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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야, 당하면 복수하라> – 관객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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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기록은 85년도 도쿄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 <산야, 당하면 복수하라>의 2012년 3월 11일 서울 상영회 관객과의 대화이다. 이케우치 분페이 씨는 1970년대부터 도쿄의 ‘산야’라는 지역에서 일용직노동자 지원해왔으며, 이후 <산야, 당하면 복수하라>의 산야제작상영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는 4월에 있을 텐트연극 <들불>을 준비하기 위해 들렀다가, 이 다큐멘터리의 서울 상영회에 참가하게 되었다.(*이케우치 분페이 씨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아직도 매 달 한 번씩 일본 각지에서 상영회가 열린다.

덧붙이자면, 도쿄의 산야는 오사카의 가마가사키, 요코하마의 고토부키초와 함께 일본에서 손꼽히는 요세바다. 요세바는 노숙자와 일용직노동자들의 집단거주지를 말한다. 인력시장이 있고, 노숙자이자 노가다인 사람들이 있고, 이 사람들을 착취하거나 노름, 마약에 빠지게 해 돈을 버는 야쿠자들이 있고, 이를 방관하는 경찰이 있다. <산야, 당하면 복수하라>의 감독 사토 씨는 커다란 필름 카메라를 들고, 산야에 들어가는 도발을 감행했다. 그리고 영화를 찍던 도중 야쿠자에게 칼에 찔려 사망했다.

영화는 칼에 찔려 응급실에 실려온 사토 씨를 비추며 시작한다. 이어지는 것은 산야 사람들의 인터뷰다. 야쿠자에 의해 함바집에 감금당해 학대당했던 일용직 부부의 증언. 얼마나 맞았는지 얼마나 굶으며 일했는지 잠잘 시간도 없이 일했는지를 그들은 더듬더듬 말한다. 공사장에서 다쳐도 보상을 받지 못하고, 몸이 아프니 일하러 나가지 못하게 되고, 지하철에 숨어서 자다 경찰이나 야쿠자에게 두드려 맞기나 하는 사람들의 인터뷰.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 40년대의 산야에는 대만사람과 조선사람이 많았는데, 그들이 공사판에서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야쿠자가 초등학교 옥상에서 기관총을 쏘곤 했다는 믿을 수 없는 증언이 이어진다. 줄지어 가는 개미들을 심심풀이 삼아 죽이는 것처럼, 야쿠자들은 그런 식으로 벌레 같은 노무자들을 위협했다. 야쿠자들이 기관총을 대체 어디에서 구했는지, 어째서 경찰이 그런 행동을 묵인했는지는 누구도 물을 수 없었다. 그저 그들은 다 한편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산야의 이야기를 촬영하던 감독은 일본 전역의 요세바로 카메라를 돌린다. 어느 곳이나 사정을 마찬가지다. 일본 각지의 요세바에서 노무자는 사람 이하의 대접을 받는다. 쪽방이나 거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나간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모두 어디에서 왔단 말일까? 감독이 끝내 찾아가는 곳은 큐슈의 한 탄광이다. 탄광이 줄지어 문을 닫자, 거기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요세바로 흘러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탄광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나? 감독이 마주친 것은 전쟁 때 강제징용 당한 사람들, 억지로 끌려와서 평생을 일했으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일용직 노동자로 생을 마감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기이하게 낯설고도 익숙한 노래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로 진행되는 영화 중간에 갑자기, 한국인인 관객들의 귀에 갑자기 침입하는 노랫소리.

“우리네야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나는 어찌해서 숫(석탄)파러 왔느냐. 일본땅 좋다고 누가 말했느냐 일본땅 와보니 배고파 못살겠네. 숫을 팔때는 배고파 죽겠는데 그 말만 하며는 몽둥이 맞았었네. …… 15세 소년은 몸이 아퍼서 하루 놀려고 하다 뚜드려 맞았네. 몽둥이 맞고서 고랑에 끌려와서 천정이 떨어져서 이세상 이별했네. 죽은 아 꺼내서 손발을 만지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름만 불러봤네. 감독놈은 몽둥이 들고서 죽은 사람 옆에 두고 숫 담아내라 했네……”

영화 중반부에 야스쿠니 신사에서 노가다 아저씨들이 격렬하게 반천황제 시위를 하는 장면은, 이러한 맥락 없이 이해하기 힘들다. 대체 왜 일용직노동자 노조 사람들이 반천황제 운동을 할까. 그러나 영화 내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분명한 전선에 대해서다.

매번 8월 15일에 야스쿠니 신사 앞 수이도바시 지하철 역은 전쟁터처럼 변한다. 반천황제 데모를 하는 산야 활동가들에게 우익들은 페트병을 집어 던진다. 전선은 분명하다. 한쪽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 그들과 대립하는 일본 정부와 야쿠자와 경찰과 우익이 있다. 그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기를 원한다. 천황의 전쟁을 지지한다. 차별 받아도 괜찮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 노동자와 노동자도 못 되는 노무자(로무샤)가 구분되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식민지에서 강제로 사람들을 끌어와서 쓰고 버리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현재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나 삼성 LCD공장, 팍스콘, 맥도날드 같은 곳에서 서서히 죽어가며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적용된다. 그리고 900만이 넘는 한국의 비정규직 모두에게도.

영화가 설명 하는 것은 산야 비정규직 노가다들의 계보이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마주치게 되는 것은 바로 지금 우리의 문제다.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누구와 싸우고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지를 영화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벌레벌레배급사

<산야, 당하면 복수하라> – 관객과의 대화

2012년 3월 11일

통역: 오하나, 하지메

사회: 유선

기록: 사비

제 이름은 이케우치 분페이입니다. <산야, 당하면 복수하라>는 산야제작상영위원회가 주체가 되어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제작상영위원회의 멤버 중 한 명입니다. 이 영화는 1984년~5년에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7~8년전 일겁니다. 일본의 일용직 노동자들이 요세바에 몰려드는 것에 대해 찍은 영화입니다.

저는 산야, 요세바의 투쟁, 노조, 일본의 일용직 노조에 지원을 하면서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상영위원회의 감독이었던 사토씨가 어떻게 폭력을 당하고 죽었는지가 나왔었죠. 감독은 팀을 짜서 요세바에 들어가 영화를 찍으려고 시도했습니다. 1984년 12월 초에 찍기 시작했는데, 12월 21일 결국 야쿠자에게 칼로 찔려서 죽었습니다.

사토 미츠오씨는 원래 영화판에 있던 사람이고, 그가 살해된 후 영화에 관계된 사람들과 그가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모여서 다 못 찍은 영화를 완성시키자고 해서 산야제작영화상영회가 생겨난 것이죠. 얘기가 조금 어두운 곳으로 치우치는 감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1985년 12월 22일, 그가 죽은 지 딱 1년 만에 영화가 완성되어 첫 상영을 했습니다.

그 때, 야마오카 쿄이치가 감독의 입장이 되어서 감독이 죽은 지 1년 뒤 첫 상영회가 이루어지도록 많은 일을 했습니다. 쿄이치씨는 산야 운동의 사상적인 리더와 같은 사람이었죠. 투쟁적으로도 매우 활발했고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주가 되어 상영회를 시작했지만, 1월 13일에 쿄이치씨도 야쿠자에 의해 살해당하게 됩니다.

지금은 영상을 찍는 것이 쉬워졌지만 당대(2~30년 전)까지만 해도 필름 카메라였고 카메라도 상당히 컸습니다. 이것을 요세바에 들여오는 것은 노동자, 야쿠자 모두에게 상당한 도발행위였다는 점, 감독으로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세한 질문은 지금부터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지점에서 잘 읽히지 않으셨는지를 질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전에, 설명해주지 않으면 여러분이 죽어도 모를 것 같은 것이 있는데 지금 얘기해보겠습니다.(웃음)

영화의 마지막에 ‘노무자’라는 글자가 적힌 책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엔딩 크레딧도 다 올라가고 나서 갑자기 말이죠. 그것은 인도네시아 초등학교 교과서의 일부입니다. 인도네시아 역사 교과서 안에 ‘로무샤’라는 글자가 나온 것입니다. 노무자란 노동자보다 한 단계 아래인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차별의 언어입니다. 요즘 일본의 신문에서는 ‘정체불명의’ 사람을 표현할 대에 노무사라는 표현을 씁니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요세바 사람들을 노무자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왜 인도네시아 역사교과서에 나올까요? 인도네시아는 일본이 점령했던 곳입니다. 일본의 식민지에서는 강제징용 되어 노동하는 사람들을 ‘로무샤’라고 불렀습니다. 때문에 이 말이 지금의 인도네시아 역사교과서에까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영상에서도 계속 비췄지만, 조선인 또한 강제징용된 ‘로무샤’였습니다. 아무튼 이런 역사가 있었음을 말씀드리며 시작하겠습니다.

조금 더 보태자면 영화에서 비추는 것은 20~30년전의 요세바 풍경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도 건설경기가 침체되어 인력시장의 수요가 줄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지만, 풍경에는 크게 변화가 없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의 장소가 지금 일본에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도, 제가 듣기로는 비정규직 수가 900만에 이른다고 들었습니다. 일본도 비슷합니다. 이 영화를 만들 즈음에 ‘파견법’이 만들어졌는데 이 법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일을 알선하고 알선 받는 것이 불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일용직 노동자들의 일자리 알선을 야쿠자가 맡고 있지요. 노동자와 야쿠자 간의 투쟁이 영화 속에서 벌어집니다. 그러나 ‘파견법’이라는 법을 통해서 그 동안은 야쿠자만 하던 일을 일반인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비정규직은 엄청나게 증가하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비정규 노동자 문제를 쫓아가다보면 요세바가 나오는 것이고 이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탄광 노동자, 더 나아가면 강제징용된 식민지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로무샤라는 말 자체가 노동자 한 사람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그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력 자체, 일회용 노동력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에서는, 여러 작업에 투입되는 사람들이 전부 다 하청노동자입니다. 이들 또한 로무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노동자가 아니라.

질문자1. 저는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영화 중에 84년인가 85년 8월 15일이 나오는데 군인들이 신사참배하는 모습이 나오면서 반대파의 모습도 나옵니다. 그런 우익단체 모습과 이 영화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요.

이케우치: 거기 나오는 신사는 야스쿠니 신사입니다. 그 신사는 전쟁에 참여한 여러 병사들이 죽어서도 천황을 모시는 영혼의 군대로 남아있지요. 이 신사는 전쟁을 긍정하는 신사입니다. 당시 한국이 식민지였으니, 국적만 일본인으로 처리가 되어 합사되어 있는 한국인도 많습니다.(*몇 해 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가족들 빼내달라는 한국인 유가족들의 소송을 일본 정부가 거절한 일이 있었다. 그 중에는 ‘나는 아직 살아있으니, 천황을 지키는 영혼의 군대 명단에서 빼달라’고 외쳤던 생존자가 있었음에도 이 요구는 무시되었다) 영화 속 영상은 일본에서는 수상 나까소네 야스히로가 정식으로 신사에 참배하러 간 날이었어요. 과거 전쟁을 긍정하며 공식적으로 인정해버린 것입니다. 영상에서 병사 옷을 걸친 사람이 있었는데 이는 병사가 아니고 민간인입니다. 전쟁을 향수하면서 밀리터리룩을 선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야쿠자, 우익인 사람들이 함께 하는데 손에는 욱일승천기를 들고 “일본은 잘못없다”는 깃발을 들고 행진합니다. 결국 야쿠자, 우익, 경찰, 정부는 한편인 것이죠. 그리고 영화에서도 보여졌듯이, 야스쿠니 신사 앞 반대데모는 산야의 일용직노동자들이 조직했습니다.

질문자2. 저는 노동자입니다. 한국에서는 대분분의 노동자들이 고립되어 있어서 불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조를 탄압하지는 않지만, 노조를 촌스러운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지금 일본은 노조에 대한 분위기가 궁금합니다. 지금도 산야에 노조가 있나요? 그것에 대해 일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케우치: 물론 노조는 일반적으로 지금까지도 있는데 조직률이 많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한 기업의 모든 노동자가 100% 노조에 가입되어있다고 하면 그것은 틀림없이 어용노조입니다. 노동조합이 소수일수록 바른 말을 잘하는데 수적으로 적은 만큼 경찰이나 기업의 탄압이 심하기도 합니다. 요세바(산야) 노조는 지금도 여전히 있습니다.

산야의 경우는 노조는 많은데 노동조합이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노조는 있지만 노조가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있고, 생활 전반 문제는 조금 다르죠. 예를 들어 노숙인, 오키나와, 재일 조선인 문제가 산야에는 모두 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문제 속에서 느슨한 연대가 조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산야나 요세바의 운동을 확실히 차별적인 시선으로 봅니다. 하지만 노조가 대체로 다 바른 말만 하기 대문에 면전에 대고 차별적인 언사를 퍼붓지는 않습니다.

질문자2: 산야 뿐만 아니라 일본 전체적인 노동조합의 분위기는 어떠한가요?

이케우치: 운동적으로는 아주 많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의 가장 큰 노조가 일본의 민주당을 지원하고 있는데 민주당은 표면적으로 우익적인 자민당보다 더 우익적인 행동을 많이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운동이 얼마나 후퇴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원래 노조 운동이라는 것이 지속되다 보면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이 되곤 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동조건 개선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것들이 산야에서는 이미 산재해있었습니다.

질문자3: 저는 합정동 주민입니다. 요세바에 들어가서 촬영을 하는 감독의 상황이 녹록치 않았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무엇이었는지요?

이케우치: 그는 영화판 사람이었습니다. 상업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도무지 현실과 내가 마주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산야가 바로 진실이라는 생각에 다큐라는 방법으로 영화를 찍었다고 감독에게 들었습니다.

산야의 노동자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행동이 왜 도발적이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세바(산야)에 모인 사람들은 노무자(로무샤)였습니다. 차별적인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태어날 때부터 노무자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본인에게는 큰 자랑거리는 아니었고 밖으로도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얼굴을 면전에 들이대고 찍는 행위,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노동자들에게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상영한지도 20년이 넘었는데 적어도 상영회를 연 이곳에서는 여러분들이 노무자를 더 이상 차별의 눈으로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자4: 저는 정애자라고 합니다. 저도 합정동 주민입니다.(웃음) 지금 일본에서 조센징이라는 말과 한국인이라는 말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이케우치: 조센징이라는 말 자체는 차별어입니다. 로무샤라는 말처럼요. 뉘앙스는 차별어로 쓰입니다. 요즘은 조센징이라는 말을 적어도 신문에서는 쓰지 않지요. 한국자이니치, 또는 간고쿠진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남북으로 갈린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로 부를까 하는 고민에서 나온 말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냥 ‘코리안’이라고 부릅니다.

조센징이라는 그 말 자체는 차별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조선사람이라는 뜻이니까요. 물론 조선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기는 해도. 저는 이 말을 계속 사용해서 말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차별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드러냈으면 합니다. 그래서 그 말을 차별적인 언어로부터 다시 쟁취하려는 마음으로 사용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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