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향연

소크라테스, 무지한 스승.

- 최진호

1. 죽음조차 멈출 수 없는.

고소인들 앞에 소크라테스가 서 있다. 유죄판결을 받는다면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테네인들은 이 현인을 재판장으로 끌고 들어왔을까?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멜레토스의 중요 논거는 청년들의 타락이다. 교사로서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에게 나쁜 일을 좋은 일처럼 보이게 했으며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 원인은 다르다. 왜 그가 악명을 얻고 법정에 서게 되었을까? 델포이 무녀가 가장 현명하다고 신탁을 내린 사람이 이런 악명을 쓰게 되었을까?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자신은 신의 말이 맞는지 그른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해서 스스로 아테네의 현인들을 찾아내 그가 자신보다 현명함을 찾아낸다면 반증을 가지고 신에게 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현인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대화 속에서 그는 늘 그들이 자신의 무지에 대해 무지함을 알게 된다. 이것이 드러났을 때, 그들은 자신의 무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대신 소크라테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부끄러움을 느낄수록,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 대상을 회피하거나 비난하는 강도가 강해기지 마련이다. 자신을 해부하고 되돌아보는 대신, 이 부끄러움을 타인에 대한 분노로 전환시키기 쉽다. 그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선고받게 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삶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이 겁 많고 나약한 존재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타이르며 가르치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들에게 감사하고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여러분들을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신을 따르겠으며, 또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리고 힘닿는 데까지 철학하기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언제 누구를 만나든지 여러분을 타이르고 가르치기를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소크라테스의 변명])

2.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배려하라!

알키비아데스가 길을 걷고 있다. 평소에 그에게 그닥 관심을 보이지 않던 소크라테스가 그를 잡아 세운다. 소년기를 끝내고 이제 막 정치에 입문하려던 그에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오랫동안 품어왔던 이야기를 건낸다. “도대체 우리 자신이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어떤 기술이 사람을 더 낫게 만드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긴 하겠는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면서 누군가를 통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 즉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타자를 잘 지배할 수도 없고, 자신의 특권들을 타인들에게 가하는 정치 행위로, 합리적 행위로 변환시킬 수 없다는 것. 결국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에게 던지는 것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델포이 신전의 오래된 경구이다.

이 경구의 의미는 이렇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나는 이런 저런 특성과 특이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무지에 대한 자각이다. 내가 모르고 있음을 아는 것. 그렇다면 내가 모르고 있음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보면 막연해 보인다. 뭘 모른다는 것인지 모른다.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와 대화로 가보자. 소크라테스는 계속 알키비아데스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 전제가 옳은 것인지에 대해 묻는다. 즉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모르고 있음에 대한 자각시킨다. 그것은 앎의 자명성에 대한 해체 작업이다.

알키비아데스, 그 일(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쉽든 쉽지 않든, 적어도 우리 처지는 다음과 같네. 그것을 알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돌봄을 알 테지만, 모르면 결코 우리 자신에 대한 돌봄을 알지 못할 것이네. ([알키비아데스] 105)

소크라테스는 자기인식(gnȏthi seauton)의 문제를 자기배려(epimeleia heauton)의 문제와 결부시킨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자신을 아는 것은 자기의 무지를 자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내가 알고 있던 기존의 지식 체계가 깨질 때 발생한다. 습관대로 생각하지 않고, 내게 익숙해져 있는 것을 낯설게 보기 위해서 기존의 생각의 틀이 깨지는 경험을 해야 한다. 생각의 근거라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근거 없음을 알아야, 즉 우리의 사유를 구성하는 논리가 사실은 근거 없음을 깨달아야, 비로소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생각을 끝까지 끌고 나가야 한다. 스승과의 만남이든, 양생을 통해서든 말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인식하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은 다르다. 사람들은 좋음은 인정하지만 절대로 행하지 않는다. 늘 익숙한 대로, 알고 있는 대로, 패턴대로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인간이 사랑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무지와 맹목일지 모른다. 내 생각이 깨어지고 ‘근거의 근거 없음’에 직면할 때 우리의 존재는 흔들린다. 이 흔들림, 이 불안에 대면하기 보다는 편안한 것, 익숙한 것에 쉽게 몸을 의탁하려 하기 때문이다. 불안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가거나, 불안을 놀이처럼 다루지 않는 한 우리는 무지라는 ‘유동하는 땅’위에서 안주하게 될 것이다. 불안을 못내 외면해야 하기에 자신에게 무감각해진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무감각한 존재들에게 구멍을 뚫어내는 작업을 한다. 그들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고, 작게나마 숨통을 트는 작업을 제안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너 자신을 알라의 의미이다. 자신이 죽어 있음을 자각하고 불안 속으로 몸을 들이밀 때, 불안함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때, 불안은 고통이 아니라 삶의 즐거움으로 전환될 수 있으리라. 배움이 인식의 문제가 아닐 수 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배움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배려하는 사람은 누구나 무지에 대해 인식해야 한다. 각성의 순간이 바로 자신을 배려하는 순간이다. 따라서 배울 수 없다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배려하는 것도 아니다.

3. 무지한 스승.

대화 속에서 늘 자기를 배려하는 자인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깨달은 자, 혹은 완벽한 지를 갖는 자라는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다. 그렇다면 현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신과 같은 초월적인 지식, 모든 것에 답을 해주는 존재로 이해해야 할까?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모든 것을 안다고 여기는 존재는 무지에 대해 자각하지 못한 존재라고 비난할 것이다. 가령 신이 아닌 이상 모든 상황을 아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인 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무지의 지를 가르쳤던 스승-소크라테스에 대한 초월적인 이미지를 버려야 한다. 그 역시 모르는 것이 있다. 스승은 모든 의문에 대해 답을 해주는 완벽한 존재는 아니다.

소크라테스: 그럼 그와 같은 것들에 관해서 뭔가를 아는 사람이면서 가장 좋은 것에 대한 앎(아마 이 앎이 이로운 것에 대한 앎과 같은 앎일 텐데)이 그의 곁을 쫓아다니는 사람이 그 사람이군. 그런가?
알키비아데스: 예
소크라테스: 그를 우리는 분별 있다고 하고 나라에 대한 역량 있는 조언자이자 자기 자신에게도 역량 있는 조언자라고 말할 걸세. 그와 같지 않은 사람은 이와 반대된다고 하고 말이자.
([알키비아데스Ⅱ] 184)

우리는 앎을 소유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아는 것은 지식이 늘어나거나 보다 논리적으로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따라서 뭔가를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축적한 듯한 이미지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아는 사람은 “가장 좋은 것에 대한 앎이 그의 곁에 쫓아다니는 사람”이다. 앎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앎이 우리 곁으로 오게 하는 것이다. 앎을 내 머리의 보이지 않은 저장고에 잔뜩 쌓아놓고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적선하듯 던져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무지에 대한 자각을 했을 때, 지식은 쌓아가는 것임이라는 깨달음이 우리에게 다가오리라. 만약 무지를 자각하지 못하는 한 앎은 우리를 떠나고 우리에게 앎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은 앎을 자신에게 따라 붙도록 자신을 가꾸고 노력해야 한다.

스승도 이런 맥락에서 요청된다. 차라리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의사와 병자의 관계와 같다. 의사는 병자보다 병을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다. 키잡이가 우리보다 더 능숙하게 배를 모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보다 앎을 능숙하게 들러붙게 하는 스승에게 의탁해야 한다. 스승은 사람들에게 앎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 앎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이다.

이런 스승에게 요구되는 제1 덕목이 바로 ‘파르헤지아(parrhêsia)’이다. 우리말로 ‘솔직하게 말하기’ 혹은 ‘직언’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듯하다. 가령 소크라테스는 막 소년에서 성인이 되려하는 알키비아데스에게 관심을 표하면서, 자신은 알키비아데스의 육체를 탐하는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들은 알키비아데스에게 아첨하고 말을 꾸며낸다. 결국 알키비아데스는 그 자신의 무지를 되돌아볼 필요가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무기력하고 맹목적이게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가 아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타자의 담론에 의존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를 위한 방법으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아첨을 통해 타자를 맹목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솔직한 고백으로 알키비아데스가 무지를 스스로 고백하게 만든다. 즉 알키비아데스는 무지의 자각을 통해 비로소 앎을 자신의 곁에 다가오게 할 수 있게 된다.

알키비아데스의 예에서 보이듯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솔직히 고백’함으로써 진실을 말하는 자로서 자신을 구축할 수 있었다. 가르치는 자로서 소크라테스는 역설적으로 배우는 자가 된다. 스승=학인인 셈이다. 그는 좀 더 잘 배우거나 늘 배우는 자리에 자신을 둔다. 앞에서 앎은 자신의 해체와 관계되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는 대화 속에서 자신의 답답함, 일종의 무지의 상태를 계속 깨트려 나갔다. 모든 사람들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었다고 해도 좋다. 자기를 배려하는 사람,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은 차라리 내부적으로 스승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즉 자신이 자기에게 스승이 되는 관계가 중요하다. 그것은 배움의 과정에 끊임없이 나를 던져 넣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스스로가 자신에게 스승이 되는 것은 폐쇄적 과정이 아님에 유의하자. 앎이 내게 늘 따라 붙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타자의 관계에 민감해야 한다. 이 민감한 존재가 되는 것, 내 안의 스승을 산출해 내는 것이 스승의 자기 배려이다. 스승을 관계 속에서 산출하는 것이 스승의 존재의 미학이다.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스승이 되었을 때조차, 타자를 자신에게 의존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오히려 그가 스승이 되었을 때 스승-제자 관계는 해체의 방향으로 나간다. 스승은 남을 가르치는 자 일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스승적인 것들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타자를 스승에게서 벌어지게 한다. 이런 면에서 스승은 잘 배우는 사람이며, 타자를 스스로 배우도록 촉발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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