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 남은 사람들

‘실성한 스핑크스’ 오동진

- 권보드래

이태준의 『화관』을 기억하는가. 양귀자의 『잘 가라 밤이여』—후일 『희망』이라는, 확실히 덜 어울리는 제목으로 바뀐―를 읽어본 적이 있을까. 그렇다면 김장두며 형의 선배도 기억할지 모르겠다. 『화관』에서 김장두는 난발에 구질한 의복으로 횡설수설 여주인공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잘 가라 밤이여』에서 형이 떠메고 온 선배는 앙상해진 몸으로 나성여관 방 한 칸에서 발작에 시달린다. 김장두는 본래 명민하고도 수려한 청년이었지만 검거돼 고문에 시달린 다음 제 정신을 놓아 버렸다고 하고, 형이 사랑했던 선배는 고문으로 완전히 만신창이가 돼 버렸다고 한다. 극단적 폭력으로서의 고문은 이제 한국에서 거의 사라졌다고 하나, 얼마 전 김근태 씨의 죽음이 보여주듯 그 후유증은 아직 곳곳에 얼룩져 있다. 하물며 역사나 세계라는 차원에서랴.

1938년에 발표된 『화관』에서 작가는 고문으로 폐인이 된 김장두에게 진지한 관심을 돌리지 않는다. 여주인공은 순수한 이상주의자와 능력 있는 속물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바빠, 김장두의 사연을 알게 됐을 때 잠깐 놀라고 그뿐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20대 초반에 불과한 김장두는, 망가진 몸과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고문이라는 극단적 통치 기술은 그렇듯 인간을 고립시키고 마는 것이다. 경성 콤 그룹의 활동가였던 이재유처럼 ‘극한의 고문을 이겨낸’ 신화가 드물게 전해지긴 하지만, 인간의 몸은 너무나 쉽게 부서지고, 정신 또한 어쩔 수 없이 그렇다. 3․1 운동 직후 광복군 총영의 대장이었고 1925년에는 항일 단체들이 연합한 정의부 사령장을 지낸 송암(松菴) 오동진도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 대성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후 상업에 종사하고 있던 오동진이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은 3․1 운동 이후다. 고향 의주에서 3․1 운동이 벌어지자 선두에서 활약, 며칠 후 경찰이 검거하러 올 것이라는 소문이 전해지자 가족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버린 것이다. 국내외에서 무려 3백여 개의 청년단이 조직되던 당시 오동진은 조직 연합을 이끌었고 1920년에는 광복군 총영이란 이름하에 독립군을 결성했다. 평범한 생애 속에 열혈이 끓고 있었던 것인지, 만주 지역 독립운동에서 오동진은 빠르게 두각을 나타낸다. 특히 오동진을 수십 년 후까지 회자되는 이름으로 만든 것은 1920년 여름의 동시다발적 테러였다. 미국 의원단이 서울을 방문하고 있을 때였는데, 때는 1차 대전 후 정의와 평화의 새 질서에 대한 기대가 식지 않았을 무렵, 하여 미국인들에게 조선인이 식민 통치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킨다면 독립을 당길 수 있으리라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오동진은 여성 두 명을 포함한 총 열 명의 광복대원을 평양․신의주와 선천, 그리고 서울로 잠입시켰다. 폭탄 열 개를 나누어 맡겨서였다. 대원들의 활약은 성공적이어서 평안남도 경찰부, 신의주 철도 호텔, 선천 경찰서 및 선천군청이 각기 부분 폭파되었다. 서울 잠입조만은 총독부를 폭파한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 전 발각되었다. 폭파의 규모가 크진 않았으나 파문은 컸던 것 같다. 오동진은 궐석 재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후에도 조선 해방을 위한 무장 투쟁에서 오동진의 활약은 혁혁하다. 오동진은 대한통의부 군사부장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시도하였으며, 정의부 사령장이 된 후에는 국경 지역의 일본 경찰 관서를 습격․파괴하곤 했다. 적어도 네 군데 주재소의 습격 소식이 전한다. 1926년에는 고려혁명당을 조직해 활동했다.

일본 경찰의 최우선 체포 목표 중 하나였던 오동진이 덫에 걸린 것은 1927년 12월의 일이다. 밀정 김종원의 모략에 속고 ‘3대 악질 조선인 형사’ 중 한 명으로 꼽히던 김덕기의 수완에 말려서였다고 한다. 일본 경찰은 검거 기록 곳곳에서 ‘독립운동 거괴’ 오동진의 검거 사실을 기록해 두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부하 몇몇이 오동진을 탈옥시키기 위해 신의주 감옥에 잠입했다 되레 체포당하는 등 이 거물을 둘러싼 후보(後報)가 그치지 않는 중에도 재판은 좀처럼 개시되지 않았다. 1929년 말에 겨우 예심이 결정되었으나 이후 1년 넘도록 개정(開廷)이 없었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무기징역이 언도된 것은 체포 후 5년이 지난 1932년의 일이었다.

분파 투쟁이 속출하던 시기 10년 동안 수천 여 명을 통솔하면서도 한번도 배척받지 않았다는 감화력의 소유자, 체포 후에도 무려 50여 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인 의지력의 소유자였던 오동진은 이 5년 사이 어떠했을까. 각종 신문이며 잡지는 1932년 재판정에서의 충격만을 전한다. 오동진은 입장할 때부터 “진인황 진예수 오동진 행차시다.”라며 노래를 불렀고, 재판이 진행되는 중 재판 기록을 발로 차 던지면서 “기쁜 날이로다 하늘의 하느님. 오동진은 이제 재판정에 나타나지 않으리니, 에헤라둥둥 하느님 오동진.”이라며 곡조를 뽑아댔다고 한다. 하느님의 셋째 아들이라고 자처하면서 재판 따위는 필요 없다고 일갈했다는 것이다. 방청석은 웅성거렸고 재판이 끝난 후에도 진정 실성한 것인지 정신이상을 가장해 형을 최소화하려 한 것인지 갑론을박이 오갔다. 누구든 한 가지 사실만은 인정했다. 심문당하고 고문 받으면서 보내야 했던 5년은 오동진 같은 인물에게도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으리라고.

일본인 재판장은 오동진의 비정상적 행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사람들은 조롱하듯 개탄했다. “이 밝은 세상에서 하느님의 셋째 아들인들 법망을 피할 수 있나.” 체포 초기 아내가 어린 아들을 끌고 멀리 길림성에서부터 걸어와 감옥을 찾았을 때도“나라에 바친 몸이라 육친은 없다.”는 말로 면회를 거절했다던 오동진이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옥중에서의 생활은 또 어찌 배겨냈을는지. 정확한 시기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결국 오동진은 몇 년 후 옥중에서 세상을 떴다. 어머니 손에 끌려 왔었다던 어린 아들은 또한 어찌 됐는지 모른다. 오동진은 후손이 없는 독립운동가, ‘무후(無後) 선열’들을 기리는 제단에 오른 104인 중 한 명이다.

응답 3개

  1. 지나다말하길

    3.1운동이 정말 새롭게 다가오네요. 부끄럽지만 이런 얘기, 그 이름들 너무 몰랐거든요.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2. 달타냥말하길

    가슴이 턱 막히는 얘기군요. 참 용감하게 살아간 사람들의 얘기에 가슴이 턱 막힙니다.

  3. […] | 역사 뒤, 남은 사람들 | ‘실성한 스핑크스’ 오동진_권보드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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