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몰락으로의 초대

- 윤여일(수유너머R)

어긋남

사쿠라이 다이조 씨의 텐트연극과는 번번이 엇갈렸다.

2007과 2008년, 나는 도쿄에서 생활했다. 그동안 그의 텐트연극을 보러갈 기회가 있었지만 공연이 잡힌 날에 멕시코로 떠날 일이 생겼다. 사쿠라이 씨와는 종종 만났고 지인들로부터 그의 연극에 관해 전해 들었고 연습하는 장면을 보러가기도 했으며, 그가 쓴 대본도 읽었다. 하지만 정작 공연은 본 적이 없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인 2009년, 사쿠라이 씨로부터 중국의 연구자들과 함께 대본을 만들러 베이징에 간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작업을 지켜보고 싶어 급하게 베이징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러나 떠나기 이틀 전 그는 딸이 병원에 입원해 못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는 수 없이 그와의 만남을 미뤄둔 채 베이징에 도착한 후 루쉰의 흔적을 좇아 사오싱과 상하이 등지로 동선을 옮겼다.

2010년, 미얀마를 여행하던 중 그가 타이베이에서 공연을 한다기에 서둘러 배낭을 정리했다. 타이베이에 있는 그의 숙소에 일주일 간 머물며 단원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들은 전업배우가 아니었다. 요리사, 편집자, 교수 등 생업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모여 ‘자주연습’을 했다. 완성된 대사를 몸에 익힐 뿐 아니라 배우가 자기 감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면 그 표현을 사쿠라이 씨가 잡아서 정착시켰다. 매일 밤 숙소로 돌아오면 사쿠라이 씨는 그 표현들로 희곡을 다시 작성했다. 그 모습을 곁에서 보았지만 결국 공연일 전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2011년, 사쿠라이 씨와 그들의 일행이 광주와 서울에서 공연 계획을 세웠다. 나와 동료들도 돕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3․11이 발생했다. 공연 계획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망설임

그러나 이런 회고에는 솔직하지 못한 구석이 있다. 내가 텐트연극과 만나지 못한 게 일정 탓만은 아니었다. 멕시코 여행이야 날을 옮길 수 있었고 타이베이에서 돌아오는 날은 늦출 수 있었다. 나는 텐트연극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동시에 보는 일을 겪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막바지에 이르면 번번이 볼 수 없는 조건을 만들었다.

사쿠라이 씨의 대본을 읽어봐도 텐트연극을 접한 남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거기에는 분명히 강렬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강렬함인 것 같았다. 강렬한 체험이야 추구하는 바이나 때로 어떤 체험은 칼에 배는 일과 같다. 상처는 아물어도 상처자국이 남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내가 아는 재일조선인 연구자가 있다. 시인 이상의 전집을 일본어로 옮겼으며 두 세 걸음만에 본질에 가닿을 수 있는 감수성과 사고력을 갖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만난 그는 극단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연기를 하며 그가 변신해가는 모습은 놀라웠다. 그러나 그런 변화가 내게도 찾아온다면 그건 두려웠다.

벌써 오래전 일이다.

2004년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 등의 일행이 65일에 걸쳐 삼보일배로 새만금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마지막 날 삼보일배에 참가했다. 아스팔트 위로 달궈진 공기는 메케했다. 세 걸음 걷고 몸을 낮춰 바닥에 깔린 공기를 마셨다. 비록 하루였지만 같은 동작으로 더러운 공기를 줄곧 폐 안으로 들이키는 동안 어떤 감정이 고였다.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해 한 달 뒤 어느 환경운동단체가 전국에 새만금 문제를 알리러 자전거로 행진한다기에 따라 나섰다. 이번에는 거꾸로 서울에서 새만금으로 향하는 열흘간의 일정이었다.

국도를 달리는 자전거 위는 삼보일배보다 경쾌했고 공기도 맑았다. 하지만 “생명을 살리자”라는 구호를 며칠이고 외치자니 고여 있던 감정은 안에서 응어리가 되는 듯했다. 결국 새만금에 도착하기 하루 전 완주를 포기했다. 그런 심정으로 새만금에 도착해 안의 응어리를 바깥으로 토해내 실체를 확인해버리면 서울로 돌아가기가 힘들 것 같았다. 서울로 돌아가더라도 일상감각이 바뀔 것 같았다. 주체하지 못할 변화로부터 나를 지켜내고자 중도에 포기했던 것이다.

텐트연극도 그러했다. 사쿠라이 씨의 텐트연극을 경험한 사람들로부터 그것이 ‘세다’는 말을 들을수록 보러가기가 망설여졌다. 당시 나는 비약을 범하지 않고 사고의 절차를 구체화하여 사물을 읽어내는 민감함을 길러야 하는 단계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섣불리 ‘예술의 정치’를 경험했다가는 자칫 그 길에서 탈선할까봐 두려웠다.

텐트를 짊어지고 전전하다

사쿠라이 씨는 ‘텐트연극’을 한다. 통상 한 편의 연극은 극장에서 반복 상연되지만, 그는 한 편의 연극을 공연하기 위해 한 장소에 텐트를 세우고 한 차례의 공연이 끝나면 텐트를 걷고 떠난다. 그렇게 매해 새로운 연극을 만들어 사용하고 버린다. 두 번 다시 그 연기를 하지 않기 위해 수개월을 준비하여 온 정렬로 단 한 번의 연기를 한다. 뱀이 허물을 벗듯이. 어쩌면 허물도 뱀도 아닌 변신만이 ‘텐트연극’의 본질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텐트연극은 늘 모종의 정치성을 산출한다는 점에서 일관되기도 하다. 텐트연극은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일본사회에 번져갔던 ‘정치의 계절’의 산물이다. 1960년대 말 전공투로 상징되는 과격한 학생운동은 정점으로 치달았고, 1970년대 초에는 반일무장전선이 미쓰비시중공의 빌딩을 폭파했다. 그 이후 사회운동의 괴멸을 염두한다면 당시는 일본이 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에서 미국의 패전국이자 반식민지로, 그리고 다시 세계의 첨단 소비자본주의 국가로 재편되는 변곡점에 있던 시기였다.

그 시기 와세다대학을 중퇴한 사쿠라이 씨는 1973년에 극단 ‘곡마관’을 창설해 텐트를 짊어지고 일본 각지로 여행을 다녔다. 오키나와로 홋카이도로 촌구석으로 피차별부락으로 부두가 공사판으로 인력시장으로 그렇게 하층으로 하층으로 전전했다. 그는 여행에 몸을 맡겨 도쿄 생활 그리고 소비사회로부터 도망쳤다. 그러던 중에 자신이 짊어진 텐트는 바리게이트가 아닌지, 오히려 자신은 도망치면서 일본의 소비사회를 포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그는 이를 ‘역포위’라고 불렀다.

어떤 가설(假說)의 가설(假設)

사쿠라이 씨에게 텐트는 극장의 대용물이 아니다. 그는 텐트연극에 관한 가설을 갖고 있다. 그는 텐트의 얇은 천 한 장으로 현실공간의 일부를 잘라내 거기에 함몰을 만든다. 그 함몰 속의 공연으로 바깥 현실을 허구화한다. 텐트 속에서 시간의 서열은 뒤바뀌고 공간은 엿가락처럼 늘어나거나 뒤틀리고 가로였던 세계는 세로로 세워진다. 기성의 논리가 전복된다. 이게 텐트연극에 관한 그의 가설이다. 그래서 그의 연극은 부조리극이다. 그러나 그가 텐트 안에서 부조리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까닭은 텐트의 바깥 세계, 소비자본주의야말로 인간의 결핍을 소비로 메우는 부조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텐트를 세워 부조리를 두고 소비자본주의와 쟁탈전을 벌인다.

그는 현대사회에 잠복해 있는 문제들을 날카롭게 낚아채 텐트라는 부조리의 장소에서 가시화시킨다. 하지만 텐트는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기 이전에 그 속에서 새로운 집단성이 발생하는 장(場)이다. 사쿠라이 씨는 텐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자의식을 위기에 빠뜨린다. 배우는 배역을 충실하게 소화하고 관객은 그것을 감상하는 식이 아니다. 그는 한 개인의 자의식이 뛰쳐나가 타자의 기억과 결합하고 서로의 의식이, 일인칭과 삼인칭이 뒤섞여 마치 플라스마(plasma) 상태가 될 때 새로운 집단성이 출현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배우를 ‘번역자’라고 부른다.

배우는 대사를 그대로 옮기는 존재가 아니다. 대본에 적힌 하나의 말을 복수화(複數化)한다. 그러면 배우들은 서로 오독한다. 그러면 관객들도 자신의 독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자의식은 점차 들썩들썩 주체에게서 떠나 타자와 뒤섞이려는 조짐을 보인다. 이윽고 배우와 관객의 오독들이 교착하고 흘러넘치면 텐트는 하나의 줄거리로 이끌어가려는 구심력과 오독들이 낳는 원심력이 함께 작용해 신축적이 된다. 텐트는 하나의 생명처럼 부풀어 오르고 또 오그라든다. 거기서 새로운 집단성이 출현하며, 거기서 사쿠라이씨는 ‘정치의 원점’을 발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설(假說)의 가설(假設)이 텐트인 것이다.

역사는 연소되어 기억으로 떠돈다

작년에 사쿠라이 씨는 동료들과 함께 서울에 텐트를 세우기로 했지만 3․11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리고 1년 만에, 3․11의 1주년에서 한 달 뒤인 4월 11일에 광화문에 텐트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 1년을 거치는 동안 시나리오는 크게 바뀌었다. 이번 공연에는 후쿠시마가 등장한다.

이번 공연은 사쿠라이 씨만의 공연이 아니다. 그의 극단 ‘야전의 달’과 함께 이케우치 분페이 씨 등이 활동하는 ‘독화성’이 연출을 맡았다. 시나리오는 이케우치 분페이 씨가 작성했다. 그리고 주로 일본에서 텐트연극을 하는 그들은 한국의 마당극단 ‘신명’과 만난다. ‘신명’은 광주에서 30년간 마당을 펼쳐왔다. 따라서 그들의 만남은 마당과 텐트의 만남이자 서로가 각기 축적해온 수 십 년‘들’의 만남이다.

그런데 그들의 만남은 좀 더 오래된 연원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의 출현에 앞서 그들의 만남이 먼저 존재했는지 모른다. ‘야전의 달’처럼 ‘독화성’도 1982년에 결성된 ‘바람의 여단’의 후신이다. 사쿠라이 씨를 비롯한 ‘바람의 여단’의 주요 멤버는 1980년 광주를 현장에서 겪었다. ‘야전의 달’과 ‘독화성’은 그 기원에 광주의 체험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들은 텐트를 짊어지고 전전하며 텐트를 매개해 광주의 기억을 일본으로 들이고자 했다. 그처럼 ‘야전의 달’과 ‘독화성’은 멀어져가는 광주를 쥐고 있었기에 광주라는 흙에서 자라난 ‘신명’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 그들은 함께 「들불」을 지핀다. 작품 「들불」은 기억으로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다. 그 여행은 멀리 거슬러 올라가 1948년 팔레스타인에 이른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시간이 1980년 광주와 겹쳐지며, 광주의 시간은 다시 2011년 후쿠시마와 포개진다. 이처럼 격리된/되었던/될 땅인 팔레스타인, 광주, 후쿠시마가 서로를 부르자 반세기의 역사가 뒤틀리고 접혀 기이한 공간을 이룬다. 그것이 바로 2012년의 텐트다.

그 텐트가 광화문에 세워진다. 도시 한복판에 세워질 텐트는 낯설 것이다. 그 안에서의 연극도 생경할 것이다. 어쩌면 텐트 안으로 들어가 본들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돌아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텐트는 형체가 불분명한 ‘들불’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들불’은 텐트 속 공연의 이름이지만 동시에 텐트 속 사건의 이미지이기도 한 것이다.

텐트가 마당과 만난다. 마당이 역사의 ‘들’이라면, 텐트는 그 들에서 타오르는 기억의 ‘불’이다. 불타는 들에서는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속한 사건들이 출현하고 사라진다. 국적을 달리하는 인간들이 부딪치고 어울린다. 다른 언어로 터져나오는 목소리들이 뒤엉키고 충돌하고 갈라진다. 그동안 팔레스타인과 광주와 후쿠시마는, 너의 역사와 나의 기억은 불꽃의 움직임처럼 서로 섞이려 할 것이다. 그동안 텐트는 하나의 생명처럼 부풀어 오르고 또 오그라들며 호흡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공연은 끝난다. 텐트는 걷힌다. 사람들은 흩어진다.

이질적인 것들의 역사가 불꽃처럼 타올라 거리를 떠돌 기억으로 연소된 후에.

몰락으로의 초대

광화문에 세워질 텐트에는 방사능이 묻어 있을 것이다. 3․11 이후 그들은 텐트를 짊어지고 재해지를 전전했다.

희망希望의 희希는 바라다는 뜻과 함께 드물다는 뜻도 담고 있다. 어쩌면 절망은 희망의 반대말이 아니라 희망을 구해 나서야 할 토양인지 모른다. 절망은 나아갈 길이 끊긴 상태다. 그들은 절망에서만 가능한 길을 내려 하고 있으며, 그 길이 있음을 실증해 보이고자 텐트를 메고 전전하는 중이다.

얼마 전 사쿠라이 씨를 만났다. 그에게 재해지에서 텐트연극을 한 경험을 물어봤다. 사쿠라이 씨는 재해민이 모여든 텐트 안에서 이렇게 공연을 시작했다고 한다. “오메데또 고자이마스(축하합니다).” 사쿠라이 씨는 그 말을 꺼내려고 공연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함께 우는 일은 차라리 쉬웠다. 그러나 삶이 파괴된 그곳에서, 전력이 끊겨 어둠 속에 잠긴 그곳에서 굳이 그는 “축하합니다”라며 공연을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재해민들 앞에서 왜 ‘축하합니다’라고 말했는지를 물었다. 그가 답했다. “재해지에서 우리는 인간의 생존과 근대 자본주의가 대결하는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싸울 대상을 만났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말했다. “일본으로 와라. 일본은 소비사회이고 관리사회이고 대중문화사회로서 현대에서 전형적인 장소였다. 그게 부서지고 있다. 모두들 동요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은 세계사가 새롭게 쓰여질 장소가 되고 있다. 너는 쓰는 인간으로서 그것을 봐라. 와서 그것을 겪어라. 그리고 사상적 전환점으로 삼아라. 거기서 같이 몰락하자.”

그는 나를 몰락으로 초대했다. 몰락으로의 초대는 희망 섞인 제안보다 강렬하다. 그리고 이번의 강렬함은 피할 수 없다.

오랫동안 찾아다녔지만 엇갈렸던 텐트연극이 내게로 왔다.

3․11을 겪으며 나는 그와 함께해야 할 맥락을 비로소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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