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이케우치 분페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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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벌레
통역: 카게몽

텐트 극단 ‘독화성・호응계획’, ‘야전의 달’의 이케우치 분페이(池内文平) 씨는 80년대 초반부터 ‘바람의 여단’이라는 극단을 동료들과 함께 만들고, 일본 전역에 연극을 해왔다. 일본의 60, 70년대 앙그라(underground) 문화를 대표하는 텐트 연극은, 지름 20미터 정도의 거대한 천막 극장을 가설하고 그 안에서 연극을 하는 독특한 장르이다. ‘독화성’과 ‘야전의 달’은 한번 텐트를 쳤던 곳에 다시 같은 텐트를 세우고 같은 연극을 하지 않는다. 연극을 할 때마다 매번 다른 극본으로 다른 장소를 찾는다.

결성 10년 만에 ‘바람의 여단’이 여러 개의 극단으로 나뉘면서, 이케우치 씨는 사쿠라이 다이조 씨와 함께 ‘야전의 달’을 결성한다. ‘독화성’은 조금 다르다. ‘독화성’ 또한 ‘바람의 여단’ 해체 이후 태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바람의 여단’ 안에 있던 연극부로 시작된 것이라 한다. 극단 안의 연극부. 이것은 ‘독화성’과 ‘야전의 달’이라는 두 개의 극단에서 극본, 조명, 배우, 연출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동하는 이케우치 분페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난감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제한이 없는, 체제에 구속되지 않는 상상력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그와 그의 활동을 어느 정도 설명해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실제로 ‘독화성’과 ‘야전의 달’은 정부나 문화재단, 단체 등의 보조금을 한번도 받아서 연극을 만들어본 일이 없다. 받은 만큼 거기에 구속된다는 것을 그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각자 연극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돈을 벌고, 그러한 의미에서 스스로를 ‘프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늘 말해왔다. 그들은 연극을 생업으로 삼고 매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연극인인 동시에 도로를 까는 노가다, 활동보조인, 출판사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이다.

그리고 활동가이기도 하다. 이케우치 씨는 텐트연극을 하는 연극인인 동시에 반천황제 운동이나 일용직노동자들을 지원하는 활동가다. 70년대 말부터 ‘반천황제 운동 연락회’와 도쿄의 산야(*일용직 노동자와 노숙자들이 집단 거주하는 도쿄 북동부 지역. 인력시장과 도야, 라고 불리는 쪽방이 몰려있다)를 지원하는 모임, 재일 아시아인 노동자와 함께 싸우는 모임 등을 꾸준히 해왔다. 때문에 텐트연극의 맥락을 이해하고 소개하기 위해, 서울에서 우리는 85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산야, 당하면 복수하라>의 상영회부터 열었다.

‘독화성’의 새로운 작품 <들불>이 4월 6~7일 광주 5.18 자유공원, 11~12일 서울 광화문 열린시민마당에서 상연된다. 한국에서는 2005년 광주에서 상연한 <새로운 천사> 이후 두 번째 공연이다. 공연 준비를 위해 서울을 찾은 이케우치 씨에게 궁금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전날 취한 술이 아직 깨지 않아, 대답이 길어질 질문들은 <들불>의 서울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다시 하기로 했다.

(*는 인터뷰어가 인터뷰 후에 덧붙인 설명입니다)

벌레: 원래는 신문사 기자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연극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바람의 여단’이라는 전설적인 텐트 극단에 어떻게 가담하게 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겠는데요.

이케우치: 연극은 70년대 대학생 때 시작한 것입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연극부 활동을 하던 친구가 있기는 했지만, 그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요. 대학에 들어가고, 연극부를 시작하면서 연극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에는 극단을 만들거나 하지는 않았었지요. 70년대 말 신문사에서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 여러 극단과 사귀기 시작했어요. 그 당시에는 텐트 극단이 꽤 많았는데, ‘곡마관’이라고 하는 사쿠라이 다이조씨가 하던 극단도 그 중 하나였죠. 처음에는 ‘곡마관’을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래도 거기 있던 다른 친구가 이런저런 활동을 저와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관계는 있었죠.(*당시 이케우치 씨는 반천황제 활동과 산야를 지원하는 활동을 했었다) 그러다가 80년대에 ‘곡마관’이 해산하게 되는데, 그 이후에 사쿠라이씨가 새로운 극단을 만든다고 했어요. 그래서 합류하게 되었죠. 그렇게 처음 함께 만든 극단이 ‘바람의 여단’입니다. 그때 첫 연극을 사쿠라이씨와 이야기해서 같이 썼었어요. <도쿄 말뚝이>(83년)라는 이름이었지요. 한국 사람들이 일본에 와서 했던 <서울 말뚝이>라는 연극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이예요.(*손진책 연출) 그렇게 처음 극단을 만들면서 10년 동안 함께 하자고 약속을 했었죠. 10년 뒤에 해산하자는 의미는 아니었고, 아무리 힘들어도 10년 동안은 버텨보자는 이야기였죠. 그리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10년 뒤 정말 해산하게 되었습니다.(웃음)

벌레: ‘바람의 여단’이 해산하고 난 뒤에 태어난 극단이 ‘독화성호응계획’과 ‘야전의 달’인 것이죠?

이케우치: 아뇨. 아뇨. ‘독화성’은 ‘바람의 여단’이 해산하기 전에 만든 거예요. 그리고 ‘바람의 여단’이 해산하고 나서 ‘야전의 달’이 생긴 것이죠.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독화성’은 ‘바람의 여단’ 안에 있는 연극부로 출발했습니다. 첫 연극은 <칠흙의 밤에 잠들어라 도시여>라는 제목이었죠. 그 작품을 하고 나서 이후에 ‘바람의 여단’이 여러 개로 나뉘어졌지요. (웃음)

벌레/통역: 연극부…… (웃음. 한동안 통역을 통해서 이 말을 이해하느라 여러 말들이 오갔다)

벌레: 한국에서는 2005년 광주에서 ‘새로운 천사’라는 작품을 상연하셨죠. 이후 7년만의 공연이네요. 이번 공연은 ‘놀이패신명’이라는 마당극단과의 연합공연인데요, 이런 식의 협업은 처음이라고 들었습니다. 특히 프로극단과는요. 이번 공연 <들불>이 처음 어떻게 기획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이케우치: 직접적인 계기는 2005년에 광주에서 ‘신명’과 만났다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마당’이라는 이름의 페스티벌에 초대 받았었죠. 거기에서 ‘신명’의 연극을 보았고, 2년 뒤인 2007년에 ‘신명’을 일본으로 초청했습니다. ‘일어서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의 일본 전국 투어를 했어요. 그러니까 한번은 한국에서 우리를 초청해주었고, 그 다음에는 우리가 한국의 극단을 초청했으니까, 그 다음은 연합공연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거죠.

여기까지는 직접적인 계기이고, 또 하나의 계기를 말씀드리고 싶네요. ‘야전의 달’이 대만의 ‘차사극단 差事劇團’과 함께 연극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한국의 연극인 장소익 씨와 처음 만났어요. 그리고 결국에는 장소익 씨를 통해서 한국에 가게 되었죠. 우리는 이미 대만과 교류하고 있었고, 이후 베이징에도 갔습니다. 그런 식으로 움직임을 크게 하고 싶었습니다. 더 넓게 관계를 넓히고 싶었어요. 연극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러한 관계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죠. 우리는 각지를 유랑하며 조금씩 관계들을 만들어왔고, 지금은 한국에서 그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더 이전의 이야기를 하자면, 대만의 ‘차사극단’에는 춘쨔오라는 분이 있어요. 그 분과 사쿠라이씨가 만난 것은 필리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춘짜오씨가 하는 연극을 보기 위해, 사쿠라이씨가 필리핀에 갔었던 것이죠. 약간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넓어지는 관계들이 있었습니다.

벌레: 이미 이번 <들불>의 공연을 준비하면서, 말씀하신 것 이상의 관계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네요. 서울의 사람들이 일본 텐트 극단을 매개로 광주의 배우들과 친구가 되고, 또 공연을 보러 각지에서 친구들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서 서로 만나는 식으로요.(웃음) 이번 <들불>의 서울/광주/도쿄 공연에 기대하시는 바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네요. 이번 공연은 광주의 마당극단 ‘놀이패신명’과 함께 하는 연합공연인데요, 텐트와 마당이라는 각기 다른 두 공간이 합쳐지는 독특한 형태의 극이기도 하죠. 이 텐트마당이라는 무대의 안과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시는지 여쭤보고 싶어요. 또 ‘신명’이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가진 극단과의 연합공연을 기획하신 의도도 궁금하네요.

이케우치: 이번 연합공연에서 기대하거나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질적인 것’이 어떻게 부딪치는가에 대한 것이겠죠. ‘이질적’이라고 부르지만 결코 ‘이질적인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해버릴 수만은 없는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연극에서 텐트와 마당이라는 공간이 그렇죠. 텐트와 마당은 각기 무대라는 장소를 어떻게 사고하는가, 라는 측면을 볼 때 닮은 점이 많아 보입니다. 다른 점도 물론 많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 연극에서는 그 두 개의 공간을 합칩니다. 텐트연극과 마당극이 만납니다. 그렇지만 이질적인 것이 부딪칠 때 자주 이야기되는 것처럼, 서로 배울 것이 있다는 둥 그런 소리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학습자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것, 이질적인 것과 마주쳤을 때 내 안에 있던 어떤 것이 출현한다” 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것이 이번 연합공연에서 겨냥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지만 신경조차 쓰여지지 않았던 낯선 것이 나온다, 뭐 그런 상황인 거죠. 이번 연극의 재미라면 이런 것이 아닐까 해요.

벌레: 텐트와 마당에 대해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겠는데요. 한번 텐트를 치고 연극을 했던 장소에서는 다시 텐트를 치고 같은 극을 하는 법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삼십 년이 넘게 매번 다른 장소에서 텐트 연극을 해온 사람에게, 텐트라는 장소가 어떤 의미일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이것이 마당과 어떻게 다른지도요.

이케우치: 이번 연극에서 텐트와 마당이라는 주제는 결국 장소에 대한 이야기죠. 그것은 현상 안에서 성립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정말 어려운 문제죠. 간단히 말하자면 텐트는 중심적이고 마당은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벡터가 역방향을 향한다는 것이죠.

마당이 다이얼로그(대화)적이라면, 텐트 연극은 모놀로그(독백)적이예요. 방향이 다르죠. 그러니까 아까 자기 안에서 신경도 쓰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마당이 대화적이고 텐트가 모놀로그적이라면 마당과 텐트가 만났을 때에 생기는 것은 ‘대화 안에 있는 모놀로그적인 것’이라든가, ‘모놀로그 안에 있는 대화적인 것’인 것이죠. 그러니까 일방통행이 아닌 더욱 더 큰 대화적인 것이 연극에서 성립하지 않을까 그런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벌레: 며칠 전 잠깐 광주에 내려가 한국와 일본 배우들의 <들불> 연습 장면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잠깐 본 것 뿐이지만 제 느낌을 이야기하자면, 다른 목소리들과 다른 기억들이 어떻게 서로 만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서로 다른 장소와 다른 순간에 다르게 죽어가는/갔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지르는 소리, 그것이 서로 호응하는 것. ‘마당’이라는 장소에서 말이죠. 예를 들면 세계의 모든 광장에서, 예를 들면 서울 광장이나 로마 광장 같은 곳에서, 바로 어제, 5년 전, 10년 전, 30년 전, 60년 전에 있었던 사람들. 그 모든 기억과 목소리들이 호응한다면, 어떻게 호응하는가. 그 모든 기억들이 한 순간, 한 공간에서 만난다면? 그러한 순간과 장소를 만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들불>에 대해 좀 더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들불>이 2005년 광주에서 상연했던 <새로운 천사>와 이어지는 작품이라고 들었는데요……

이케우치: 광주의 2005년 연극과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열 몇 편 정도 연극을 써왔는데, 그것은 길고 긴 하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별개의 텍스트로 볼 수 있지만, 작가로서는 긴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아까 벌레씨가 하셨던 말처럼, 이질적인 것이 만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계속 겹치면서 쌓여있는 게 ‘독화성’ 텐트연극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연극은 구조적으로는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뻔하지만 만나지는 않아요. 그것들이 서로 스쳐지나갈 뿐이죠. 절대 만나게 하지 않습니다. 이질적인 것들을 서로 만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관객의 기억입니다. 관객의 기억 속에서 그것들이 만나버렸습니다. 그러한 공간이 연극을 통해서 겹치면서 쌓여갑니다.

벌레: 실은 이 모든 것이 2년 전 처음 계획되었었는데. 연극이 1년 미뤄지면서 커다란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죠. 오늘이 바로 2012년 3월 11일, 후쿠시마 사고 1주기인데요, 후쿠시마 이전과 이후 무엇이 변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3월 11일 이후 대본을 많이 수정하시고, 몇몇 장은 아예 다시 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2장에서는 후쿠시마 발전소에서 쓰고 버려지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기억이 길게 등장하죠. 그러한 존재가 이 세계에 던지는 의미랄까, 그것을 텐트연극이 어떻게 드러내 보이는지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좋겠어요. 연극에서 말하려고 했던 바가 후쿠시마 이후 어떻게 변하지 않았고 어떻게 변했는지.

이케우치: 물론 1년 미뤄진 덕분에, 여러가지가 추가되었죠. 오늘이 딱 1년 째이군요. 일본 도호쿠(동북)지방에서 쓰나미로 2만명이 죽었죠. 2만명… 그것에 대항해 우리의 상상력은 아직 맞설 수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큰 사건이었습니다. 작년 가을, 사쿠라이씨와 이시노마키(*센다이 근처의 작은 바닷가 도시. 쓰나미 피해가 가장 큰 지역 중 하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민들이 집을 잃고 임시 주택에 살고 있다. 이곳에서 2011년 9월 ‘야전의 달’의 공연 <후쿠비키비쿠니> 무료 공연이 열렸다. <후쿠비키비쿠니>의 마지막 장면은 ‘행운의 점괘 뽑기 상점’의 비구니가 행운을 상징하는 붉은 공을 뽑아들고, 피해 주민이 대부분인 관객들을 향해 “축하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이다)에서 했던 연극은 그 사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맞서려고 했기 때문에 부딪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축하합니다, 라고 정말 어렵게 한 마디 했던 것이죠.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나기 전부터 우리들은 그 일이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라고, 원자력 발전소라는 것이 성립하는 구조에 대해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상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죠. ……그것을 다시 새롭게 상상력 안에 두어야겠다, 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연극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고발이 아닙니다. 고발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구조적으로 일회용 노동력이라고 하는 비정규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 사회와 같은 구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고발만으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원전 사건을 신체화한다, 는 것이 연극이 1년 미뤄지면서 새롭게 추가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러한 사건에 대해서, 그 사건이 아니라 다른 비슷한 사건에 대해서 다뤄본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더욱 더 큰 사건이고, 일본에서 그것을 공연한다면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일본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눈 앞에서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보자마자 아는 종류의 일입니다. 그것을 한국에서 얼마나 실현시킬 수 있을까, 라는 것이 앞으로 연습과정에서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벌레: 원전 사건을 신체화한다. 한국 사람이라 그런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네요.(웃음) 이번 <들불>에서는 후쿠시마라는 구체적인 지명도 등장하고,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의 기억도 나오죠. 그건 한국 사람도 보자마자 알 수 있는 것일 텐데요. 일본 사람들이 보자마자 아는 것,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봐도 알기 힘든 것이 무엇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뭘 만들고 싶으신 겁니까?

이케우치: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방사능은 지금도 방출하고 있는 그러한 발전소가 몇 십 킬로미터 앞에 있다는 감각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이 오염되어 있다, 숨 쉴 때마다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신다, 이러한 신체적인 위기감입니다. 몇 십 킬로 앞에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은, 특히 동일본 지방에 사는 모든 사람이 가지는 것이죠. 이것은 방금 질문하신 것처럼 상상력의 문제라기 보다는, 신체적인 감각의 문제입니다.

벌레: 조금 주제를 바꿔서,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서 묻고 싶어요. <들불>에 참가하는 ‘신명’의 배우들은 모두 전문 배우들이죠. 그렇지만 ‘독화성’이나 ‘야전의 달’ 배우들은 항상 “우리는 프로가 아니니까”라는 말을 해요. 다들 각자 아르바이트 같은 걸 해서 돈을 모으고, 3개월 정도 마다 모여서 텐트를 짓는다고 들었습니다. 아우또노미스트(자율주의자) 같기도 하고, 어쩌다가 이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삼십 년 넘게 가능했는지 궁금해요.(웃음)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의 평소 생활이라든지, 어떻게 이런 연극을 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지네요. 아마도 그 맥락에는 반천황제 운동 같은 것에 참여하면서, 반은 활동가로 살았던 것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케우치: 프로가 아니니까-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일’이나 ‘직업’으로 이걸 하는 건 아니라는 의미인 것이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마츄어다, 라는 것.

그리고 극단의 생김새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조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우또노미아라는 표현을 쓰셨지만, 뭐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죠. 우리는 연극이라든지 상상력이 제도화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제도화에 대한 비판. 공인된 연극이나, 공인된 상상력이 아니다, 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서 지금도 그것을 모색 중입니다. 아까 활동가이기 때문에 이렇게 모여서 연극을 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물으셨는데요. 우리 극단에 활동가만이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우연히 연극을 보러 온 사람이 재미있다고, 한번 해보고 싶다면서 가담하는 쪽이 훨씬 많죠. 그래도 우리는 연극의 주제가 있으니까, 그 주제를 통해서 활동가가 된 사람은 꽤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꾸로 활동가였기 때문에 연극을 하게 되었다는 사람은 있기는 한데 소수입니다.

벌레: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아서요(*인터뷰 이후에는 <산야, 당하면 복수하라>의 상영회와 관객과의 대화가 예정되어 있었다) 탈맥락이기는 하지만(웃음) 광주에 대해 질문 드려야겠네요. ‘바람의 여단’의 창단에는 80년의 ‘광주’가 있었다, 라고 자주 말씀하셨는데요. 처음 ‘독화성’의 연극도 광주에서 있었고, 광주의 ‘신명’과 광주/서울/도쿄에서 상연하는 <들불>을 준비하고 계시기도 하고, 또 거슬러 올라가면 류세이오 류(*이케우치 씨의 아들이며, 일본춤 부토를 기반으로 하는 자신만의 춤을 추는 댄서이자 텐트극단 배우)가 광주 도청 앞에서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었죠. 광주, 그리고 5.18에 대한 생각을 짧게라도 듣고 싶어요.

이케우치: 광주 5.18이 80년이었으니까 이제 32년 정도 되었네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 관심의 주제가 계속 변형되는 식으로요. 어느 정도냐고 관심의 강도를 묻는다면,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수준에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광주 사건에 대해서 봉기라는 표현을 씁니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광주 사건이나 광주 사태라는 말을 쓰죠. 그것은 피해자를 강조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대에 대해 죽임을 당했다는 의미에서요. 물론 그렇습니다. 피해라는 측면은 너무도 크죠. 그러나 제가 보고 싶은 것은 봉기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꼬뮨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공동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그것은 완벽히 스스로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강제적이고 특수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런 가운데서 꼬뮨을 만들었다는 것이 맨 처음에 광주 봉기에 대해 제가 반응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세계적으로 여러가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꼬뮨에 대한 제 자신의 생각도 좀 변형하고 있습니다.

벌레: 다시 탈맥락 하여(웃음), 지금은 <들불>을 준비하시느라 도쿄-서울-광주를 오가며 쉼 없이 일하고 계시지만, 다음 작품에 대해서 묻고 싶어요. ‘독화성’의 다음 작품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만들고 싶다, 라는 구상이 있으신가요?

이케우치: 항상 다음엔 뭐할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새로운 연극의 대본을 쓰고 연습을 하면서부터 그 다음 작품을 계획하고 있죠. 대만이라든지 필리핀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 다음 연극을 하고 있는 현장이 항상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이런 것을 하고 싶다, 라는 건 꿈처럼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게 뭐냐고 질문을 받으면 좀 혼란스러워요. 아, 이것이다, 라는 감각 뿐이기 대문에. 장면도 보이는데, 무슨 말 하는지는 들리지 않아요. 꿈의 한 순간처럼, 깨면 내용을 잊어버리지만, 감각만이, 감촉만이 남아 있는 그런 것이예요. 손 끝에 남아있는 꿈 속에서의 감촉 같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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