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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칼럼

‘그날’을 정당하고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 -2012년 3월 11일, 지진 쓰나미 원전 사고 1주기에 붙여 –

- 신지영

* 신이 사라진 날

이처럼 무겁고 가벼운 날이 또 있을까? 2011년 3월 11일 지진, 쓰나미, 원전사고로부터 1년이 흐른 2012년 3월 11일. 1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고통의 무게에 비하면 오히려 가벼울 ‘그날’. “그날이 왔어.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지”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그날’을 며칠 남겨두고,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었다. 지진으로 거리가 휘어질 듯 흔들리고 멀미가 났던 순간, 이튿날부터 엄습했던 방사능, 두려움 속에서 만났던 연구회 친구들의 얼굴, 수돗물에서는 세슘이 나오고 페트병 물은 동이 난 3월 말 참지 못하고 한국에 잠시 돌아와 있었을 때, 그 해방감과 안도감과 함께 밀려들었던 죄책감과 체력적 한계. NHK만 뚫어져라 보았던 칠흑 같은 시간들. 그때를 다시 산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단순히 3월 11일에는 내가 ‘그날’을 겪었던 곳에서 “그날”을 다시 잘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2년 3월 11일은 새로운 고민을 안고 찾아왔다.
“일본에 돌아왔어요? 통역을 부탁해도 될까요?” 3월 3일경, 한 액티비스트로부터 통역을 부탁받았다. 내가 가능한 시간은 10일과 11일로 후쿠시마현 고리야마(群山)시의 현민집회 <원전 필요 없어! 3.11 후쿠시마현민 대집회(原発いらない!3・11 福島県民大集会)>의 촬영이었다. 이 편지를 읽은 직후에는 연구회 시간만 조금 조절되면 당연히 갈 생각이었다. 활동가들에게 부탁받는 통역은 체력과 시간이 허락하는 한 함께 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얻는 긍정적인 에너지, 기쁜 만남, 섬세한 감수성들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나는 이런 순간들에 가슴을 펴고 호흡을 가다듬는 것이다. 그러나 집회 위치를 확인한 뒤 여태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고민에 빠졌다. 액티비스트에게는 너무나 미안했지만, 또한 후쿠시마 현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지만, 솔직히 나는 두려웠다. 복잡하게, 강하게, 깊이, 오래.
나는 피폭당하는 것이 두려웠다. 집회가 열리는 곳은 후쿠시마현 고리야마시 카이세이산 야구장이었다. 안내 홈페이지에는 집회장소의 방사선량이 표시되어 있었다. 내야 좌석의 방사선량은 0.19~0.69마이크로시벨트로 평균 잡아 0.5~0.6마이크로시벨트였다. 도쿄의 10배 정도의 수치였다. 외야 좌석은 1.5마이크로시벨트로 방사선량이 높은 탓에 출입을 보류한다고 씌어 있었다. 그러나 외야 좌석은 내야 좌석 바로 옆 아닌가?! 고리야마시 주변 방사선량을 찾아보니 낮은 곳이 0.5~0.6마이크로시벨트이고, 1.0~2.0마이크로시벨트인 곳도 많았다. 더구나 통역이므로 마스크를 쓸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후쿠시마에 가볼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망설임이 계속되었다.

1 안녕히 원전!

1 안녕히 원전!

결국 후쿠시마 출신 친구와 이바라키현 출신 친구에게 의견을 묻기로 했다. 한 친구는 어느 정도 피폭당할 게 확실하니, 꼭 마스크를 하고 입었던 옷은 돌아온 즉시 빨거나 버리라고 했다. 흙이나 꽃가루 등은 절대 만지지 말고 대접을 받더라도 음식은 부디 부디 조심하라고 했다. 더불어 내가 위험한 곳에 가는 것을 내버려 둔 것을 알면 다른 친구가 화를 낼지 모르니 비밀로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고민과 두려움이 깊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피난하지 못한 채 후쿠시마에 남아 생활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곳에 취재를 하러 가겠다는 활동가들의 단단한 결의가 무엇인지, 피부 깊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또 다른 후쿠시마 출신 친구는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겨 주었다. 후쿠시마의 전력을 써 왔음에도 원전사고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도쿄 사람들에 대한 후쿠시마현 사람들의 미움은, 도쿄에서 후쿠시마로 몰려든 활동가들에 대한 거부감으로도 표출되는 듯했다. 취재자로서의 단단한 결의를 갖고 있지도 못한 내가 분노에 찬 후쿠시마 주민들의 인터뷰를 통역할 수 있을까? 그들은 마스크를 하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통역자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려고 할까? 아니 나는 마스크를 벗고 당당하게 그 모든 상황을 깊이 느낄 만큼의 각오가 있을까? 가장 큰 원인은 방사능이었지만, 감정은 훨씬 더 복합적이었고 원전 사고가 야기한 다양한 문제와 지역간 빈부간 분열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도쿄에서 살아가는 유학생이다. 후쿠시마에서 돌아온 뒤에도 저선량 피폭지대인 도쿄에서 매일 먹는 음식들을 조심하면서 조금씩 축적되고 있을 방사선량을 줄이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잠시 촬영하고 돌아가는 외국에서 온 활동가나 일본 서쪽에서 온 사람들과는 다른 상황이다. 그러나 활동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고 현지의 분위기를 직접 느끼고 싶었고, 그것을 한국에 전달하고 싶었다. 너무 망설인 탓인지, 후쿠시마의 현실이 새삼 느껴진 탓인지 한 이틀 앓았다. 신이 있다면 물어보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후쿠시마의 상황은 그냥 이대로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 누구도 해답을 모를 것이었다.
문득 나는 우리 모두가 신이 사라진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존의 신은 사라져 세계는 가벼워졌다. 그 대신 모든 미물들 하나하나가 무겁게 돌출되기 시작했다. 즉 기존의 윤리는 통용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끊임없는 혼돈과 질문 속에 있는 상황. 3월 11일 이후 피해지의 사람들과 ‘우리’들은 이미 없는 신에게 묻고 싶은 순간들을 수도 없이 맞이해 왔을 터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대체 어떻게 하면 ‘그날’을 정당하고 아름답게 ‘다시’ 살 수 있을까?

* 무엇이 ‘현장’인가? – 정당한 공포와 절실한 접속, 그 사이.

네가 만약 그곳에 간다면, 그 사실을 다른 친구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 집회의 성격을 단박에 깨달았던 것 같다. 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할 수 없고 갔다 온 사실을 비밀로 해야 하는 집회?! 후쿠시마 사람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고 그곳에 살았다는 것을 비밀로 하고 싶은 상황. 그렇다면 후쿠시마라는 ‘현장’에서 집회를 하기보다 단 하루라도 그들을 보다 안전한 다른 곳으로 불러낼 수는 없을까? 먹을 것과 숨쉬는 공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속에서 맺어진 단 하루의 인연들이, 자기 집의 빈방을 내놓고 일자리를 내놓고 마치 하룻밤에 지어진 집과 같은 피난처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그러한 기적같은 ‘현장’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까? 이것이 방사능이라는 상황 속에서 현장에 개입하고 접속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이처럼 방사능 오염이라는 상황은 기존의 활동방식을 새롭게 고민하도록 만든다. 노동현장에 끼어드는 지식인이라든가, 피해지를 향하는 볼란티어와는 다른 형태의 현장, 개입, 활동, 접속이 모색되어야 한다.
가지 못한다는 말을 어렵게 전한 뒤에도 어떤 선택을 했어야 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망설임과 질문 속에서 후쿠시마에서 하루 하루를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아주 조금이나마 리얼리티를 지닌 것으로 느끼게 된다. 동시에 내 속 깊이 있는 또 하나의 두려움과 만난다. 나는 도쿄에서 피해지를 생각하고 느끼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엔가 조금씩 무뎌지고 있기도 했다. 1년이라는 시간, 매일매일의 일상이란 그러한 것이었다. 이와 마차가지로 후쿠시마의 현민들도 방사능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형태도 없는 위험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건대 만약 내가 고리야마에 갔다면 마스크를 쓰고 전전긍긍하기 보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따라서 두려운 것은 방사선 자체뿐이 아니었다. 현장 속에 파묻혀 두려움조차 감지하지 못하게 될지 모르는 쉽게 감각의 약사 빠른 변화가 두려웠다.
한국에는 DMZ가 있다. 남북 사이를 가르면서 연결하지만 오랫동안 출입금지 상태가 지속되어 야생의 생태계가 살아있는 그곳 말이다. 들은 이야기이지만 막상 그곳에 가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저 아름다운 자연풍경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땅에는 지뢰가 묻혀 있고, 철조망이 쳐져 있고, 언제든 발포할 수 있는 팽팽한 대치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곳을 더 깊고 정확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현장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때때로 어떤 현장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위험이 숨어 있다. 혹은 현장이라는 위장 속에 진정한 현장이 숨어들어 있기도 하다. 방사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장효과가 극대화된 현장이다. 보이지 않는 위험이 청량한 녹색의 자연, 평범한 일상 곳곳에 농축되어 간다. 이처럼 인간은 살기 위해서 죽음에 익숙해져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갈 수도 있다. 방사선은 그러한 감각의 둔화를 강력하게 추동하는 현장이다.

2 조화를 든 어릿광대

2 조화를 든 어릿광대

따라서 “방사능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것 보다 중요한 것, 혹은 그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방사능에 대한 두려움을 정당하고 깊고 풍부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한 표현이 고립을 넘어 피난의 권리로 이어지고, 피난자에 대한 비난이나 차별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는 방법은 사실 옛부터 존재해왔다. 귀신, 유령, 소문, 이상한 몸을 지닌 아기, 등등. 그러나 이 방식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를 공동체 밖으로 내쫓는 것이 되었다. 실상 귀신, 유령, 소문, 이상한 몸을 지닌 아기들은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어떤 타자들과 만나는 순간들이다. 이 타자들과 만나는 순간들은 방사능과 함께 우리 곁에 바짝 다가와 있다. 방사능 문제가 여성이 장애인 아이를 낳을지 모른다는 것과 이어질 때, 장애인의 삶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할 때, 방사능 없는 삶 병 없이 삶이 불가능하며 그러한 타자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절박함이 몸 전체에 확 느껴지는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삶. 이 모든 것에 대한 정당한 공포와 이 공포를 벗어날 수 있는 절실한 접속, 그 사이의 부딪침. 이 부딪침의 순간들을 우리는 ‘현장’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곳이 후쿠시마이든 도쿄이든 미나미 소마이든, 서울이든…

* 도쿄의 3월 11일, 우리들의 풍부하고 모순된 ‘로지나’

‘후쿠시마에 간다/못 간다’는 망설임을 안은 채, 나는 도쿄에서 2012년 3월 11일을 맞이했다. 대신 나는 내가 ‘그날’을 겪었던 곳에서 또 다른 ‘그날’이 올 때 내가 누구를 의지할 수 있고 누구에게 의지가 될 지 생각해 보면서, ‘그날’을 어떻게 하면 잘 보낼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친척 중 사망자나 행방불명자가 있는 친구들은 성당이나 절에 묵도를 드리러 간다고 했고, 집회에 참석하겠다는 친구도 있었고, 집에서 가족과 조용해 있고 싶다는 친구 등등 각각이었다. 작년 지진, 쓰나미 원전 사고가 일어난 직후, 처음으로 접한 것은 피해지에 연락이 닿지 않는 가족을 둔 친구들의 고통이었다. 또한 내게 현실적인 공포였던 것은 방사능이었다. 도쿄의 방사능양이 가장 높았던 시기는 14일~17일 경으로, 공교롭게도 외출을 삼가 달라는 발표가 난 15일에 바로 친구들과 함께 하는 연구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방사능 속에서 굳이 만나야 하는가를 고민하다가, 연구회는 취소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행동방침을 정하기 위해서 가능한 사람이라도 만나기로 했다. 모인 인원은 많지 않았지만, 긴장되고 불안한 얼굴을 마주보면서, 그래도 만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어떤 천재지변이 일어나더라도 고립되지 않는 것의 중요성, 만남의 루트들을 만들어 놓는 것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다. 그게 내가 1년 동안 얻은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었다. 일상적이고 친근한 연결고리들이 ‘그날’들에 가장 중요한 안전망이 되어 줄 것이라는 믿음.
나는 연구회 친구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어떻게 그날을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지만 좀처럼 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저처럼 혼자서 안절부절하고 있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날 아침엔 성당이나 절에 가서 묵도를 하고 점심에는 탈원전 집회에 참여한 뒤, 오후에는 ‘인간의 쇠사슬’에 참여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거리, 절, 성당, 집회에서 만난 분들과 학교 근처 ‘로지나’에 모여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날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작년 이맘 때 로지나에 긴장된 얼굴로 마주 앉아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는 밖에 나가는 게 무서웠지만, 역시 만나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1년이 걸려 겨우 알게 된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고립되지 않는 것의 중요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함께 할 분은 연락 주세요” 함께 해준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재해로부터 1주기라는 고통과 무거움과 슬픔의 시간을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기쁨과 편안함과 강렬한 쾌락 속에서 보냈다. 다음은 이 모순되고 풍부한,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인 감정의 스크랩이다.

3 묵도의 순간

3 묵도의 순간

가장 처음 연락이 온 것은 타이완 문학을 전공하는 하시모토씨와 후쿠시마에서 유치원을 운영하는 가족을 둔 야마구치씨였다. 이날 일본 내에서는 후쿠시마와 도쿄 뿐 아니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바라키, 요코하마 등에서 전국적인 집회가 열렸지만 국외에서도 많은 집회가 열렸다. 타이완은 1만명, 독일은 2만명, 프랑스에서는 3만명 이상이 모였다고 전해진다. 야마구치씨는 도쿄 중심의 큰 절의 법요에 참여하고 집회에 합류하기로 했고, 나와 하시모토씨는 집회 모임 장소인 히비야 공원에 마련된 <Peace on Earth>라는 묵도 및 이야기장에 먼저 참석했다. 2시 46분. 위험하다고까지 느껴질 복잡하고 고요한 감정의 소용돌이. 모든 시간과 흐름이 정지했고 거리에서도 전철 안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일제히 묵도가 진행되었다. 3시 부터는 <3.11 도쿄 대행진-추도와 탈원전의 맹세를 새롭게- (3.11東京大行進= -追悼と脱原発への誓いを新たに-)>에 참여했고 친구들과 도중에 교류했다. 행진하면서 문득 문득 마주치는 친구들이 반가웠다.

4 No NUKE

4 No NUKE


6 휘날리는 반원전 신호들

6 휘날리는 반원전 신호들

이날은 1만 7천명 정도가 모였다고 전해지는데, 각 그룹 별로 표현방식이 달랐다. 선두인 콜 블록은 탈원전 깃발과 추도의 의미를 담은 흰꽃을 들고 심플한 스피치나 아지테이션(agitation)을 했다. 드럼 블록은 드럼 등 소리나는 것을 들고 모여 ‘분노의 드럼데모’를 했다. PR카 블록은 깃발을 들고 전통적인 아지테이션을 했고, 뮤직 블록은 3.11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이 블록에는 길거리 집회에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진다라무타(ジンタらムータ)와 Likkle Mai가 참여했다. 가족 블록에는 어린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이 참여했고 <아이들 오케스트라>와 <에너지 시프트 >가 참여했다. 이날 플랜카드에 가장 많이 등장한 말은 원전 재가동 중지였다.

10 가족 블록 = 여성과 아이들의 참여가 두드러지는 블록

10 가족 블록 = 여성과 아이들의 참여가 두드러지는 블록


11 음악 블록 - 밴드가 음악카를 이끌고 있다.

11 음악 블록 - 밴드가 음악카를 이끌고 있다.

집회대는 그대로 촛불을 들고 손을 맞잡아 국회 의사당을 둘러싸는 <인간의 쇠사슬> 퍼포먼스에 합류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두세 줄로 늘어서야 할 정도였다. 나는 어린 딸과 중학생 아들을 데리고 나온 독일인과 결혼한 일본 아줌마와 손을 잡았다. 5시 52분이었다. 촛불을 든 꼬마 여자애의 통통한 볼도 이뻤다. 갑자기 비가 뿌리거나 할 때마다 아이들을 먼저 지하도 속으로 피난하게 하는 모습들도 보기 좋았다. 재가동 반대 구호만이 울려퍼지자, 옆에서 “후쿠시마를 잊지 마라, 후쿠시마를 짓밟지 마라!”고 외치던 친구의 모습도 좋았다.

14 국회 앞 인간의 쇠사슬에서 만난 소녀친구

14 국회 앞 인간의 쇠사슬에서 만난 소녀친구


15 국회 앞 인간 쇠사슬에 점점 몰려드는 사람들.

15 국회 앞 인간 쇠사슬에 점점 몰려드는 사람들.


16 5시 52분, 탈원전과 피해지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다.

16 5시 52분, 탈원전과 피해지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다.

8시쯤 식당 겸 카페 “로지나”에는 5~6명이 모였다. 후쿠시마 출신 친구인 야마구치, 작년에 패닉이 된 기숙사 동료들을 끌고 단체로 오사카로 피난 갔었던 다케모토, 독일인으로 최근 방사능과 신체의 문제를 연구테마로 정했다는 로빈, 토치키현 출신 친구 등이 모였다. “이번 집회는 재가동이라는 구호가 중심이어서 후쿠시마 이야기가 빠진 것 같았어요.” “그렇죠? 재난 직후에는 모두 탈원전으로 합쳐진 것 같았는데 점차 각 지역별 입장별 차이들이 명확해져 가는 것 같아요. 이번엔 우익들의 참여도 두드러지네요.” “후후, 우익들은 너무 진지한 얼굴로 구호를 외친단 말야” “사람 수가 줄었다곤 하지만 가족 단위의 참여가 많아 좋았어요” “츠나미나 지진 피해지에서는 조용히 애도하는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어요. 집회같은 걸 하는 게 아니라.” “얼마 전 신간센을 타고 후쿠시마에 갔었는데 방사능이 높은 이이타테마을을 정차하지 않고 건네 띄었어요. 그렇게 마을 하나를 건네 띠고 마는 신간센의 속도는 어딘가 방사능과 닮은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국가가 마치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과 방사능이 마치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은 동일하지 않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방사능이 신체에 직접적이예요.” “아무래도 후쿠시마에서 도쿄로 오는 것과 도쿄에서 후쿠시마로 오는 건 달라요. 도쿄에서 후쿠시마로 와서 말하면 뭔가 벽 같은 게 생기지요” “방사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이를 낳을 때와 같은 순간에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나는 결혼하고 애 낳고 하는 건 경험이 없어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것 같아요. 근데요, 후쿠시마에 사는 철없는 동생에 이 와중에 결혼하겠다고 나서서… 정말이지… ”

5 재가동, 안될 말이다!

5 재가동, 안될 말이다!


7 스케이트 보더도 탈원전!

7 스케이트 보더도 탈원전!


13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일본에 있는 모든 원전을 모두 폐로로 하자고 외치는 것!

13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일본에 있는 모든 원전을 모두 폐로로 하자고 외치는 것!

로지나(Lowzina). 지구상 가장 오래된 국가라고 일컬어지는 초승달 모양의 우르(Ur)지방을 지칭하는 말이자,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재배해 온 아몬드로 만든 음식으로 맛과 향기와 식감이 조화를 훌륭하게 조화를 이룬 음식이다.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날에 먹는다. 2012년 3월 11일 “로지나”에서 먹은 음식들과 나눈 이야기들은 오래된 마을처럼 특별한 날의 음식처럼 모순되고 풍부한 맛과 말이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물론 이 음식들 속에는 방사능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날 로지나의 풍부하고 따뜻하고 모순된 시간들 속에서 겨우, 후쿠시마 고리야마에 갔어도 좋았을 것을… 그렇게까지 두려워하지 말았어도 좋았을 것을… 이라고 생각했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공기와 음식이 있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만남과 신뢰를 그 방사능 마을 속에서 경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처럼 망설임과 모순된 판단과 복잡한 감정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요동치는 곳, 이곳이 신이 사라진 날 이후 우리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순되고 풍부한 맛과 향을 지닌 로지나들이다.

* 후쿠시마의 생산자와 도쿄의 소비자, 그 연결고리

3월 11일을 전후해서 도쿄에서는 다양한 연구회, 집회, 영화 상영회가 기획되었다. 도쿄외대의 WINC에서는 3회 연속 기획을 마련했다. 4월 10일 코엔지 데모를 주도했던 <가난뱅이들의 반란> 마츠모토 하지메씨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 <민중소란의 역사인류학(民衆騒乱の歴史人留学)>이라는 책을 통해 19세기 파리의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생각하고 꿈꾸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되짚어 보는 시간, 세 번째로는 <재해 유토피아(A Paradise Built in Hell)>의 저자 Rebecca Solnit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 이러한 시간들을 통해 현재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집회와 데모가 지닌 예시적 봉기의 잠재성을 조명해 보려는 것이었다. 8일부터는 에너지 시프트(エネルギーシフト)에서 <영화를 통해서 원전을 생각한다>는 영화 상영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그러나 저선량 피폭 지대 도쿄, 방사능 수치가 높은 후쿠시마, 마을 주민의 많은 수가 목숨을 잃고 잔해만이 남은 피해지가 연결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또 얼마나 힘든 것일까?

12 데모대가 경제 산업성 앞 탈원전 텐트와 만났을 때!

12 데모대가 경제 산업성 앞 탈원전 텐트와 만났을 때!

3월 11일에 열린 고리야마시에 대한 보도를 보면, 후쿠시마 현지의 상황은 섣부른 낙관을 거부한다. 현 안에서의 갈등 뿐 아니라 가족 간의 분열과 갈등도 심화되고 있었다. 이날 집회는 기획자 대부분이 후쿠시마 현 출신으로 1만 6천명이 모였으며, 후쿠시마 현민의 소리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집회 순서 중에는 “현민의 호소”라는 섹션이 있어서 68명이 발언했다고 한다. <<도쿄신문>>의 보도 기사(3월 12일자, 24면) 에 실린 발언들을 그대로 번역해 본다. “피난지에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농가는 농업이 일인데,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작년 3월 15일에 여관의 방사선량은 44.7 마이크로시벨트였다. 이러한 고농도의 방사선에 촌민들을 방치해 둔 것은 누구인가!” “다양한 이벤트에 초대되었지만 배려나 친절함이 도리어 피해자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해서 괴로웠다. 간바레(힘내라)! 라는 말도 싫었다.(17세)” “제 2차 대전 종전 후 중국 대륙을 걸어서 도망쳤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원전사고의 피난은 도보가 차로 바뀌었을 뿐이다. 어떤 시대건 국책으로 고통을 당하고 슬픔을 강요당하는 것은 죄없는 민중이다.(72세, 가설주택 피난자)” “일본의 모든 원전을 돌면서 이곳에 도착하여 원전의 무서움이 몸에 깊이 새겨졌다. 원전 에너지를 전환하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일본 원전을 돌고 있는 도쿄의 한 승려)” 후쿠시마나 동북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곳은 농사를 짓지 않고서는 마을이 복귀되지 않는다. 농사는 단순한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삶의 리듬 마을의 순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쿄에서는 후쿠시마나 동북 지방에서 생산된 쌀을 사먹지 않는다. 과연 도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집회와 데모와 교감의 순간들은 피해지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17 17일 히토츠바시 앞 타마워크 모습, 여성과 아이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17 17일 히토츠바시 앞 타마워크 모습, 여성과 아이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3월 17일에는 작년 6월에 이어 <티치인(teach in) 히토츠바시>가 개최되었다. 히토츠바시가 있는 타마 지구의 데모와 함께 <재난 원전 사고 1주기 토론집회 – 피해지/피난자와 함께 산다(災難・原発事故1周年討論集会ー被災地/避難者とともに生きる)>라는 집회였다. 이날의 집회에서 우카이 사토시는 후쿠시마의 소비자와 도쿄의 생산자를 연결시킬 수 있는가, 도쿄에 피난온 사람들 그리고 피해지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집회를 시작했다. 1부는 독립미디어 <OurPlanetTV>의 시라이시(白石草)씨가 <영상을 통해 1년을 되돌아 본다-OurPlanetTV송신영상을 중심으로(映像を通じて1年を振り返るーOurPlanetTV 配信映像を中心に)라는 제목으로 1년간 촬영한 필름을 보여주었다. 그는 3월 11일을 각자 어떻게 지냈는지 찍어 보내 달라는 캠페인을 했는데 그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카메라를 들이대자, 여태껏 아무말도 하지 않았던 자신의 아버지가 갑자기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고 전해준 사람의 이야기였다고 했다. 또한 방사선량이 너무나 높은 이이타테 마을 주민들은 저널리스트들이 와서 생활을 찍어주면 다시 살아갈 기분이 생겼다고 말했다고 한다. 시라이시씨는 기록하고 기억하고 알리는 것의 중요성을 이런 말들을 통해서 느꼈다고 하면서 오래 살아서, 정말 오래 살아서 이런 말들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후쿠시마현 미하루마치(福島県三春町) 주민 마시코 리카(増子理香)씨는 작년 5월부터 히토츠바시가 대학이 있는 쿠니타치에 피난해서 살면서 <연결하자! 방사선에서 피난해 온 마마넷@도쿄(つながろう!放射線から避難したママネット@東京)>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12년 3월 12일에는 데모하러 갈 힘조차 없어 피난해 온 7가족 20명과 함께 있었다고 한다. 2시 46분, 묵도를 할 때에는 분노도 슬픔도 고통도 아닌 그 뭐라고 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와 모두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자신들에게 2012년 3월 11일은 변한 것이 전혀 없는 일년 전을 어제와 오늘처럼 연결하는 날이며 끝이 없고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작년에 정부가 방사능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아 피폭피해가 심각해 졌다고 이야기하면서, 피난 온 자신들을 비난하지 말고 “피난해 와서 잘했다”라고 말해주길 당부했다. 그녀의 가계는 후쿠시마에서 4대째 농사를 지어왔고 현재 남편은 후쿠시마에 남아 있다고 했다. 그녀는 도쿄 출신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도쿄로 피난가겠다고 했을 때 도쿄에서 온 며느리라는 면이 부각되고 비난도 받았다고 했다. 올해 설날에 후쿠시마에 갔었는데, 검사조차 하지 않은 마을 우물물로 지은 밥을 아이들에게 먹일 수 없어서 페트 병 물로 밥을 다시 지었다고 했다. 그 모든 것이 악몽 같았다고 한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후쿠시마에 남아있는 친구들이 있고 어떤 집은 외제산 캔식품으로 연명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매일 매일 이렇게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가끔씩은 생각해 달라고 당부했다.
히토츠바시 대학원생으로 이번 츠나미로 큰 피해를 입은 미나미 소마 출신인 야마우치 아케미(山内明美, 『어린이 동북학(こども東北学)』저자.)는 자신의 집은 대대로 농사를 짓고 소를 키워왔고 부모님은 늘 ‘우리집은 먹는 것과 사는 것이 하나다’라고 말해왔다고 했다. 남동생이 영농 후계자로 기대를 모아 왔는데, 몇 년 전 광우병으로 타격을 입고 작년에 다시 방사능으로 타격을 입어 농업을 그만두고 원전에 일하러 가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동북 지방의 농업 문제는 이번 재해 이전부터 존재해 온 심각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18 17일 히토츠바시에서 열린 집회 모습, 주민 특히 여성과 아이들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18 17일 히토츠바시에서 열린 집회 모습, 주민 특히 여성과 아이들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38년간 유기농식품점『아히루의 집(あひるの家)』을 운영하고 있는 가노(狩野強)씨의 발언이었다. 그는 잠시라도 쿠니타치에 피난해 와 있는 피난자들이 이곳을 좋은 곳으로 느낄 수 있도록 활동하면서 후쿠시마의 농산물 중 방사능이 검출되지 않은 생산물과 도쿄를 연결시키는 활동도 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중계하고 있는 후쿠시마 농가의 호소문은 점차 그 내용이 절박해져 가고 있다고 한다. 수확 전에도 출하 전에도 방사능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해도 후쿠시마산 쌀이 거부당한다는 것이다. 절박해진 후쿠시마 농가에서는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보내고 있다. “후쿠시마에서 발전한 전기는 우리 지역에서는 쓰지 않고 모두 관동지방 및 수도권으로 송전됩니다. 수도권 사람들은 그 전력으로 쾌적한 생활을 영위해 왔던 것입니다. 어떤 혜택도 받지 못했던 우리들이 왜, 방사능 오염과 품평 피해라는 이중의 고통을 맛봐야 하는 것입니까?” 이 문구를 읽은 <아히루의 집(あひるの家)> 점원은 울면서 자신도 후쿠시마 유기농 농가를 응원하고 싶지만, 1살 짜리 아이가 있어서 후쿠시마 쌀을 살 수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가노씨는 이처럼 후쿠시마의 생산자도 도쿄의 소비자도 모두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더구나 최근에는 생산지가 후쿠시마산임에도 다른 지역으로 속여 파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각각이 처해 있는 절실함들은 연결고리들은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말 속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19 갓난아기와 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수유실 겸 아이들 휴게실

19 갓난아기와 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수유실 겸 아이들 휴게실

이 날에는 100명 가량의 쿠니타치와 타마지구 주민들이 참여해 의견을 나누었다. 아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바깥에는 수유실을 임시로 만들기도 했다. 이날의 집회는 연결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 얼마나 함께 고통을 받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자리였다고 생각한다. 후쿠시마 생산물을 먹어야 한다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장소가 아니라, 피해지와 피난자들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로 느낄 수 있는 폭이 넓어지는 시간이었다. 사는 것과 먹는 것, 피해지역과 피해지역이 아닌 곳, 고립의 고통과 연결의 기쁨. 이것들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서로가 놓여져 있다.

* 모순되고 격렬하고 풍부한 감정 속에서.

2011년 3월 11일 이후 1년이 흘렀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그 날들을 살아가고 있다. 사망자는 1만 5854명, 행방불명 3155명, 피난생활 34만인. 후쿠시마의 50%가 가족과 떨어져서 산다. 후쿠시마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들을 잊지 말아 주세요” 동북지방의 쓰나미와 지진 피해지의 사람들은 말한다. “부흥”이 이야기되지만 그것은 원래의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원래의 생활도 고통스러웠다. 이 와중에 도쿄 전력은 원전 수습작업에 동원된 원전 노동자들의 마스크를 얇은 필터로 교체했다. 작업원들의 부담을 줄이고 호흡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대지만 실은 비용절감을 위해서라고 노동자들은 분노한다. 원전 사고지역에서 1년간 지속된 보수 작업 때문에 원전 노동자들의 피폭량은 이미 규정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다고 한다. (「マスク軽装化不安」『東京新聞』2011年3月14日、29면)
이런 상황 속에서 앞으로 계속될 이 3월 11일이라는 “그날들”을 과연 정당하고 아름답게 다시 살아갈 수는 있을까? 감히 “아름답게”라는 말을 ‘정당하게’라는 말에 끼워 넣어 보았다. 나는 상황이 얼마나 악화되어 가는가 보다,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마음이 움직이는지에 관심이 있다. 후쿠시마의 상황을 생각하고 그곳에 가지 않았던 것을 계속 생각하면서 내 마음이 이곳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곳을 느끼기를 멈추지 않길 바라게 된다. WINC에 코멘트를 하러 나온 사토 이즈미는 “재해 유토피아”라는 말은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느끼게 된 우리들의 새로운 감각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홍성담의 글을 인용한다. 1980년 광주에서 끝까지 버텼던 것은 짜장면을 배달하던 가난하고 젊은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1980년 광주의 저항 속에서 처음으로 존엄을 지닌 인간으로 대우받는 경험을 했고 따라서 그들은 지도자들이 모두 도망간 순간에도 자신들이 만든 자치적인 시공간을 지키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홍성담은 “그 순간 우리들은 진정으로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9 탈원전 기호로 合이라는 한자를 만들어 표현.

9 탈원전 기호로 合이라는 한자를 만들어 표현.

2011년 3월 11일, 그날 이후 우리들은 풍부하고 모순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산다. 하루에도 몇 번씩 두려움과 불안은 분노와 신뢰로 뒤바뀌고, 슬픔과 고통은 기쁨과 쾌락으로 뒤바뀐다. 아니, 불안과 두려움 속에 연결되고자 하는 절실함이 싹트고, 슬픔과 고통 속에 희망과 기쁨의 빛이 저 깊숙이에서 반짝하는 것을 느낀다. 신이 사라진 그날 이후, 풍부하게 두려워하고 풍부하게 슬퍼하며 풍부하게 고통스러워하고 풍부하게 기뻐한다. 신이 사라진 상황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무엇인가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20 다큐 311 배너 사진 츌처ㅣ http://docs311.jp

20 다큐 311 배너 사진 츌처ㅣ http://docs311.jp

또한 그날 이후, 우리는 현장, 당사자와 같은 말들을 아주 새로운 것으로 경험하고 있다. 쓰나미와 지진이라는 엄청난 재난과 방사능이라는 대처 불가능한 재해는 어디까지가 현장이고 어디까지가 현장이 아니며, 누가 당사자인가를 뒤섞어 놓았다. <3.11>이라는 다큐멘터리는 4명의 다큐촬영감독이 원전 사고 직후 후쿠시마와 피해지를 촬영하러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4명의 다큐감독이 ‘현장’인 후쿠시마에 가서 ‘당사자’인 후쿠시마인들을 찍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점차 방사능의 공포에 무기력해지는 자신들을 보게 된다. 우주복처럼 완전 무장을 하고 원전 20킬로미터 근처에 가던 중 자동차 바퀴가 펑크가 나자, 그들의 공포는 극에 달한다. 후쿠시마라는 현장을 촬영하러 간 그들의 카메라에 담긴 것은 후쿠시마도 후쿠시마 현민도 아니라, 공포에 질린 자신들, 어느 사이엔가 당사자가 된 그들 자신들의 모습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폐허의 그곳, 카메라에 찍힌 그곳은 오히려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아름답게 노을져 있다. 이 아름다운 자연 속의 공포, 알 수 없는 초록의 우주, 신이 사라진 순간 등장한 이 새로운 현장 앞에 새로운 당사자들인 우리가 서 있다.
자본주의와 국가의 종말을 생각해 보면 너무나 아득해서 현실적이지 않다. 따라서 차라리 자본주의나 국가나 차별이 없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될 때가 있다. 방사능을 없애려면 수많은 사람들이 피폭 노동에 시달려야 한다. 그러나 누군가 수습하지 않으면 방사능은 점차 더 확산되어 갈 것이다. 국가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듯 방사능이 없는 듯이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방사능을 의식하고 잊지 않고 조심하면서도 “마치” 방사능이 없는 듯이 살아갈 수는 없을까? 신이 없어진 기회에 신 없이 살아갈 수는 없을까? 병과 함께 살고 편견을 안고 사랑하며 울며 웃고 두려워하며 저항하고 분노하며 연대하고 망각하며 기억하는 것, 모순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윤리와 아름다움을 추출해 낼 수 있을까? 2011년 3월 11일로부터 1년이 지난 요즘, 우리들은 이러한 모순된, 강렬한, 풍부한 현장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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