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의 뒷골목

노예제 (1): “번식”되는 인간

- Beilang(동아시아사상사연구자, 뉴욕이타카)

린칭과 같은 날폭력이던 생체실험이나 단종과 같은 과학의 이름을 빈 매개폭력이던 이런 행위들이 큰 저항 없이 행해져 온 배경에는 ‘노예제’라는 미국의 원죄의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또 하나의 원죄는 원주민 대규모 학살인데 참 원죄가 둘씩이나 되는 나라가 미국이다.) 노예제라는 폭력에 기초한 비인간적 제도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원초적 경제기반이었을 뿐만 아니라 패권주의와 인종차별주의 등 미국이 안팎으로 드리우고 있는 그늘의 원형적 실천이자 근거이기도 하다. 근대국가로서의 미국이라는 나라의 근간이자 그 폭력성의 뿌리인 노예제는 미국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성장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역사적 제도이며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규명하는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노예제 같은 역사의 치부는 오랫동안 미국인들의 오랫동안 주변부 기억으로 밀려나 있다가 60년대의 민권운동의 영향으로 인종적 소수자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역사의 일부로 정당한 위치를 찾기 시작하고 미국사회의 진보적 세력의 꾸준한 노력으로 집단기억 속에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이런 공식적 기억으로의 편입을 계기로 과거의 비극을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아닌 정리된 과거로 치부해버리려는 반동적 흐름도 강하게 등장하게 된다. 물론 현재가 그림자 드린 과거로부터 완전히 단절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지난 호에서 다룬 린칭은 물론 생체실험이나 단종과 같은 근대적, 과학에 입각한 폭력조차도 노예제 아래서 노예들에게 가해졌던 폭력의 연장이자 변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과거는 현재와 이런 식으로 복잡한 단절과 연결의 역학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손쉽게 정리되고 청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반대하는 흑백 통합 모임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마틴 루터 킹을 ‘빨갱이’로 지목한 미국 수꼴들의 선전 빌보드. 민권운동 초기인 1957년 남부 전역에 세워졌다. 이런 논리를 확장하면 노예제 비판하는 놈은 빨갱이라는 논리가 된다.

자신들이 반대하는 흑백 통합 모임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마틴 루터 킹을 ‘빨갱이’로 지목한 미국 수꼴들의 선전 빌보드. 민권운동 초기인 1957년 남부 전역에 세워졌다. 이런 논리를 확장하면 노예제 비판하는 놈은 빨갱이라는 논리가 된다.

사실(史實)에 대한 해석은 물론이거니와 그 사실 자체에 대한 이해조차도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인해 변하기도 한다. 노예제의 경우 페미니즘 역사학의 등장으로 젠더에 초점을 맞추고 여성노예들의 경험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연구들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여성주의 시각으로 본 노예제 연구는 이제까지 잘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을 조명하여 ‘노예 번식(slave breeding)’과 같이 여성의 시각에서 보는 노예제의 모습을 보여준다. 몇 회에 걸쳐 노예제의 문화적 측면 그리고 미국역사에서 어떻게 노예제의 의미가 소거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노예제는 인간을 재산으로 취급해 사고팔면서 그들의 노동력을 보상 없이 강제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을 물건으로 매매하고 강제노역을 통해 이득을 착취하는 구조인데 이는 필수적으로 노예의 지속적 공급을 요구한다. 대서양을 통한 국제 노예무역이 수요를 충당하고 노예들 스스로의 출산이 그것을 보충하던 구조에서 18세기 중반부터 이 무역에 제동이 걸리면서 노예무역을 통한 공급이 줄어들고 결국 영국과 미국은 각각 1807년과 1808년에 노예무역을 불법화하면서 공식적인 노예무역은 끝이 난다. 여기에 ‘서부개척’이라는 영토의 확장과 맞물려 노예 수요가 증가하면서 ‘노예 번식’은 아주 이윤이 큰 매력적인 사업으로 등장하게 된다.

대서양을 중심으로 한 삼각무역도.

대서양을 중심으로 한 삼각무역도.

여기서 노예제가 가진 젠더의 측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여성노예들을 남성노예와 동일한 노동을 강요받으면서도 여기에 더해 가능한 한 많은 노예를 재생산하라는 이중의 노동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이 부가된 의무는 여성노예의 성이 철저히 노예주의 통제에 놓이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실제로 잡혀와 노예선에 실리는 순간부터 여성노예는 다른 취급을 받았다. 남성노예가 사슬에 묶여 강제노동에 시달린 반면 여성노예는 사슬이 묶이지 않는 대신 선원들의 성적 노리개가 되는 것으로 예속을 삶을 시작한다. 긴 항해가 끝나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경매에 붙여지는데 이때 “상품”을 검사한다는 명목으로 노예들은 옷이 벗겨지고 낙인이 찍히고 잠재 구매자들의 “검수”의 손길에 몸을 맡기게 된다.

경매 시장에서 옷이 벗겨진 체 팔려가기를 기다리는 노예들.

경매 시장에서 옷이 벗겨진 체 팔려가기를 기다리는 노예들.

남성의 경우는 노동력이 있느냐가 가장 큰 구매의 요인이지만 여성의 경우는 점점 더 얼마나 많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가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결정하게 되면서 여성노예의 성적 통제와 굴욕은 도를 더해 가게 된다. 농업의 생산력이 떨어진 주들에서는 아예 농업보다 노예를 팔아 더 큰 소득을 올리기도 했으며 더욱 어떻게 하면 여성노예들로부터 더 많은 아이를 얻을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정보를 교환했다. 이렇게 여성노예의 재생산 능력이 중요해지자 가임기 여성노예는 물론 여자아이들도 덩달아 가치가 상승하고 불임 여성노예를 속여 파는 사기도 횡행하게 된다. 속고 산 사람이 다시 속여 파는 악순환이 계속되자 판매자가 의도적으로 속여 판 경우에는 환불을 해주도록 하는 규정이 생겨나기도 했다.

여기서 노예번식의 원리는 우리가 가축을 키우며 최대한 많은 새끼를 낳도록 하여 경제적 이득을 최대화하는 것과 동일하다. 지금의 가축 인공수정 기술이 있었으면 확실히 그런 방법을 썼겠지만 그 외의 상상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강간을 사주하거나 여러 명의 남성노예를 성적 파트너로 만드는 등의 방법을 통해 여성노예를 임신시켰다. 이 과정에서 “종마” 노릇을 하는 건강한 남자 노예를 사거나 빌려 오기도 했고 이런 돈도 아까운 이들은 노예주 자신이 직접 종마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어린 남녀 노예 여럿을 곳간 같은 곳에 나오지 못하게 가둬 놓고 “교배”를 유도하기도 하였다. “13살 이상의 어린 남녀 노예 아이들 여럿을 발가벗겨 큰 헛간에 하룻밤을 가두었더니 얘가 여섯이나 생겼다“고 자랑하는 증언도 남아있다.

노예는 법적으로 가축과 같은 존재로 취급되었기에 강간을 비롯한 어떤 취급에 대해서도 아무런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었고 노예여성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신분은 모계를 따른 다는 법 때문에 노예주를 아버지로 둔 경우조차도 아무런 공식적 인정이나 보호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노예엄마는 자식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행사할 수 없었기에 간난아이마저 언제든지 노예주의 뜻에 따라 팔려 나갔다. 노예주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 대해서조차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어서 예를 들면 죽으면서 앞으로 태어날 특정 노예의 자식의 하나는 아들에게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손녀에게 상속한다는 식의 노예주의 유언이 남아있다.

부부와 그들의 간난아이가 각기 다른 곳으로 팔려가는 노예시장 광경을 묘사한 삽화. 노예들은 종종 말이나 다른 가축들과 같이 광고되고 팔려 나갔다.

부부와 그들의 간난아이가 각기 다른 곳으로 팔려가는 노예시장 광경을 묘사한 삽화. 노예들은 종종 말이나 다른 가축들과 같이 광고되고 팔려 나갔다.

여성 노예들은 노예주의 성적 노리개가 되고 노예주의 어린 자식들의 성적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성적 도구로 전락한다. 노예들을 짐승으로 취급해 “번식”시켜 팔아먹고 애비와 자식이 같은 노예를 범하고 그렇게 낳은 자신의 자식이나 이복 형제자매를 팔아먹거나 다시 강간하는 패륜행위들은 노예제’라 불리는 제도 아래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미시시피에서 태어나 살며 남부를 자신의 소설의 배경으로 삼았던 윌리엄 포크너(1897-1962)의 소설에서 폭력과 강간 그리고 근친상간이 강박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런 실제적 근거를 가진 것으로 그는 노예에게서 태어난 자신의 딸을 노예주가 다시 범하는 근친상간의 모티프를 여러 작품에서 반복하고 있다. (그는 말년에 민권운동을 열렬히 지지하고 흑백통합에 찬성했으면서도 자신의 정신적 고향인 남부에 대한 북부의 강압적 태도에 불편함을 느끼고 단계적 통합을 주장하다 마틴 루터 킹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백인 남성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젊은 여성노예를 팔고 사는 별도의 성노예 시장도 등장했는데 여기서는 특히 백인의 피가 섞인 혼혈 노예가 인기를 끌었기에 노예주와 여성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여자노예들은 보통 다른 노예들보다 비싼 값에 팔려 나갔다. 롱펠로우(1807-1882)는 <노예제에 대한 시들>에 실린 “혼혈소녀(The Quadroon Girl)”라는 시에서 어느 달이 뜬 밤 “자신의 열정이 생명을 부여했고 그의 피가 몸 안에 흐르는” 자신의 딸을 “천국에서 죄악의 세계로 부는 듯한 바람”이 이는 그의 농장에서 배를 대고 기다리는 노예상에게 넘기는 장면을 가슴 서늘하게 묘사하고 있다.

임신한 여성노예들에게는 심한 체벌이나 야외노동을 면제시켜주는 등 어느 정도의 혜택이 주어지기도 했다. 체벌을 가할 때는 땅에 구멍을 파고 그 위에 엎드리게 하고 채찍질을 해서 태아에게 해가 덜 가도록 하는 것도 임산부 노예들을 위한 배려의 하나였다. 물론 이런 배려는 농장주가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는 자산을 보호하는 방편이었지 임산부와 태아에 대한 인간적 배려가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여성노예들이 이런 폭력에 아무런 저항 없이 순종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미약할망정 그들은 그들이 가진 역량 안에서 이런 성적 폭력에 저항해왔다. 하나의 방법은 그런 성적 접촉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이런 적극적 저항의 대한 대가는 혹독했다. 팔려가지 않으면 채찍질, 달군 인두로 낙인찍기, 신체의 일부 절단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고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좀 더 소극적 저항으로는 피임의 효과가 있다고 믿는 특정 약초나 뿌리, 열매 등을 먹어 임신을 피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신이 되는 경우는 스스로 혹은 노예산파의 도움을 받아 낙태를 유도하는 것으로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거나 질 속으로 헝겊 같은 것을 밀어 넣는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낙태를 시도했다고 전해진다. 영아살해와 같은 극단적인 저항도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어느 정도 널리 행해졌는지는 확인하기 어렵고 많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영아살해로 추정된 경우는 노예주로부터 자신의 사유물을 훼손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던가 아니면 다른 법적인 처벌을 감수해야 했다.)

(계속)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