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한국인피폭자들을 담은 일본 다큐멘터리 <왜놈에게>

- 황진미

한국인피폭자들을 담은 일본 다큐멘터리 <왜놈에게>

<왜놈에게>는 일본인 감독이 1970년에서 1971년 당시 한국에 건너와, 한국인원폭피해자의 실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부제는 ‘재한피폭자 무고의 26년’으로, 일본과 한국 양쪽으로부터 버려졌던 한국인피폭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이질적인 화면들이 결합되어 있다. 일본인 성우가 한국을 관광가이드처럼 소개하며, 흡사 광고화면처럼 보이는 한국의 풍광이 영화의 시작과 중간에 삽입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화면들은 영화의 주제를 대비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영화의 주제는 한국의 원폭피해자들의 모습과 인터뷰 장면에 집약되어 있다. 화면에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하나하나 소개되고, 그들에 관한 정보를 짤막하게 자막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의 육성을 직접 들려준다.

영화 전체의 흐름을 짚어보면

일본인 관광객에게 하는 듯한 부산에 대한 닭살스러운 소개말
피폭자들에 대한 짤막한 소개
엄분연의 사연 (7분 15초)
사토 수상에 대한 편지를 낭독
임복순의 사연 (12분 30초)
일본대사관 앞 시위와 연행 (16분)
신영수 회장 인터뷰 (19분 40초)
부산 피폭자
해운대에 대한 관광용 멘트
강계호의 사연
베트남 파병 환송 (31분)
UN묘지
김인조의 사연
신진자동차 (36분)
유문규(지게꾼)의 사연
손귀달(밀항자)의 사연 (39분)
시장바닥 인터뷰
피폭자들의 막걸리 파티 (44분)

로 되어 있다. 화질이 좋지 않은데다, 일본어를 위주로 되어 있는 인터뷰 장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실태와 1970-71년 당시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 일본 피폭자의 10%이상이 징용 등으로 끌려간 조선인이었다네

알다시피, 1945년 8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핵폭탄이 투하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자 수는 약 69만 명에 이르고, 그중 23만 명이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일본은 ‘세계유일의 피폭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69만 명의 피폭자 중 1할이 넘는 7만 명이 재일조선인들이었다. 그중 4만 명이 당해에 사망했고, 3만 명이 살아남았다. 그들 중 2만 3천명이 조선으로 귀국하였고, 7천명이 일본에 남았다. 2만 3천 명의 피폭자 중 대부분은 이남으로 건너왔지만, 이북으로 간 피폭자도 1천-2천 명 가량 된다. 왜 이렇게 많은 조선인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지역에 살고 있었을까. 당시 이주는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생계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이주가 늘기 시작한 것은 39년부터 시작된 ‘국민징용령’에 의한 징용, 징병에 의한 강제이주이다. 특히 44년부터는 ‘여자정신근로령’에 의한 강제연행이 일어났다. 조선인 남녀는 군대와 군수공장, 군사시설, 탄광, 건설현장, 최전방 등으로 징발되어 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대규모 군부대와 군항이 있는 군사도시이다. 나가사키의 미츠비시 조선소에만 해도 7천명의 조선인들이 강제 연행되어 있었다.

피폭자들 중에서도 조선인들의 사망률이 일본인들에 비해 더 높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재난의 순간에도 조선인들은 구조와 치료의 손길을 받지 못했다. 시체가 뒹구는 참사의 현장에서도 “아프다, 살려 달라”며 조선말로 비명을 지르는 자들은 구조와 치료에서 배제되었다고 한다. 9월에서 10월 귀국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는 상황에서도 태풍 등에 의해 많이 죽었다. 가까스로 조선에 도착해서도, 이들은 어떠한 치료나 구호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 서툰 조선어 발음에, 일본말을 지껄이는 거지와 다름없는 상태였으며, 몸도 추스르기 힘들고, 고향에 돌아간다 한들 생활 터전이 없어 생계가 막연한 처지였다. <왜놈에게> 마지막 시퀀스(런닝타임 44분)에 한국인 피폭자들이 둘러앉아 막걸리 파티를 벌이며 일본인 감독에게 하소연하듯이 말하는 장면에서, 이들이 일본에서 ‘개 취급’ 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 와서도 ‘일본에서 온 거지’로 비웃음을 당하거나 ‘나쁜 일본인’이라며 배척당했음이 말해진다. 이들은 미처 생활이 수습되지 못한 상태로 근근이 살아가다가, 한국전쟁을 만나 상당수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한편 일본에서는 패전 후 7년간의 미군정 시기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된 52년도에 히로시마에서 최초의 피폭자조직인 ‘원폭피해자의 모임’이 결성되어 무료치료를 요구하고 상호 구조 활동을 펴나가고 있었다. 54년도에 태평양의 비키니 섬에서 미군이 수소폭탄을 실험하였는데, 근처에서 조업 중이던 일본의 참치어선의 피폭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정부는 이를 배상하였는데, 이 일을 계기로 일본의 피폭자들은 자신들에게 미국정부나 일본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일본 전역에서는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에 반대하는 여론이 일어나, 55년 8월에는 피폭 10주년을 맞아 원수폭금지 세계대회를 열었다. 이러한 여론에 힘입어 57년에는 원폭 의료법이 제정되어 ‘피폭자 건강수첩’을 발부하여 건강진단과 원폭증의 치료를 보장하였다. 63년에는 원폭특별조치법(원호법)이 제정되어 이들에 대해 수당을 지급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은 자신들을 전쟁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인식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피폭문제는 완전히 백안시 하였다.

* 굴욕의 한일협정

전후 한국과 일본의 국교는 오랫동안 맺어지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직후인 51년부터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타진이 있어왔지만,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청구권 문제를 경제협력으로 치환하고자 하였고,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60년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해 일본의 경제협력이 시급히 필요했다. 한일회담의 방향이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으로 가닥을 잡아가자, 한국에서는 굴욕외교 반대의 여론이 확산되었다.

1962년 곽귀훈은 한일조약에서 원폭피해자 보상 문제가 포함되기를 바란다는 호소를 하였고, 63년 이종욱, 오남련 부부는 한국정부, 미대사관, 일본대표부, 신문사 등에 한국인 피폭자의 실정을 호소했지만 모두 무시되었다. 한편 63년과 64년에는 한국인 피폭자 중 일본에 입국하여 ‘건강수첩’을 발부받아 원폭전문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사람들도 생겼다.

64년에는 한국의 피폭자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루어졌다. 한국원자력병원은 한국인 피폭자의 신고를 받아 총 203명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65년 일본의 거류민단(재일조선인단체)에서 25명의 조사단을 파견하여 대한적십자사와 함께 1개월에 걸쳐 한국의 피폭자의 실태를 조사하고, 실태와 더불어 일본의 원호상황을 알렸다. 당시 거류민단의 조사로 자신이 피폭자인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이 원폭이었음을 알게 된 사람도 있었고, 자신의 여러 질병들이 원폭에 의한 것이었음을 처음 알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462명(사망자 8명 포함)을 더 찾아내어 총 650명의 한국인피폭자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이들은 일본에 의한 배상과 치료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맺어졌다. 이로 인해 한국인 피폭자들의 일본정부에 대한 배상청구권은 날아가 버렸다. 한일협정의 내용은 대일 보상 청구권을 일괄하여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의 경제협력기금으로 ‘퉁치는’ 것이었다. 이로써 징용이나 정신대, 피폭자 등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조선인들의 개인적인 보상 청구권이 완전히 무효화되었다.

* 밀항하여 법정 투쟁

실망한 한국인 피폭자들은 66년 가칭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를 결성하여, 67년에 정식 발족하였다. 67년 말 가입 원폭자 수는 1,857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한국정부와 일본정부, 미국정부에 피폭자 치료와 생계대책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보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어렵다는 대답뿐이었고, 일본정부는 한일협정으로 법적 보상의 문제는 끝났지만 인도적 차원의 도움을 고려중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미국정부는 아예 답변조차 없었다. 67년 11월 피폭자 20명은 일본대사관 앞까지 가두시위와 연좌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68년 8월에는 서울 조계사에서 제1회 한국 원폭피해자 위령제가 열렸다.

68년 10월 부산에 사는 피폭여성 손귀달은 일본에 밀항한다. 그러나 이틀 만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강제송환 된다. <왜놈에게> 39분쯤에 손귀달씨의 인터뷰가 나온다. 68년에 엄분연과 임복순은 교토의 한국인 전몰자 위령제에 초청받아 관광비자로 일본을 방문하면서 히로시마 원폭병원에 입원하였고, 피폭자 건강수첩 발부 신청을 하였지만 거부당했다. (<왜놈에게> 런닝타임 7분 15초에 엄분연이 등장한다. 그녀는 피폭자 협회 부산지부장으로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당했던 당시 상황에 대해 상세히 진술한다. 이어서 사토우 수상에 대한 편지를 낭독하는 엄분연씨의 목소리가 나온다. 편지 낭독의 마지막 부분-런닝타임 12분 30초-에 임복순이 등장한다.) 이들이 수첩 발부를 거부당한 이유는 ‘일시적으로 방문한 외국인에겐’ 발급할 수 없다는 이유를 댔다. 그러나 63년과 64년에 수첩을 발급을 받은 한국인피폭자가 있었음을 상기해 보건데, 역시 ‘한일협정’을 핑계 삼아 개인적인 구제노력조차 무력화하려는 것이었다.

<왜놈에게>의 손귀달의 인터뷰 장면에서 언급되는 손귀달의 오빠 손진두 역시 70년에 치료를 받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한다. 손진두는 당시 한국인피폭자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밀입국 후 체포당하지만, 강제출국 당하지 않고 ‘수첩재판’이라는 법정투쟁을 8년간 벌인 끝에 역사적인 승소를 거둔다. 당시 일본에서는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일어나는 때이기도 하였지만,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었다. ‘손진두의 일본체류와 치료를 요구하는 전국시민의 모임’이 결성되었다. 원폭피해자협회 회장 신영수(<왜놈에게> 런닝타임 19분 40초에 등장하여, 한국은 반공국가 어쩌구 말하는 사람, 그는 이후 25년간이나 협회를 이끈다)가 방일하고, 71년 겨울에 ‘한국의 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의 모임’이 결성된다. 한편 71년 8월 협회 회원 10여명이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 장면이 <왜놈에게>에 런닝타임 16분에 등장한다. 거리는 온통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으로 축제분위기이고, 할머니 등 여러 명이 아침 9시 반에 일본 대사관 담벼락에 서거나 앉아 있다가 장총을 찬 경찰에 연행되어 닭장차를 탄다. 10시 42분이다. 11시 17분에 일본 수상이 탄 차가 광화문을 지나간다. 피폭자들은 모두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어 구토와 복통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6시 30분까지 억류되었다고 자막을 통해 설명된다. 이들은 당시 미대사관 앞에서 가두시위를 하고, 미국대통령에게 메시지를 건넸다고 한다. 이에 대한 미국 서기관의 대답은 “미국은 역사상 전쟁 배상을 한 적이 없다” 였다.

손진두는 71년 11월에 건강수첩 발부를 신청하지만, 불법 입국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72년부터 재판을 벌여, 74년 1심에서 승소한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신영수 회장과 ‘시민의 모임’ 등이 민간외교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일본 외무부 장관으로부터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피폭자를 구제하기 위한 특별입법조치”가 필요하다는 발언을 얻어내었다. 이에 따라 일본정부가 한국인피폭자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한국대사관을 통해 피폭자의 수와 의료현황 조사에 착수했다. 당시 한국의 보건사회부는 원폭피해자를 9,362명으로 공식 파악하였으며,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를 포함해 약 2만명으로 추정하였다. 74년에 손진두가 1심에서 승소하자 당시 등록되어 있던 6,891명의 피폭자들은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하였고, 협회는 “일본 국내 피폭자와 동등한 구제를 요청한다”는 논평을 내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손진두 재판에 항소하였다.

하지만 한국인 피폭자들은 수첩과 수당을 받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74년에 신영수 회장이 수첩 발부를 신청하자, 도쿄도지사는 지방정부의 재량으로 발부해주었다. 한일협정 이후 한국인 피폭자에게 최초로 발부된 수첩이었다. 76년에는 정칠선이 수당을 신청하여 수령하는데 성공하였다. 불법입국이 문제가 되었던 손진두도 75년 2심, 78년 3심에서 최종 승리하여 수첩을 발부받게 되었다. 손진두 재판의 최종심에서 최고재판부는 “일본정부는 모든 피폭자에 대해 전쟁책임이 있으며, 조선인 피폭자에 대해 국가적 도의상으로도 보상책임이 있음”을 판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 판결의 여파가 전체 한국인피폭자 전체에게 미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시행규칙 등의 규정을 교묘히 이용하여 한국으로 귀국하면 수첩이나 의료비 지급, 수당 등도 중지되도록 하였다. 즉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본으로 와야만 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 도일치료

1978년 손진두 재판 이후 어찌 되었을까? ‘협회’는 손진두 재판 상고심 직후, 일본정부에 대책을 요구하기위해 협회에 등록된 9,362명의 한국인피폭자에 대한 종합적인 실태조사를 실시하였다. 결과는 예상보다 나빴다. 병에 걸린 사람은 80%였지만, 의사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20% 뿐이었다. 소득도 매우 낮았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질병과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있었다. 이는 치료와 경제적 지원을 받는 일본의 피폭자들의 실태에 비해 매우 열악한 상태였다.

78년 일본의 자민당 의원과 한국의 공화당 의원이 만나, 한국인 피폭자 문제에 관한 협의에 들어갔다. 1980년 한국 보사부와 일본 후생성 사이에 교환된 합의서에는 “제 1차 도일치료 환자는 10명으로 하고, 입원기간은 2개월을 원칙으로 6개월까지 연장 가능. 도일치료의 왕복 여비는 한국정부가 부담. 치료비와 수당은 일본정부가 지급한다”는 것에 합의하였다. 80년 1차 10명의 피폭자가 히로시마 병원에 입원하였다. 이후 5년 동안 중증자나 고령자는 제외하고 매년 60명씩을 원폭병원에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2개월 치료를 원칙으로, 재입원은 불허하며, 귀국 후 사후관리는 없는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도일 치료자에게 합의서에 나와 있는 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런 도일치료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었지만, 그나마도 피폭자들에 대한 한국정부의 원호는 전혀 없었기에 피폭자들에겐 유일한 희망이었다. 5년 동안 349명의 피폭자의 도일여비를 부담하였던 한국정부는 도일치료의 연장을 거부하여, 도일치료는 중단되었다.

* 40억 엔 보상과 그 후

1987년 한국정부는 국내 피폭자 치료 제도를 시작했다. 적십자병원을 지정병원으로 하여, 치료비의 90%를 정부가 부담하는 것이었다. 이는 전국민의료보험이 실시되기 이전이라 획기적인 것이었다. 87년 ‘협회’는 일본정부에 23억 달러 보상 청구를 제기하였다. 88년에는 도쿄에서 ‘한국인피폭자문제시민회의’가 발족하였다. 89년 협회는 일본정부를 규탄하며, 15%로 바뀐 의료비의 본인부담금을 협회가 내주겠다며 무료치료를 선언했다. 89년 11월 일본정부는 4천2백만 엔을 대한적십자사에 송금하고, 그 운용은 협회에 맡겼고, 90년도에도 같은 금액을 송금하였다.

1990년 한일정상회담 당시 일본은 ‘인도적 관점, 복지향상의 관점에서 총액 40억 엔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협회가 요구한 23억 달러에 훨씬 못 미치는 금액인데다, 일본은 보상이 아니라, 인도적 지원이기 때문이라고 못 박으며, 피폭자들에게 수당으로 지급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그나마도 3년에 걸쳐 나누어주었다. 1991년 한국정부는 피폭자실태를 조사하였다. 협회 등록자 2,307명 중 1,982명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78년의 조사에 비해 건강상태는 더 악화되었고, 경제적 지원도 절실한 상태였다. 40억 엔은 협회가 의료비 본인부담금을 내주고, 연 1회 건강진단과 매월 진료보조비와 장례비, 합천 복지관 건립 등에 쓰였다. 그러나 한국의 의료보험 특성상 보험에 적용되지 않는 것이 많아 피폭자들이 무료진료의 혜택을 누리는 것도 아니고, 전문 진료시설도 부족한데다가, 2000년 기준으로 진료보조비는 매월 10만원, 장례비는 150만원에 불과해 일본의 피폭자에 비해 턱없이 적은 혜택을 받을 뿐이다. (일본은 실제로 무료진료이며, 수당을 매월 33-150만원을 받는다.)
96년에는 한미일 피폭자단체가 공동으로, 일본 후생성에 ‘피폭자원호법’의 국외적용을 요청하였고, 97년에는 브라질의 피폭자단체도 합류하였다.

2001년 6월 곽귀훈은 ‘피폭자원호법의 평등적용’을 요구하는 재판에서 ‘피폭자원호법은 국가보상적 성격을 지닌 법률’이며, 일본을 출국한 재외피폭자에게도 피폭자수당을 지급할 것을 명한 판결을 얻어내었다. 일본정부는 항소하였다. 2002년 항소심에서 “피폭자는 어디에 있다하더라도 피폭자”라며, 승소판결을 내렸다. 2001년 이강녕씨도 재외피폭자 원호를 요구하는 재판에서 승소하여 “재외피폭자에게 발부된 건강수첩은 출국하더라도 유효하며, 일본에서 수당 수급권을 취득한 재외피폭자는 일본출국 후에도 수당을 지급한다”는 정부의 방침을 얻어냈다. 그러나 한국인 피폭자가 수당지급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번은 일본을 방문하여 수첩과 수당을 신청해야 한다. 또한 피폭 2세에 대한 건강진단은 한국에서 실시되지 않는다. 2003년 등록한 피폭자 2,200명 중 1,088명이 수당수급권을 취득하였다.

* 베트남 파병과 신진 자동차의 아이러니

<왜놈에게>에게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런닝타임 31분에 등장하는 미군부대 앞에서 파월용사들을 환송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장면이다. 행진곡과 함께 미군부대 앞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소풍을 나온 듯 꽃을 들고 상기된 표정으로 말한다. 자신도 징용으로 끌려간 경험이 있지만, 아들이 베트남 침략전쟁에 파병되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다. 또 다른 남자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 것에 대해 “외국이 우리나라를 도와주었으니, 우리도 외국을 도와주는 것, 국위선양..”으로 대답한다. 베트남전에 대해서는 “우리도 같이 대항”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도 하듯이, 곧바로 UN묘지에 대한 소개말이 나온다. 즉 냉전의 구도 하에서 한국전쟁에서 UN군이 남한을 지켜주었으니, 베트남의 공산화에 대해 다 같이 대항한다는, 당시의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꾸역꾸역 주워섬긴다. 반전과 평화에 대한 문제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런닝타임 36분에는 신진 자동차 공장을 소개하는 여성 성우의 목소리와 대한 뉴스 같은 광고성 화면이 등장한다. “1965년 한일 우호와 협력의 결과로 발족되어, 1966년에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부산공장은 일본 히노 자동차로부터 엔진 등 부품을 사들여 연간 5백대의 버스를 생산하고 있으며, 서울공장은 도요타와 협력으로 연간 5천대의 코로나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앞으로도 일본과의 결속을 강화해 경제발전과 국토건설을 추진하겠습니다.” 아마도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홍보용 영상인 듯한 이 화면은 앞뒤에 배치된 피폭자들과 절묘한 아이러니를 이룬다. 이 장면의 바로 앞에는 자식 넷을 잃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웅얼거리는 피폭자 여성의 통한의 눈물이 배치되어 있고, 이 장면 바로 뒤에는 출생 3일만에 피폭되어 26년간 살아 온 지게꾼의 멍한 표정이 배치되어 있다. 저주스러운 한일협정의 결과로 청구권을 모두 박탈당한 이들에 비해 지나치게 명랑한 자본의 웃음소리는 괴기스러울 정도이다.

제목인 <왜놈에게>는 감독 자신을 포함한 일본인들에 대한 자성을 촉구하는 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피폭자들은 일본인 감독에게 “노인이 왔으면 과거 경험도 있으니까 쇠파이프로 한방 치고 싶지만, 젊은 사람이 와서 그럴 수도 없고….일본에서 오신 분이 판국 피폭자에게 쇠파이프로 안 얻어맞고 온전히 돌아갈 수 있는 것도 행복이다….일본 사람이란 말은 좋은 말이고, 우리는 일본사람을 왜놈이라고 한다. 뒤에서 말했다. 왜놈, 뭐 하러 왔냐고. …”라는 웅성웅성한 말들 속에서 나온 단어이다. 그는 자신에게 들려준 한국인피폭자들의 솔직한 속내를 ‘왜놈’들에게 다시 들려주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 왜놈이 왜놈에게. 겸양이자 자괴가 섞인 말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히로시마> 이치바준코. 역사비평사. 2003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전진성. 휴머니스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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