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정말 김재호는 나경원을 사랑했을까?

- 오항녕

1.
잘난 척 하는 사람일수록 원래 남 잘난 척하는 꼴을 못 본다. 재수 없는 사람일수록 원래 남 재수 없는 꼴을 못 본다.(재수 없다는 말은 전아(典雅)한 표현은 아니어서 종종 쓰기 꺼려지면서도 그 적실성 때문에 놓기 어려운 말 중 하나이다.) 내가 그렇다. 이 글에도 분명 그런 사심(私心)이 묻어 있음을 굳이 숨기고 싶지 않다. 사심이 사심을 드러내주는 법이다.

1.
남들은 새해의 희망을 안고 잠들어 있을 정월 초순, 홀로 일어나 눈물짓는 사내가 있었다. 그것도 누가 들을세라 소리 죽여 안으로 안으로 눈물을 삼키면서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지지난 해 세상을 뜬, 아니 세상을 떴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잠시 머물렀던 아이의 죽음을 기억하며 마음 아파하던 사내,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1.
정월 초엿새는 어린 것이 죽은 날이다. 마음을 두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 다스려지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갑자기 열 편의 절구를 입으로 읊었으니, 이 또한 소동파가 한 차례 통곡으로 나머지 슬픔을 떨어버린 것과 같은 의미이다.(이 부분은 시제(詩題)이다. 모두 10편인데, 7, 8, 9편만 소개한다.)

하찮은 풀 서리나 눈에 시들지만 寸草萎霜雪
봄 오면 다시 피어나는 법이거늘 春來還復榮
하늘 마음 어찌 박하고 두터워서 天心何厚薄
우리 아이 되살리지 아니하는가 不敎兒再生

건너 이웃집 애 우는 소리 듣고 隔隣聽呱呱
몇 번인가 네가 우나 착각했나니 幾度錯疑汝
지난해 너와 같은 때 태어난 아이 去歲同時兒
어느덧 이제 벌써 말을 배운단다 如今已學語

눈물 참으려 눈길을 떨구었건만 忍淚已垂睫
잊으려 해도 다시금 보고 싶다 欲忘還復思
울음소리 삼켜 어둔 벽 향해 앉아 呑聲向暗壁
그래도 혹여 네 어미 알까 두려워 恐被汝孃知

1.
또 문곡은 죽은 아이의 묘지(墓誌 일생 등을 적어 무덤에 넣는 기록)도 지었다. 〈죽은 아이 칠룡의 묘지(殤兒七龍壙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칠용(七龍)은 안동(安東) 김수항( 金壽恒)의 어린 아들이다. 그 아비가 조정에 죄를 지어 호남(湖南)의 영암군(靈巖郡)에 귀양을 왔는데, 그 어미도 따라 내려왔다. 을묘년(1675, 숙종1) 12월 16일에 구림(鳩林) 시골집에서 태어났다. 그 아비가 이름을 지었는데, 칠(七)은 아들의 차례이고 용(龍)은 꿈에서 용을 보았기 때문이다.

태어난 지 21일만에 죽어서, 서남쪽 십리쯤 있는 청녕동(淸寧洞)에 묻었다. 당초 아이의 골상이 비범해서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머리카락이 마르기도 전에 별안간 요절했으니, 어찌 그 아비의 남은 죄에 연루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 아비가 예법을 넘어 곡하나니, 스스로 이 글을 써서 묘에 넣어 슬픔을 표한다. 이제 마무리하노라.(아래와 같이 묘지 끝에 압축적으로 일생을 기리는데, 이런 글을 명(銘)이라고 한다.)

초목 무성한 남녘 땅 蓁蓁南土
너 일찍 죽어 나그네 귀신됨을 슬퍼하나니 哀汝殤之爲旅鬼
백년 지난 뒤 百歲之後
남들이 김씨 아들인 줄 알아보고 人知爲金氏之子
그때까지 밟고 훼손하지 말기를 尙無踐毀也

1.
아내가 첫 애를 낳았을 때, 나는 종종 연구소에서 자고 들어왔다. 인천 집과 서울 연구소를 출퇴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왕복 4시간이었으므로, 연구소에서의 외박은 그리 타박거리가 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난 이틀 또는 사흘에 한 번 꼴로 집에서 자는 셈이었다. 물론 아내도 출근을 해야 했다. 아침에 아이 챙겨 장모님께 맡기고 아마 바쁘게 출근을 서둘렀을 것이다.(아, 벌써 이런 비굴=반성-모드로 가면 안 되는데…. 수오지심(羞惡之心)과 시비지심(是非之心)이 한꺼번에 작동하는구나.)

그러던 어느 날 밤이 생각난다. 그날은 연구소가 아닌 집에서 자는 날이었다. 알다시피 갓난애들은 밤에 자다 깨게 마련이다. 그날따라 아내는 피곤했는지 애가 우는 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자고 있었다.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아내를 부르다가 깨지 않자, 애를 툭 쳤다. 진짜 ‘툭’ 쳤는데, 이놈이 죽겠다고 울기 시작하는 거다. 짜식, 엄살은! 하는 순간 아내가 깨어 일어나 애를 달래기 시작했고, 난 쌩 까고 다시 꿈나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이놈은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놈이 큰 뒤에도 종종 나를 경계하는(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이 그날만은 아니겠지만, 또 이미 느낀 분도 계시겠지만, 이런 말을 굳이 하는 이유는 아내에게 미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와 같은 나를 데리고 살아준 게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도 지금은 내가 좀 나아지지 않았나?(이래서 재수 없다는 말을 듣는 게다.)

1.
문곡, 조선시대 이만큼 극적인 인물이 드물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할아버지이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청음을 심양(瀋陽)으로 압송해가서 온갖 회유와 협박을 거듭했는데도, 청음이 조선 침략의 부당성을 꾸짖자 “정말 골치 아픈 노인네!(最難老人也)”라고 손을 들고 말았던 조선 인민의 기개(氣槪)의 상징. 문곡은 그 음덕(陰德)도 입었다.

성균관에 있던 효종 원년,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비방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당시 수업거부에 해당하는 권당(捲堂)을 주도하고 상소를 올렸다가 정거(停擧 과거응시 자격 박탈)를 당했다. 박세채(朴世采)와 함께. 이듬해에 풀려나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40세에 판서, 정승에 오른다. 늘 고상하다는 평을 들었던 인물.

숙종이 뒤늦게 장희빈(張禧嬪)에게서 아들을 얻자, 그 기쁨에 곧장 돌도 지나지 않은 아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려고 했을 때(1689년, 숙종15), 시기상조임을 들어 반대했다. 아직 왕후가 젊기 때문에 시간을 두자는 것. 종종 이를 당색에 따른 상소였다고 평가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아니다. 영창대군과 광해군의 사례에서 보듯, 왕조 시대에 적자(赤子)와 서자(庶子)의 서열과 처신은 지혜롭지 않으면 분란, 그것도 심각한 분쟁의 씨앗이 된다. 문곡이 걱정했던 것은 바로 그것. 불과 몇 년만에 그 걱정은 현실로 나타났다. 장희빈의 전횡으로. 숙종이 나중에 깨닫고 바로잡았지만(1694년, 숙종20), 문곡은 이미 귀양 가서 사약(賜藥)을 받고 세상을 떴을 때였다.

1.
처음에 위에 인용한 문곡의 시를 보았을 때 내가 느꼈던 당혹감. 위의 시는 문곡이 영암(靈巖)으로 귀양 갔을 때 쓴 시였다. 영암으로 귀양을 간 것은 숙종이 즉위하면서, 예송(禮訟)에서 국왕도 다른 신분의 사람들, 예를 들어 사(士), 서인(庶人)과 공통된 예법의 원칙을 적용받는다는 입장에서 복제(服制) 논쟁을 벌이다가 임금을 업신여겼다는 죄를 받았기 때문이다.

통상 귀양을 갈 때 아내나 식구들을 데리고 가지 않는다고 알고 있던 나는 ‘어떻게 아이를 낳았지?’, ‘문곡이 1628년생이니까, 거의 쉰 살이 다 된 나이인데, 늦둥이를 보았네!’ 운운하며 상상을 했다. ‘첩을 얻었나?’, 생각도 해보았지만,(이렇게 해석하는 연구자도 있었다.) 귀양을 간 사안의 심각성으로 보아 첩을 둘 형편이 아니었을 뿐더러, 문곡의 성격이 귀양 가 있으면서 첩을 얻을 스타일도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아이를 기억하며 문곡이 쓴 묘지명을 보고서야 해답이 나왔다. 우선 일찍 죽은 아이는 아내인 나씨(羅氏) 소생이다. 실록을 찾아보면 문곡이 귀양을 간 것이 1675년(숙종1) 7월이었다.(원주에서 영암으로 귀양지가 바뀌었다.) 아이가 태어난 것이 12월이니까, 귀양 가기 전인 그 해 봄에 나씨는 아이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내가 귀양지로 따라갔고 거기서 칠룡이를 낳았는데, 안타깝게도 스무 날만에 세상을 떴던 것이다. 편치 않는 귀양지 생활에 맘고생이 겹쳤던 것일까?

1.
문곡은 자식복이 많기로도 유명했다. 아들 여섯을 6창(昌)이라고 하는데, 창 자 돌림에, 집(集), 협(協), 흡(翕), 업(業), 즙(緝), 립(立)을 말한다. 모두 건실한 동량(棟樑)으로, 정치나 학문, 문예 쪽에서 한 몫을 했다.

위의 시는 아이가 죽은 지 만 1년 되는, 햇수로는 3년 되는, 1677년에 지은 것이다. 나는 그런 경험이 없다. 남편 죽음은 끝이 있어도 자식 죽음은 끝이 없다고 한다지만, 처음엔 태어나서 스무 날 남짓 살다 간 아이에 대한 애도가 그리 절절할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애도에 점차 마음이 아파졌던 것 또한 사실이다. 조선시대 학인(學人), 아니 조선 사람들의 정감을 알고 있다고 짐짓 자부했었는데, 난 아무래도 근대인인 모양이다.

그가 운다. 어두운 방에서. 그것도 아내가 깰까 두려워 담벼락으로 몸을 돌리고 흐느낀다. 이 남자, 맘에 든다. 그리고 나, 정말 많이 반성했고, 반성하고 있다. 다짐도 했다. 아내가 깰까 두려워할 줄 아는 남자가 되자고.

정말 나로서도 이유를 모르겠는데, 느닷없이 박은정 검사에게 기소 청탁 전화를 넣었던 김재호는 정말 나경원을 사랑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정말 김재호는 나경원이 깰까 걱정 되어 담벼락을 보고 울 수 있는 남자일까? 분명, 이런 걱정을 내가 왜 하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드는 걸 어떡하겠는가? 아무튼 볼 기회가 있으면 한 번 물어보아야겠다. 재수 없는 상상이지만.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