보이려는 노력만 보일 뿐 연기를 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나에게 충격을 준 ‘케미 전무한 키스씬’의 여주인공도 그렇고 대체 꾸준히 드라마며 영화며 출연경력에 족적을 남기고 있음에도 그녀들이 같은 작품 속 신인배우보다 더 도드라지는 발연기를 선보이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 노력을 하지 않아서인가, 습득 능력이 떨어져서인가, 아니면 태생적으로 예쁘게 태어났듯 발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이라도 타고 났단 말인가. 얼굴만 예쁜 남녀배우들이 말아 드신 드라마는 저 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많은 반면 미모의 틀을 깨고 나온 배우는 몇 없다. 그래도 변영주 감독의 새 영화 <화차>의 배우 김민희 같은 보면 희망을 버리진 말아야지 싶다. 누구에게든 과거는 있는 법이다. 그리고 과거와 다른 오늘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가끔 새 길이 열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얼굴 예쁜 배우들이 제발 노력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거든 그 예쁜 얼굴로 CF만 해줬으면 좋겠다. 본인이야 드라마나 영화 망해도 CF 찍어 생계를 이어갈 수 있지만 본인으로 인해 경력에 ‘시망 드라마’ 늘어나 다음 일자리 구하기 힘들어지는 스탭들을 생각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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