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아이들은 왜 꼭 이 시간에 학교를 가야 할까?

- 성태숙(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시작은 미비하지만 끝은 창대하다는 유명한 성경 구절이 있다. 살다보면 일이 그렇게 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일이 참 적지 않게 되기 마련이다. 어려서 흔히 듣던 용두사미란 말과 비교해보면 한쪽은 보잘 것 없지만 한쪽은 대단하다는 뜻의 대조적 구성을 이룬 이 비슷하기도 한 두 말이 주는 느낌이 참으로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즉 뭔 일을 할 때마다 저주처럼 퍼부어지던 용두사미란 말이 주는 그 언짢음이 이 ‘대박을 향해 가는 말’에서는 전혀 느껴져 오지 않는단 말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절대 그러지 말아야 할 엉뚱한 지점에서 말이 딱 들어맞는 참 쓸데없는 일이 잘도 일어나곤 하는 것도 세상사 돌아가는 또 하나의 이치인 것 같다. 좋은 결말을 위해 미비한 시작이 견딜 만한 것이 되어야 하는데, 별일도 아닌 일이 끝내는 참혹한 결말을 부르는 경우도 없지는 않아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는 말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학교 지각 문제이다. 누구나 지각을 하게 되었을 때의 그 찜찜한 기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모두가 바라보는 시설을 견디며 ‘드르륵’ 교실 문을 열어야 하는 순간은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더욱이 그것이 다른 곳을 힐끗거리다가 눈길만 마주쳐도 ‘뭘 봐?’하고 과민한 반응을 보이기 일쑤인 사춘기 언저리의 아이들에게는 죽기 보다 더 싫은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왜 아이들은 그렇게 이른 시간에 학교를 가야 하느냐고…… 이건 뭐 순전히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괜찮은 정규직들이야 딱딱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 일찍 퇴근하는 삶이 가능하지 보통의 그저 그렇고 그런 노동자들은 밤늦게 퇴근하는 일이 다반사다. 즉 아침에 좀 늦게 나가고 밤늦게까지 일하는 사람들이 많고, 더욱이 직장이 없는 사람들은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움직거리는 것은 좀 뭐하니까 대개 오전 늦게나 혹은 오후에 일어나서 비로소 활동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사정으로 아이들이 지각 안하게 깨워달라고 부탁이라도 하면 정말 죽을 맛인 것이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잠깐 인간으로 재충전하느라 텔레비전에서 드라마라도 한, 두 편 보고 늦게 잔 날은 혹시 다음날 아이들을 깨워주지 못하면 어쩔까 밤새도록 가위에 눌리게 된다. 더욱이 부부가 같이 살기라도 해야 ‘내가 못 일어나면 당신이라도 좀 깨워주지, 당신은 뭐했어?’하고 서로 언성이라도 높이며 싸워볼 수 있지, 이혼이라도 하고 혼자서 애를 키우는 사람들은 모든 부담이 고스란히 혼자만의 몫이 되어 아이들과 함께 아직도 여전히 학교에 다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은근히 부아가 난다. 아이들을 그렇게 이른 시간에 학교에 보내야 하는 음모의 뒷배경이 무엇 때문인가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정말 생각해보면 시작은 미비하게 몇 번 지각한 것 때문에 징징거리다 선생님께 혼도 나고 쪽팔림도 당하니까 또 그런 일이 있게 되면 괜히 배도 아픈 것 같고 해서 학교를 한, 두 번씩 빼먹는 일로 시작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아침에 일찍 나가거나 혹은 밤늦게까지 일하고 들어와서 세상 모르고 자야 하는 보호자를 둔 아이들은 그냥 집 밖을 나가지 않고 있어도 보호자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종종 벌어지게 되면서 마침내는 학교를 그만두는 창대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 발각되면 집에서도 난리가 나고 학교에서도 장난이 아니므로 아이들은 단단히 굳은 마음을 먹고 다시는 늦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다. 주로 착하고 마음과 의지가 여린 아이일수록 상대방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은 크게 가지고 그것을 실천할 개인적 의지는 부족한 부조화 현상을 보이게 된다. 그렇게 철썩같이 약속을 했건만 또 일어나보면 이미 9시가 훌쩍 넘긴 시각이고 보면 정신이 까마득해지는 것 같다. 허겁지겁 학교갈 준비를 해보지만 차마 발길이 안떨어지는 것이다. 차라리 어디 팔이라도 부러지든지 간 밤에 집안에 뭔 일이라도 나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어찌 다시 담임의 얼굴을 볼 것이며, ‘너 또 늦었냐?’라는 동급생 아이들의 쓸데없는 참견을 참아내야만 할 일이 무엇보다 상상도 하기 싦을 만큼 괴롭다. 벌점은 이미 차고 넘칠 만큼 싸였고,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환멸을 견딜 수가 없다. ‘어떻게 나는 8시 30분에 일어나는 일도 하나 못하는 바보란 말이가’하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뱅뱅 맴을 돈다. 그러면서 ‘이럴 때 엄마가 있으면 깨워줬을 텐데’ 하는 아쉬움의 소리도 네보고, 혹은 ‘다른 엄마들은 다 깨워준다는데 우리 엄마는 뭐하는 사람이야?’하는 원망의 소리도 절로 나기 마련이다.

정말 아이들은 왜 그렇게 이른 시각에 학교를 가야 하는 것일까? 물론 발달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학령기는 근면성을 배우는 것이 주요한 발달과업으로 물론 유의미한 점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시간 정도 더 자고 일어나서 더 열심히 공부한다면 그것이 과연 근면성을 크게 해치는 일이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오히려 지금의 학교 시스템은 산업화 초기의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살던 농민들을 산업화의 과정에 맞는 인간으로 개조하기 위하여 시간 개념을 도입하고, 그에 따른 생활 리듬을 강제로 익히게 하였던 ‘자본주의에 적응하는 인간 만들기’ 프로젝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더 적절한 말인 것 같다. 거기에 하나 더 붙인다면 정규직들이 출근한 뒤 학교란 제도를 통해 공식적으로 아이들에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 낸 것뿐이다. 특히 전 세계를 상대로 교역을 해야만 하는 자본주의는 따라서 이른 아침부터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고 따라서 어쩌면 9시에 수업을 시작하는 일도 많이 봐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즉 엄마, 아빠와 출근하실 때 혹은 출근하시기 전에 등교하는 어린이나 청소년 상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긴 시간을 노동하지 않으면 안되고, 또 남들이 노동하지 않으려 하는 시간에 노동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어려운 형편이 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더 이상 몇몇 정규직 부모님들의 자녀들을 위해 우리 비정규직 가정의 자녀들조차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밥도 제대로 못 챙겨먹고 허겁지겁 산발한 머리로 학교 가는 일을 계속 해야만 하겠느냐는 말이다.

이미 어떤 아이들은 늦은 밤까지 게임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드는 일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어떤 부모들은 늦게와서 늦게 잔다. 어떤 부모들은 낮에 할 일이 없어 차마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이들은 겨우 잠드는 것이다. 이들은 이른 아침이 낮설고 두렵다. 그런 낮선 시간에 아이 혼자 일어나 학교를 혼자 챙겨서 가는 일은 힘겨운 일이란 말이다.

그냥 한 시간만이라도 학교를 늦추면 어떨까? 아니면 최소한 9시 30분에라도 학교를 시작하면 어떨까? 조금 늦게 일어나도 아이들이 여유를 가지고 준비할 수 있도록, 그러면 아침 돌봄을 하는 사람들도 너무 일찍부터 서둘지 않아도 되도록 말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하루가 당황스럽게 시작되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일찍 와야 하는 아이를 위해서는 지금처럼 아침 돌봄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부모가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아침을 조금이라도 넉넉히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시간 늦게 시작하고 한 시간 늦게 끝내면 어떠냐고 제안해본다. 애들은 좋아할 것 같다. 어른들은 분명 말이 안 된다고 할 것 같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다는 것 말고 바꿔서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