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와 연평도 발언.

- 김융희

최남단 해안에 위치한 평화스러운 어촌인 강정마을에서 요란한 폭음의 치솟는 물기둥과 함께 산산히 부서진 구럼비 바위. 반대 의견을 묵살한 일방적 폭파 공사의 진행을 지켜보면서 참담했고, 심상찮은 분위기에 나는 황당했다. 총체적 민의인 도지사와 도의회 의장, 그리고 각 정당의 대표들이 함께 정식 요청을 했는데도 아랑곳, 경제 발전과 자유 민주주의의 선진국임을 자처한 내 나라에서 이런 일방적 횡포로 자행된 꼴이 너무 참담했다.

전후사를 살피고 생각하기 이전에 직면한 현실의 충격이 너무 크다. 나는 내막을 잘 모른다. 강정 마을이 왜 문제인가, 구럼비 바위가 어데 있는지 조차 몰랐었다. 아직 건설 공사 자체를 놓고 이견을 조율하지도 않는 채, 구럼비 바위를 폭파하는 공사였고, 바위를 제거하기 위해 수천 톤의 화약을 사용해 폭파를 시작한 것이 빌미였다. 강정마을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진즉부터 일방적 공사를 강행하면서 생기는 마찰이였음을,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구럼비 바위는 수많은 제주의 바위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 제주에서 용암이 분출된 곳은 다른 곳에도 많다면서, 당국의 국가 안보와 이익을 위한 개발을 앞세운 당위가 너무 오만하지 않는가! 이런 당국의 조처에 대해, 현장의 제주도에서는 도지사, 도의회 의장과 여야 도당 위원장 명의로 계획에 대한 문제점을 검토하기 위해 ‘공사 정지 협조 요청’을 합법적으로 청구했음에도, 국토해양부장관은 명령을 시정할 수 있다는 유권 해석을 내려, 보란 듯 여지없이 구럼비 바위 폭파를 강행한 것이다.

공사의 강행으로 지금도 강정마을 주민과 많은 반대자들이 계속 연행 구금과 벌금형이 행해지고 있다. 군사 정권 때의 독재 채제에서도 없었던, 이번 사건은 정부가 국책사업을 추진하면서 지방 자치단체의 저항을 무릅쓰고 공사를 강행하는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 자유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는 대한민국에 이처럼 안하무인의 공권력이 당당하게 실행되는 현실 앞에서 무슨 말이 통하며 어떤 화해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길이 1200m, 너비가 250여m의 하나로 된 너럭바위인 구럼비 바위는 보통 바위가 아님을 지금 알았다. 거대한 바위가 멸종 위기의 동물은 물론 희귀식물을 보호하는 생태계의 보고요, 지킴이란다. 유구한 세월을 밀려오는 거친 대양의 너울을 몸으로 막아내면서, 환경의 파괴와 오염으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생명들을 보호하며, 삶터를 지키는 일밖에 어떤 방해나 불편도 없었던 구럼비 바위였다. 그런 바위가 앞으로 100여일 동안을 매일, 수천 톤의 폭약 세례를 받으며 산산히 부서져야 한다.

까마귀쪽나무의 제주도 방언인 구럼비나무의 자생지로 지금도 자생하고 있으며, 해변에 용천수가 솟아 주민들의 식수는 물론 육수 민물의 습지를 만들어 생태의 보고가 된 지역이다.
해안은 멸종 위기의 동물인 붉은 말똥게와 맹꽁이의 서식지로 환경부의 지정을 받는 곳이다. 2002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호지역으로, 같은 해 해양수산부의 해양생태계 보호구역에, 그리고 2004년엔 문화재청의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생태 보전지역인 것이다.

범섬과 서건도가 잡힐 듯 앞에 놓여있고, 제주 올레길 코스의 가장 인기 높은 7코스 통과지역으로, 특히 관광문화적 측면에서 다른 곳에서는 불가능한 맨발로 바위를 걸으며 자연을 접촉할 수 있어, 관광객에 인기있는 지역이다. 이처럼 높은 가치로 주목받아 형상변경이 절대 불가능한 절대 보전지역이, 야당의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의회에서 2009년 12월에 여당만의 해제결의로 인해, 보전이 불가능한 오늘의 사태를 맞은 것이다.

유네스코 지정의 생태보존 3관왕의 보석같은 중요 지역이 주민들의 뜻은 깡그리 무시된 채, 무자비한 공권력의 행패로 평화로운 마을의 주민들이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허망과 실의속에, 수백 년을 지켜온 삶터를 포기하고 떠나야 하는 강정마을 주민들이며, 구럼비 바위의 해안은 지금의 황홀한 개구리 울음소리도 이제 들을 수 없는 콩크리트 구조물과 군사시설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런 사실을 이전에는 도데채가 몰랐다. 모르는 일이라 그동안 관심도 없었다. 온 국민의 관심사를 몰랐던 것이 대수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모른 채 지냈더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보고도 지시도 필요없다. 공격하면 응징하라, 어떻게, 굴복할 때까지 끝까지. 북단의 최전선 연평도에서 국방부장관의 직접 장병들에게 내린 명령을 TV를 통해 보면서… 나는 가눌 수 없는 당혹과 심란으로 너무 무서워 떨렸다. 내 마음은 마치 전쟁의 소용돌이 기분이다. 이 끔찍스런 일들이 전쟁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나님 제발 지켜주소서.의 기도를 계속했다.
내가 군사분계선 근방에 살기에 지나친 과민 반응인가 싶어 마음가짐을 고쳐보기도 했다. 언뜻 포성과 총성의 난무를 뚫고 피난을 갔던 육이오전쟁의 경험도 떠올랐다. 벌목장의 나무토막처럼 늘어선 시체들을 보면서도 지금처럼 떨리진 않았었다. 실미도사건 때, 실황이라며 정채 불명의 부대가 서해안쪽에서 수도를 향해 진격해 온다는 긴박한 방송을 들으면서 치를 떨며 기도했던 생각도 스친다.

물론 국토 방위는 국책의 최우선이다. 더욱이나 어떤 정치적 논리나 협상을 위한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확전을 꺼리며 자국의 이해에 의한 국제적 부당한 압력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도 상처의 기억이 또렷한 연평도 현장에서 이번 국방부 장관의 발언은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준 용단이었다. 솔직히 말해 내 개인적으로는 이런 약점을 노려 눈치를 보면서 무모를 감행하려는 비열한 자들에게 통수권자로써의 단호한 결의로 소신있는 발언에 대해 박수를 쳤다. 그러나 통쾌한 결단에 대한 배려와 실존적 현실은 또 다른 차원인 것이다.

지금 남북은 치열한 군비경쟁으로 막강한 무력을 갖춘 군사 대국들이다. 서로의 대치 상황에서, 어떤 의도에서도 서로의 공격과 응징으로 굴복되거나 승패가 가려질 수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면전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한편은 몰려 퇴로가 전혀 없다. 있는 것은 심술의 꼬라지와 가공할 화력뿐이다. 그들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한미합동 훈련에 심통으로 매일 비방과 위협을 일삼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리 국방이라지만 힘있고 유리한 자가 너그러워야 한다. 똥이 무서워서 치우겠는가! 열등의식에 심통 꼬라지는 전혀 관용의 여유가 없다. 너그러움으로 다둑거리며 달래는 것이 최상의 현책이다.

아직도 부모와 자식이 헤어져 평생을 기다리며 죽어가고 있음이 지구촌에서 유일한 우리의 현실이다. 국방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젊음을 군대에서 희생해야 하며, 한 형제요 핏줄이 서로의 가슴에 총뿌리를 겨누며 대치하고 있다. 수 백만의 인명을 잃는 참혹한 전쟁을 경험했고, 천안함 피폭과 연평도 포격사건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와중에 어수선한 나라 분위기가 나를 들뜨게 했다. 나는 배낭을 메고 시외 터미날에 갔고, 안동행 버스를 탓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양심과 자존을 지키며, 전쟁 없는 자유와 평화를 그리며 살았던 권정생님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의 당혹과 심란을 달래며, 고인의 유택이라도 다녀와야 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참을 수 없는 나의 복잡한 심사를 전주의 107호에 썼던 것이다.

개발이나 건설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산이 깎여 나가고, 바위가 부서지고, 마을이 사라져 사람도 살 수 없게 만들고, 서로 의지하며 어울려 살고 있는 뭇생명들의 안식처를 짖밟는 것이 건설이고 개발이란 말인가? 동물은 모함도 음모도 모른다. 쌓아둘 욕심도 없다.
무기를 만들기는커녕 무기 자체가 없다. 살기 위해 희생은 시키지만 쓸데없는 살생은 않는다.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법칙을 지키며 살고 있다. 자연을 오염시키지도 않는다. 그런데 창조 질서엔 아랑곳 없이, 더 많이 파괴하고, 더 많이 죽이고, 빼앗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인간은 위대한가?

성서에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있는 자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어수선한 와중에서 평화의 개념을 생각해 본다. 억눌린 사람의 해방,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자기몫 찾아 주기, 정의가 살아나고 평등이 실현되는 사회적 질서가, 성서의 평화 개념이며 그 뜻이라면, 평화란 정치 권력과의 대결이 불가피한 것이다.
겨우 목숨이나 이어가면서 권력에 아부하며 노예처럼 숨죽이며 사는 삶이 진정 평화일까? 권력은 철저하게 총칼로 무장하고 있는데, 맨손의 백성은 무엇으로 자기의 권리를 찾을 수 있는가? 뒤숭숭으로 어수산란의 착잡한 마음 뿐이다.
삶이란 이처럼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란 말로써 억지를 부려 자위로 삼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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