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편집 후기

- 하루

우연을 필연으로 과장하는 행위가 사랑이라 했던가? 아무렴 어떤가.
이제 와서는 말할 수 있겠다. 2년전 그 술자리에서 가볍게 주고 받은 몇마디가 결코 시시한 우연은 아니였음을…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얼떨결에 주고 받은 몇마디로 서툰 연애를 시작하듯 염려 반, 설렘 반으로 시작했던 위클리 수유너머와의 만남. 그리고 그 시작에는 또 모든 연애가 그렇듯 이 인연을 언제까지, 어떻게 이어나갈 것이라고는 누구도 기약하지 않았다.

누구나 한번쯤은 살면서 길을 잃는다고는 하지만, 처음 대중지성으로 수유너머의 문을 두드렸을 때 난 내가 왜 길에 서있는지 조차를 상실한 상태였다. 또 그 쯤에 디자이너로 광고 일을 하던 나는 이미 디자인이 그저 생계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광고 디자이너일 뿐이였다. 효과적인 비주얼로 광고주의 목소리를 대신해 소비자에게 잘 전달해주면 그 뿐이였다. 직장인으로서 해야만 했던 일들이다 보니 늘 아이디어는 쥐어 짜야만 했고, 꼬박 꼬박 쌓이는 년차의 횟수 만큼 감각의 도퇴가 두려워 늘 자기개발에 힘 써야만 했다. 그렇게 패전병의 심정으로 찾은 수유너머의 시간들은 솔직히 내게 답을 주기는 커녕 질문만 잔뜩 떠안고 나온 꼴이 되버렸다. 오히려 처음보다 물어야 할 질문들이 더 많아진 셈이였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했다. 그 질문들의 절실함과 양만큼이나 길은 내게 열려 있었던 것.

대중지성이 끝날 즈음 난 또 선택을 해야 했다. 조금 더 수유너머에서 공부를 해볼까도 했지만 난 10년 넘은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까지의 목적지향적인 삶의 방식을 청산하고, 무작정 하와이로 떠나왔다. 배움이 충분해서도 아니였고, 객끼를 부릴 나이는 더더욱 아니였다. 나는 없고 목적만 있는 익숙한 삶에서 벗어나 다른 구도에 나를 두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살겠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그리고 하와이로 출국하기 얼마 전 위클리 수유너머에서의 디자이너 제안이 있었다. 뒷풀이에서 가볍게 주고 받은 몇마디였는데, 얼마 후 출국을 결심한 상태였는데, 내가 흥쾌히 해보겠다고 대답했던 것은 위클리 수유너머가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일이였으므로.

물리적인 거리에도 불구하고, 2년… 연애를 한다고 해도 쉽지 않은 시간과 거리다. 위클리 수유너머에서의 디자인 작업은 내게 다른 구도에 놓인 삶만큼이나 지금까지 와는 다른 방식의 작업들이였다. 관념적 언어와 생각을 비주얼로 표현한다는 것은 내게도 새로운 방식의 작업이였다.
이미지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글보다 더 빠르고 직접적으로 감성에 작동한다. 또한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들의 보급과 소통의 창구가 된 웹의 발달로 꼭 전문가가 아니여도 사람들은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쉽게 이미지를 합성하고 편집하고 게시한다. 이제 비주얼은 텍스트를 보조하던 수단에서 그 자체가 소통의 수단이 된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비주얼은 누군가에게 폭력적일 수 있다. 일단 노출된 이미지는 이성적 판단과는 별개로 무의식에 작동하여 사람들에게 시각적 공해가 될 수도 있기에 비주얼을 생산하는 디자이너로서 다만, 위클리 수유너머에서의 나에 작업이 그 공해에 일조하지 않았길 바란다. 그래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위클리 수유너머와 작업은 내겐 스스로 끊임없이 비주얼로 소통하고자 고민했던 배움의 시간들이였다. 매주 기획된 이슈와 만나면서 그것이 나의 고민이 되어 비주얼로 만들어지기까지는 많은 필진들의 글들이 없었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한때 ‘디자이너’라는 사실에 비애를 느꼈던 시간에서 이제는 내가 비주얼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디자이너’라는 사실이 너무 감사하다.

위클리 수유너머에서 그 동안 만났던 사건과 사람들 하나 하나, 내겐 어느 호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
아직도 손끝에 그 표정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파랑새나눔터의 아이들…
교도소 안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척박한 땅에 핀 꽃과 닮아 있는 것 같아 등산 갔다가 사진기에 담아 왔었다.
G20 때는, 일명 ‘쥐 포스터’로 커버 이미지를 대신 장식해주셨던 선생님의 안부가 걱정되 안절부절했던 기억이,
지금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숨쉬는 이름 전태일. “나를 아는 수많은 나여, 나를 모르는 수많은 나여”란 말이 가슴에 박혀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따붙여 만드느라 한참동안 들여봤던 전태일의 얼굴…
홍대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는 한때 모대학에서 찬밥 데워 드시며 청소용역으로 일하셨던 나의 어머니가 생각나 남에 일 같지 않았다.
용산 성매매 여성들이 직접 찍은 사진들은 고스란히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쓸쓸하지만 아름다워 아직도 머리 속에 그 상이 아른 거린다.
분명 만만치 않은 시간 속에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잃지 않는 버마 민주 운동가 소모뚜씨!
그 글빨(?)과 재치있는 표현이 약장수를 연상시키며 열혈 독자로 필독하게 했던 백수 건강법.
위클리 수유너머 시작 즈음 병역거부 선언으로 입소했던 현민씨. 얼굴 한번 대면하지 않았지만 때때로 그의 편지를 기다렸으며, 출소 소식을 접했을 땐 세월을 실감하며 봄소식을 들은 듯 반가웠다.
100호 기념호 때는 모든 커버이미지를 하나 하나 들추며 스스로 뿌듯하면서도 아쉬움이 교차했다.

지금도 위클리 수유너머와의 작업은 내게 ‘하고 싶은 일’ 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오래된 연인처럼 나도 모르게 그 만남이 습관적이 될까 두렵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이 뻔함으로 낡기 전에 스스로 그 틈을 벌리는 일은 큰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다른 편집진들의 노고에 비하면 너무 작은 부분을 맡아 작업해 오면서 너무 많은 것들을 얻어 가는 것 같아 송구스럽다.
이번주는 ‘위클리 수유너머의 커버 이미지’가 주제인 만큼 이 기회를 활용(?)하여 커버이미지를 빌어 위클리 수유너머의 독자들과 필진들, 편집진들에게 이제서야 고백한다.

사랑합니다.

2012년 어느 늦은 밤…

응답 3개

  1. 박카스말하길

    편집진으로 활동했을때 원고가 늦게 들어오면 호가 올라가기 전날에서야 기화쌤에게 원고와 제목을 보냈던 기억이 나요. 그래도 매번 좋은 이미지를 뚝딱! 생산해내시는 것에 감탄과 고마움을 금치 못했어요. 다시 한번 매주 올라왔던 위클리의 이미지들이 머릿 속에 떠오르네요. 수고하셨습니다! 기화쌤.

  2. beforesunset말하길

    사건을 디자인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그대는 최고의 디자이너이자 너무 멋진 로맨티스트에요. 기화쌤. 매주 커버이미지 보면서 가슴 살짝 설레었음을 고백합니다. 언제 무엇을하든 함께 하고픈 기화쌤이에요. 사랑해요.^^

  3. 말하길

    매회 커버이미지 보면서 느꼈지만, 다른 어떤 편집진보다 위클리의 글들을 깊이 읽고 깊이 느껴 오셨군요. 기화샘의 이미지에서 저희가 많이 배웠고 이 편집후기를 통해 새삼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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