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의 뒷골목

노예제 (2): 스펙터클이 된 인간

- Beilang(동아시아사상사연구자, 뉴욕이타카)

노예들은 가축처럼 “사육”되다가 매매되었고 성적 대상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호기심 어린 시선의 대상, 구경거리로 전락하기도 했다. 19세기는 진화론의 등장과 함께 근대적 의미의 동물원, 박물관들이 생겨나고 박람회(엑스포)가 유행하기 시작하며 많은 것들이 당시의 지식체계에 따라 분류되고 또 스펙터클의 대상이 되는데 검은 피부의 불행한 영혼들도 백인들의 성적, 과학적, 이국적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이 분류와 전시의 대상이 된다.

사라 바트만의 사진

사라 바트만의 사진

사라 바트만을 희화한 선전 포스터

사라 바트만을 희화한 선전 포스터

유럽의 경우 이런 대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경우가 사라 바트만(Sarah “Saartjie” Baatman 1789?-1815)이다. 코이코이족으로 지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유럽으로 팔려와 처음엔 영국, 나중에는 프랑스에서 때론 실험동물처럼 의학연구의 대상으로 그리고 이곳저곳으로 끌려 다니며 “호텐토트족의 비너스”라는 역설적 이름으로 동물원의 짐승처럼 구경거리로 살다가 죽었다. 남다른 신체적 특성을 가진 그녀는 죽은 후에 부검되고 그녀의 뇌와 성기는 1974년까지150년이 넘도록 또 다른 구경거리가 되어 파리의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가 2002년에야 만델라 대통령의 요구에 의해 남아공화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녀에 대한 관심을 다시 촉발된 것은 스티븐 제이 굴드가 친구인 칼 세이건과 이 박물관을 구경하면서 전시된 바트만의 신체를 발견하고 그의 저서 <플라밍고의 미소>(The Flamingo’s Smile: Reflections in Natural History)의 한 장을 “호텐토트의 비너스”라는 제목으로 할애한데서 기인한다.)

미국의 경우에는 오타 벵가(Ota Benga 1883?-1916)라는 콩고출신 피그미족 흑인이 있다. 그는 미국인 선교사가 세인트루이스에서 있을 세계 박람회의 인종전시장에 전시할 흑인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콩고로 건너와 데려간 다섯 명의 흑인 가운데 하나였다. 박람회에서 상당한 인기를 끈 그는 자신을 데려온 선교사에 의해 뉴욕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에 넘겨지고 1906년에는 뉴욕 브롱스 동물원에서 침팬지, 오랑우탄 등의 동물과 같이 창살 안에 놓여져 말 그대로 ‘동물원의 원숭이’로 전락한다. 흑인들의 반대 등 많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고 후에 미국 사회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고 못하여 좌절하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1906년 뉴욕 브롱스 동물원에 갇혀 구경거리가 된 벵가. 그의 나이, 키, 체중과 함께 “아프리카 피그미”라는 안내문이 붙어 전시되었다.

1906년 뉴욕 브롱스 동물원에 갇혀 구경거리가 된 벵가. 그의 나이, 키, 체중과 함께 “아프리카 피그미”라는 안내문이 붙어 전시되었다.

벵가의 다른 모습. 부족의 관습에 따라 이빨을 날카롭게 갈았다.

벵가의 다른 모습. 부족의 관습에 따라 이빨을 날카롭게 갈았다.

노예제가 미국역사 가운데 특별히 어두운 골목이 되는 것은 미국이 내세운 가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제도라는 것이다. 이 이율배반의 관점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의 하나는 토마스 제퍼슨(1743-1826)일 것이다. “국부(國父 Founding Fathers)” 가운데 한명이자 <독립선언서(Declaration of Independence)>에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구절을 처음 써넣어 만민평등 주장했고, 후에 미연방 헌법의 기초가 된 <권리 장전(Bill of Rights)>의 초안을 마련했으며 3대 대통령(1801-1809)으로 미국 건국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정치가의 일인인 그는 미국 정치가 가운데 아마도 가장 이지적인 계몽군주의 이미지에 가까운 인물일 것이다.

동시에 그는 노예제의 본산지이자 노예 번식의 중심지인 버지니아 주에 있는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소유하고 수백 명의 노예를 거느렸다. 심정적으로는 노예제에 반대했고 1808년 노예무역금지 법안에 서명을 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노예 번식을 포함한 노예제의 혜택을 누렸고 하이티가 노예반란으로 세계 최초의 식민지 독립을 이루었을 때 정당한 국가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통상금지 조치를 취하며 자신의 사상을 위배한 인물이기도 했다.

토마스 제퍼슨

토마스 제퍼슨

가상의 샐리 헤밍스. 그녀의 실제 모습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가상의 샐리 헤밍스. 그녀의 실제 모습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미국 18대 대통령가운데 12명이 노예 소유주였다는 것에서 보듯 당시의 기준으로는 제퍼슨이 유별나게 비도덕적인 지도자는 아니었다. 도리어 노예제의 비인간성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할 만큼의 양식과 양심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상처한 후에 샐리 헤밍스(Sally Hemings 1773-1835)라는 여성노예와의 사이에 아이를 두고 있다는 소문은 일찍부터 떠돌아 다녔고 대통령 선거 기간에 헤밍스의 이름과 함께 한 신문에 의해 폭로되기도 했다. 헤밍스가 그가 죽을 때 같이 있었고 헤밍스와 그녀의 자식들을 모두 풀어주고 재산을 주라는 유언을 남겼기에 이 소문은 자신들이 제퍼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흑인들을 중심으로 신빙성 있는 얘기로 오랫동안 떠돌았다. 근 두세기를 지나 1998년 DNA검사를 통해 소문이 사실임이 확인될 때까지 백인 역사학자들은 줄곧 이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밝히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소문이 확인된 후에도 제퍼슨 후손들은 흑인 자손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노예제 하에서 이득을 취하며 살기는 했지만 ‘만민평등‘을 믿었고, 미국에서 ’인권‘과 ’민권‘을 얘기할 때 그 기반을 마련한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제퍼슨의 나라의 역사학자들은 소문을 부인하기 위해 수많은 저작을 남기고, 그의 자손들은 노예제가 폐지된 지 오래인 달라진 세상에서조차 흑인 자손은 제퍼슨의 진정한 자손이 아니라고 생떼를 쓰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검둥이‘ 노예의 자손들이 미국 ‘건국의 애비’의 하나인 위대한 ‘흰둥이’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자신들과 동급에 놓이는 것을 그들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 노예제는 과거형일까? 비록 실천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보편적 가치들을 신봉했고 그로 인해 존경을 받고 있는 조상을 두고 그의 뜻을 기린다는 자손들이 인간 패악질의 극치인 노예제를 심정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인가? 이런 위선은 자신의 더러운 이익 추구를 위해 편리하게 자유, 인권을 들먹이며 제3세계에 패악질을 가하고 민주주의를 욕보이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행태와 너무도 닮아있다.

노예주와 노예 사이의 이중적 관계를 풍자한 그림. 관계의 변화가 옷 색깔의 변화로 표현되고 있다.

노예주와 노예 사이의 이중적 관계를 풍자한 그림. 관계의 변화가 옷 색깔의 변화로 표현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미국이 최소한 노예제의 잘못을 인정하고 과거의 대한 기본적인 반성을 한 것은 사실 아닌가? 따라서 과거의 치부를 다시 들춰내어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부질없는 짓 아닌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이런 질문들로 노예제를 대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생각이 자신들과 과거를 단절시켜 과거를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드는 것을 차단하고 있다. 미국 그리고 나아가 서구 역사에서 지나간 과거의 잘못이 어떻게 인정과 반성의 형태를 취하면서 실제로는 자기정당화의 도구로 동원되는지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역사서술의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런 오도된 역사기술은 ‘신학적’ 형태를 띠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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