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학교를 다니면서 맺어야 할 인간관계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이번에는 학교에서 맺어야할 인간관계에 대하여도 알아보자. 먼저 선생님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을까. 선생님들은 그냥 인생의 선배이고 공부에 도움 주는 분들이야. 특별히 존경받을 만큼 자기성취를 이룬 분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덜 익거나 서툰 분들도 아니야. 특별한 기대를 가질 것도 없고 특별히 안 이뻐할 것도 없어. 그러나 혹시라도 수업이 감동적이거든 좀 구체적인 말로 감사드리면 틀림없이 기뻐하며 더 잘하려고 노력하실 거다. 옛날에 하버지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여러 반에 펜클럽이 있었단다. 너도 좋아하는 선생님이 계시면 좋아하는 점을 마음껏 표현할 수도 있다. 그건 서로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감정이니까. 그리고 어떤 사랑이든지 표현하면 기쁨이 더욱 커지는 거잖니. 수업 끝나고 아이들이 내미는 음료수 하나가 선생님의 피로를 싹 가시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란다.

정말 맘에 들지 않아서 견딜 수가 없다면 음료수에 쪽지 편지를 붙여서 갖다드려 봐. 물론 네 반 번호와 이름은 분명히 밝혀야 한다. ‘오늘 수업 잘 들었어요. 저는 이렇게 해주시면 더 잘 알아들을 것 같아요. ~반 ~번 문수안’. 딱 한 번만이다. 학생들이 만족하는 수업으로 인정받고 싶지 않은 교사가 어디 있겠니. 아이들이 불만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분이 더 잘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을 너는 이해할 수 있을 거다. 한 번의 요구대로 안 되면 거기까지가 그분의 한계이니 단념해라. 수업에 대한 비판이나 조언은 교사에게 너무 쓴 약이라서 넘기기가 쉽지 않단다.

교사가 된 분들은 학생 때는 범생이었고 공부도 잘해서 칭찬만 받았을 거야. 어쩌면 아이들에게서 그런 학창시절의 자기 모습을 찾으려 할지도 모르지. 어떤 선생님은 자기 수업을 불만스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많은 선생님은 자기가 수업을 잘하는 걸로 착각하고 아이들이 실력이 없어 못 알아듣는다고 아이들을 탓하는 것을 보았단다. 아마도 교사만큼 터무니없는 자존심을 가진 직업인은 많지 않을 거야. 자신이 학생일 때는 얼마나 착했는지를 강조하면서 아이들이 말대꾸하고 자기 손아귀에 쥐어지지 않으면 건방지다고 화를 내신다. 그런 경우라면 대꾸 하지 않는 것이 좋단다. ‘그래요. 선생님 말씀이 옳아요. 전 이제 갈 게요.’

옛날에는 신분이라는 사회적 역할에 따라 정해진 예우가 있었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하여 스승은 임금이나 부모와 같이 귀중한 역할을 함으로 가장 높은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요즘은 그 이름에 값하는 역할을 했을 때 존경심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있어도 어떤 직업적인 역할을 존경하지도 않고 어떤 직업적 역할로 존경을 요구할 수도 없다. 교사라는 직업은 역할을 잘만 한다면 얼마든지 아이들에게 존경이나 사랑받을 수 있는 천직이 아닌가. 그런데 아직도 선생님이라는 직업적인 역할만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근거 없는 자존심을 가진 분들이 계시단다. 이런 터무니없는 자존심이 맘에 안 든다고 괜히 잘못 건드리지 않도록 아주 조심해야 돼. 안 그러면 서로 불편해지니까. 불편해지면 서로가 손해지만 아무래도 사람이 싫어서 수업까지 싫어질 수 있으니 학생이 더 손해지.

홍아야, 이제 마지막으로 좋은 친구 관계를 생각해보자. 요즘은 입학하거나 새 학년이 되어서 짝꿍을 찾지 못한 외톨이들은 무시당하거나 왕따 대상이 되기도 한다더라. 특히 여학생들은 짝꿍과 틀어지면 그 배신감이나 갈등을 주체하지 못한다더라. 그런데 나는 그런 밀착 관계가 맘에 들지 않아. 서로가 사생활을 숨김없이 드러내지 않으면 믿거나 사랑하지 않으므로 거리를 두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 도 싫거니와 둘 사이에 다른 애가 끼어든다고 질투하는 것도 내 방식은 아니야. 서로가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다보니 불편함이 훨씬 많아질 것 같아. 자칫하면 힘(돈이나 교우 관계, 성적이나 말솜씨 또는 육체적인 힘 등의 영향력)이 약한 쪽이 강한 쪽에게 지배되거나 억압당하는 관계일 수도 있지 않을까.

군자의 벗 사귐은 맹물같이 싱겁고 소인의 벗 사귐은 단술같이 달콤하단다. 군자는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귀며 서로의 개성이나 의견을 존중하고 의를 추구하는데 뜻을 모으며 의에서 벗어나면 싫은 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단다. 그러나 소인들은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없애려 하며, 억지로라도 서로의 의견이나 개성을 일치시키려 하며 옳음보다는 이익을 위해 뭉치려 하며 항상 듣기에 좋은 말만 하려한단다. 자, 홍아야, 어느 쪽을 선택할 거니. 청소년기에 서로 다른 이 두 가지 교우관계는 자기완성의 수준에 좌우될 것이고 또 거꾸로 자기완성의 수준을 좌우할 것이다.

네게서 짝꿍이란 말을 지워 버리면 안 될까. 그렇다고 네 반 모든 아이의 짝꿍이 되라는 것도 아니야. 짝꿍을 통해서만 네 존재를 간접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야. 네 반 아이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맘에 없는 짓을 하며 시간과 정념을 낭비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사실 네 엄마는 네가 공허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살게 하지 않으려고 네 맘을 언제나 사랑으로 가득 채웠단다. 너는 관심과 사랑을 더 받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네게 충분히 채워져 있다는 것을 믿고 네 관심과 사랑을 외로운 아이들에게 쏟아라. 언제나 외톨이로 보이면 말동무가 되어 외로움울 덜어줄 수도 있다. 그가안고 잇는 문제를 알고 말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위로하고 용기를 주어라. 단 그 아이 자존심 상하지 않게.

그러나 그가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네게 의지하지 못하게 해라. 나 지금 할 일이 있어, 다음에 또 봐. 이렇게 거리를 유지해라. 그와 함께 영화를 볼 수도 있고 진지한 대화를 할 수도 있겠지만 한상 붙어있기를 바라고 지나치게 네 관심과 시간을 빼앗지 못하게 해라. 서로 원하는 거리가 다르므로 오해할 수 있지만 자존심 다치지 않게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이거하나 꼭 충고하마. 일정한 거리를 둔다는 것이 자칫 아주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얘기야. 이거는 할아버지의 실패담인데 할아버지는 낯을 많이 가렸어. 공감이 안 되는 친구나 제자는 굳이 내가 연락하고 싶지 않아서 자연히 거리를 유지했어. 그러나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까지도 연락을 받기만 하고 내 쪽에서 연락하지 않다보니 나중엔 서먹해지더라. 내편에서 거리를 두려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연락이 끊어진 사람들이 너무 많아. 뒤늦게 깨달은 거지만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받으려고만 했던 거야. 가끔 소식을 주고받을 수도 있었는데 내가 잡질 않아서 참 좋은 사람들 많이 스쳐 지나가버렸단다. 네가 원하는 친구라면 나이나 성별이나 직업, 국적, 따지지 말고 네가 먼저 연락해라. 네가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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