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원폭과 원전

- 이케가미 요시히코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로부터 1년이 지났다. 지금 우리는 흩뿌려진 방사성 물질이 우리 몸을 해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방사성 물질이 체내에 축적되는 걸 가장 우려하고 있다.

체내에 축적된 방사성 물질은 α선으로 불리는 방사선을 몹시 한정된 범위에서 지속적으로 방출한다. 그리하여 결국 주위의 세포를 암상태로 만들거나 파괴하여 신체 기능을 서서히 저하시킨다. 그게 어떤 증상으로 나타날지는 몸 안에 들어온 방사성 물질에 따라 달라진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이삼십년이 지나야 뚜렷한 증상이 나타난다. 길고긴 세월 동안 우리는 건강을 걱정하며 살아가야 한다.

방사성 물질로 인해 두고두고 불안에 떨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작년 3월 11일 이후였던 것이다. 작년 가을, 나는 일본의 원전 사고를 설명하러 뉴욕의 여러 곳을 다녔다. 한 곳에서는 다큐멘터리를 상영했다. 그 다큐멘터리는 히로시마 원폭으로 60년이 넘도록 시달려온 환자를 맡은 의사의 증언을 담고 있다. 미국 관객들은 원폭이 투하된 후로도 여러 사람이 살아남았으며, 또한 그들이 원폭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고 수 십 년이 지나고 나서 차례로 죽어갔다는 사실을 가장 놀라워했다. 미국인은 대체로 원폭으로 인한 사망자는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발생한다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원폭은 대량살상무기의 정점을 차지하는 병기로서 순식간에 떼죽음을 부른다. 이게 일반적 인식이다. 그러나 직접피폭당한 사람도 수년 혹은 수십 년을 살아남곤 한다. 나아가 간접 피폭자도 많다. 그들은 원폭 투하 다음날이나 며칠 후에 히로시마 시내로 들어갔다가 잔류한 방사성 물질로부터 방사선을 쐬던가, 혹은 방사성 물질을 체내에 받아들여 내부피폭당해 차츰 쇠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의사들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내부피폭의 메커니즘에 관한 공동의 인식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내부피폭의 메커니즘은 분명하게 인지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환자는 격한 통증을 호소하지만, 왠지 모르게 몸이 나른해지고 기능이 저하되는 환자도 있었다. 그런 증상은 부라부라병(はぶらぶら病)이라 불렸는데, 오랫동안 아니 지금도 원폭의 후유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환자는 그저 게으르다고 핀잔받기 일쑤였다. 원자력은 한순간에 많은 목숨을 거둬가는 병기인 동시에 오랜 시간에 걸쳐 신체기능을 손상시키는 물질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일본인이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지내왔다. 장기에 걸친 방사성 물질의 영향과 내부피폭이라는 용어도 2011년 3월 11일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바로 원전 사태가 우리에게 알려줬다. 일본은 유일하게 원폭이 투하된 나라지만, 이제껏 피해를 애매하게 묻어왔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반성해야 했다.

원전과 원폭은 동전의 양면이다. 원폭 개발 기술을 그대로 민간이용해서 만든 것이 원전이다. 차이는 핵분열을 한순간에 일으킬 것인지, 완만하게 통제할 것인지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원전과 원폭의 논리는 다르고 또한 복잡하다.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는 제2차 세계대전의 논리, 즉 연합국 대 추축국이라는 맥락에서 이뤄졌다. 미국은 추축국 가운데서 아시아 국가를 골랐으며 이는 인종차별적 색채가 농후했다. 아무튼 미국은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고자 원폭을 투하했으며, 2주 후에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일본제국의 붕괴는 아시아의 해방을 가져왔다.

그런데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지 불과 사흘 뒤에 나가사키에도 플루토늄 원폭이 투하되었다. 두 번째 원폭 투하의 논리는 복잡하다.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원폭은 히로시마 투하의 연장선상에 있는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의 냉전을 노린 것이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직후 원폭의 사상적 배경이 극적으로 전환된 것이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실태는 전후에 비밀에 부쳐졌다. 7년이 지나고 나서야 실태가 드러났다. 그런데 거의 동시기인 1954년에 태평양의 비키니 환초에서 행해진 미국의 수폭실험으로 어선에 타고 있던 일본인 어부 수백 명이 피폭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반핵운동이 갑작스럽게 고조되었다. 그러나 반핵운동이 한창이던 그 시기에 ‘평화적 이용’이라는 미명 아래 원전 도입이 결정되었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란 소련이 예상보다 원폭을 빨리 개발하자 미국이 취한 냉전전략이었으며, 아울러 일본에 신에너지를 풍부하게 공급해 일본의 공산화를 막으려는 노림수도 있었다. 일본은 패전과 동시에 파시즘 국가에서 미국의 속국으로 변모했는데, 그 전환축에 바로 원자력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처럼 급격하게 원자력에 힘입어 전환하자 일본에서는 원폭 투하의 이유를 들추기가 어려워졌다. 누구나 미국이 원폭을 투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소리 높여 비판하는 자는 기이할 만큼 적었다. 마치 자연현상처럼 하늘로부터 원폭이 내려왔다는 식으로 묘사되곤 했다. 미국은 원폭을 투하한 주체이자 동시에 원전을 들여온 장본인이지만, 주어가 애매해진 채로 핵의 경험이 구전되었다. 피폭자의 말을 들어보면 너무도 가혹한 경험인지라 조리선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피해자들은 데이터만을 원할 뿐 치료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미국을 향해 분노하지만, 그들의 분노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환경이 일본에는 조성되어 있지 않다. 일순의 죽음 혹은 장기에 걸친 괴로움을 큰 틀에서 이해하는 회로가 마련되지 못한 채 세월이 쌓여왔다.

그건 동시에 히로시마에서 원폭이 투하되었던 논리, 즉 일본제국주의의 책임을 흐지부지하게 만들었으며, 거기에 이어진 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목으로 원전을 도입하게 된 기원도 애매하게 만들었다. 물론 적지 않은 사람이 이 모순을 알아차리고 연구를 벌이고 활동을 이어왔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인식이 되지는 못했다. 또한 정합성을 결여한 역사적 설명은 원폭과 원전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일본은 핵무장국이 아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미국이 막강한 무력에 기반한 외교에 나서자 소비에트, 영국, 프랑스 그리고 중국은 핵개발을 실시하고 핵무장했다.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핵보호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두 차례의 핵이 일본인의 의식 속에서 희미해져갔다. 원폭은 역사적 맥락에서 유리되어 그저 과거의 비참한 사건으로 다뤄졌으며, 원전은 ‘평화적 이용’으로 여겨져 그것이 가동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내왔다.

원전은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건설되었으며, 그 무렵부터 전기 사용이 거의 강제적으로 장려되었다. 또한 1970년대에는 오일쇼크가 일어나 포스트포디즘으로 접어들었는데 이후로 생활은 점차 원자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제1원전의 4기가 멜트다운되었다. 그때 비로소 많은 사람은 원자력의 본질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원자력이 우리의 일상을 얼마나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전기 사용만을 두고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은 60년이 넘도록 시달려온 원폭증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게 결코 과거일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원전은 원폭과 기술적인 의미에서만 이어져있는 게 아니다. 원전과 원폭은 내부피폭도 공유한다. 다행히도 이번 원전사고로 대량의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원폭이 순간적인 대량살상 무기만이 아닌 걸 알고 있다. 원폭으로 실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절멸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원자폭탄하면 절멸을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사람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죽어간다. 이게 원전과 원폭을 함께 꿰뚫는 본질인 것이다.

2011년 가을 무렵부터 이란의 핵의혹을 둘러싸고 이란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란의 핵의혹을 제기한 것은 IAEA다. IAEA는 원전 사고 때도 등장했다. 많은 사람은 IAEA가 자신들과 견해가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처럼 IAEA도 사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본래 IAEA는 ‘평화적 이용’이 되어야 할 원자력의 핵병기 전용을 사찰하는 이른바 핵비확산과 아울러 군축을 임무로 맡았다. 그러나 냉전 이후, 특히 제1차 걸프전쟁을 거치면서 IAEA의 임무는 변질되었다. 냉전의 세력균형 가운데서 활동하던 IAEA는 더블스탠더드를 본질로 하는 미국의 파수꾼으로 변모한 것이다.

1990년대부터 IAEA는 핵비확산을 구실로 내세워 이라크, 북한, 인도, 파키스탄에서 체제전환을 꾀하는 사찰을 빈번히 행했다. 당연히 이스라엘의 핵은 한 차례도 문제삼은 적이 없다. 인도는 한 차례 문제되었지만, 아시아에서 미국의 새로운 파트너를 키워내고자 IAEA는 인도의 핵을 간단히 승인했다. 이러한 나라들은 모두 아시아에 있다.

핵병기를 둘러싼 상황은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꿈쩍하지 않을 것 같았던 원전의 상황도 다름 아닌 일본의 사고로 변화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귀추는 불분명하다.

원전은 위험할 뿐 아니라 우리의 신체와 사고를 속박해왔다. 세계는 이제 그 사실을 깨닫고 있다. 평화적 이용과 그 근저에 놓인 핵병기의 관련성을 파고들지 못하도록 사고가 구속되어 왔다. 풍부한 에너지는 핵병기를 대가로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을 연결하는 열쇠가 내부피폭이다. 그러나 그 관련성을 알아차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병기와 평화적 이용을 모두 문제삼고 폐기하려면 역사와 마주해야 한다. 원폭이 투하된 이유, 원전을 받아들인 역사적 경위를 사고해야 하는 것이다.

원폭과 원전의 관계는 애매해져버려 우리 자신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신체 속에서 뒤얽힌 역사의 논리를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이건 분명히 불행한 경험이다. 하지만 이 불행한 경험을 기회로 삼지 않는다면, 이 경험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희망은 거기에 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