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원전과 원폭, 개와 늑대의 시간

- 박정수(수유너머R)

3월 26일부터 이틀간 서울에서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립니다. 공교롭게도 북한이 위성로켓 실험을 예고하면서 핵테러 위협에 대한 공동대응이라는 이 행사의 취지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위성’ 발사라는 평화적 목적을 강조하면서 핵무기 관련해서는 IAEA에 핵사찰을 받겠다고 제안했지만 이 정부는 영 미덥지 못한가 봅니다. 북한의 로켓이 핵무기를 싣고 날 위험에 대해서는 그렇게 예민하면서 원전의 ‘평화적’ 핵물질이 원폭과 비등한 살상결과를 초래할 위험에 대해선 왜 그렇게 둔감한 걸까요? 타자에 대한 지적질이 자신의 약점을 가리기 위해서인 게 인생 다반사지만 ‘핵안보정상회’는 북한이나 이란같은 핵테러 예상국의 핵위협을 논하면서 정작 자기네 핵무기의 위험성과 감축방안은 논외로 치는 전형적인 ‘자기 것의 타자화’입니다. 또한 북한 로켓의 평화적 사용과 군사적 사용간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선 그렇게 잘 알면서 왜 핵안보정상회는 핵의 군사적 사용에 대해서만 논할 뿐 평화적 이용, 즉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논의는 쏙 빼는 걸까요? 2009년 오바마가 프라하에서 밝힌 포부대로 “포괄적 핵비확산 아젠다의 일부로서 세계의 모든 위협에 노출된 핵물질을 4년 내로 제거하겠다”면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보여주듯 세계를 위협하는 원전의 핵물질 역시 제거대상으로 논해야 할 텐데도 원전감축논의는 쏙 빼 놓고, 심지어 이번 정상회의를 한국 원전관리 능력의 국제적 승인인 양 이용하여 원전확대,수출정책에 가속패달을 밟으려는 건 남의 티끌로 자기눈의 대들보를 가리려는 손가락의 비열함을 너무 노골적으로 보여주지 않나요?

이 정부가 북한에 대해 지적하듯, 핵의 평화적 사용(원전)과 군사적 사용(원폭)의 경계는 지극히 모호한데 말입니다. 원전개발의 역사만 보더라도 항복의사를 밝힌 일제에 굳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건 소련의 동아시아 진출을 막기 위함이고, 이에 격분한 소련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어쩔 수 없이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며 원폭시설을 원전시설로 전환했습니다. 원전과 원폭의 차이는 핵분열을 한순간에 일으키는 것과 완만하게 통제하며 일으키는 데 있는데 무수한 원전사고와 최근 고리1호기 블랙아웃이 보여주듯 작은 실수와 결함 하나가 원폭의 방아쇠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폭으로는 수십만명이 죽지만 후쿠시마 사고 때 피폭 사망자는 한명도 없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죠. 확실히, 그렇게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이번 <위클리수유너머> 동시대반시대 주제가 이겁니다. 원전과 원폭의 차이, 그 차이 속에 감춰진 평화와 파괴의 교환관계.

핵안보정상회의에 즈음하여 두 개의 대응집회 소식을 전합니다. 하나는 3월 17,18일 밀양에 도착한 탈핵희망버스 집회이고 또 하나는 23,24일 합천에서 열릴 비핵평화대회입니다. 밀양집회는 7년전부터 신고리원전 송전탑공사에 반대하다 1월 6일 분신자살한 이치우씨의 삶과 죽음의 현장에서 치러진 원전반대집회입니다. 후쿠시마 사고가 보여주듯 원전(사고)의 가장 큰 피해자는 지방의 농민입니다. 물론 지방, 농민, 대지의 삶을 희생시켜 얻어진 핵 에너지의 최대 수혜자는 대도시, 특히 서울입니다. 그렇다면 원전은 마땅히 서울이나 대도시에 지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긴 송전선로에서의 전기 유실도 막고, 수송비용도 절감하고, 엄청난 온배수를 바다에 버리느니 가정용 온수로 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박원순시장님께 제안해 볼까요?

이 탈핵집회와 함께 핵안보정상회의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반핵집회인 합천집회에 주목했으면 합니다. 전두환의 고향, 혹은 해인사로 알려진 합천은 ‘한국의 히로시마’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45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 원폭 때 사망한 70만명 중 10%인 약 7만명이 ‘조선인’이었고 이중 4만명이 죽고 생존한 3만명 중 2만 3천명 정도고 귀국했는데 그 중 3분의 2가 합천출신이라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현재 국내에 생존해 있는 원폭피폭자는 2680명, 2세는 최소 7천여명입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이들 ‘재일조선인’ 피폭자들의 존재는 오래동안 우리사회에서 비가시화 되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야말로 핵의 군사적사용(원폭)과 평화적 사용(원전)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산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원폭은 한번의 폭발로 수십만명을 대량학살하기도 하지만 남겨진 방사능은 체내에 들어와 수십년, 아니, 대를 이어 피폭된 사람들의 세포를 살상합니다. 원폭의 비인간성은 바로 이 내부피폭에 있으며, 그 점은 원전도 똑같습니다.

이들 한국의 원폭피해자들이 그동안 우리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한 이유는 이데올로기 때문입니다. 이 만명의 피폭자들에 대한 치료, 보상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물론 일본제국주의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일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 미국의 ‘평화를 위한’ 폭탄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미국의 ‘평화를 위한’ 핵사용(히로시마 원폭)의 비인간성에 대한 살아있는, 아니, 서서히 죽어가는 산 증인이기도 한 것입니다. 핵의 평화로운 사용(원전)으로 죽은 밀양의 농민과 2차대전 미국의 ‘평화를 위한’ 핵사용, 즉 히로시마 원폭으로 죽은, 혹은, 죽어가는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비핵평화의 깃발아래 한 데 모일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차대전의 악의 축 일본에 대한 연합국들의 ‘핵안보’가 비인간적 원폭투하와 냉전으로 귀결되었듯이 북한과 이란에 대한 50개 정상들의 ‘핵안보’ 논의 역시 평화를 가져오지 못할 게 뻔합니다. 자신들의 핵무기는 전쟁을 위한 게 아니라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철학자 야스퍼스의 말처럼 공포는 결코 평화를 낳지 못합니다. 이번 핵안보정상회의가 진정으로 평화롭고 안전한 세계체제를 위한 것이라면 전세계의 핵무기감축을 위한 국제법과 감축프로그램을 논의해야 합니다. 또한 평화로운 핵이용이란 거짓명분으로 원전 르네상스를 가져오려는 생각부터 내려놓아야 합니다. 원전은 원폭만큼이나 위험한 도구입니다. 북한 독재자의 오판이 초래할 원폭(원자력폭탄)이 두렵다면 원전관리자들의 오판이 초래할 원폭(원자력폭발)도 두려워해야 합니다. 평화를 위한 위한 핵사용이 없듯이 평화로운 핵사용도 없습니다. 원폭의 공포에서 평화체제가 구축되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원전사고의 공포 속에서 평화로운 핵이용란 모순형용입니다. 평화로운 핵이용이란 없습니다. 오직 평화로운 핵제거만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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