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평화를 부르는 조약골, 강정마을에서의 인터뷰

- 산호

어쩌면 그냥 스쳐보냈을 봄. 여기 와서 앞으로 얼마나 더 있어야 할지도 아직 모르고 있다. 강정마을과 23일 간 보낸 밤. 아주 오래 잠을 잔 것만 같은데 아마 너무 긴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계획 없이 왔다 일정 없이 지내는 요즘. 뭘 하면 좋을까, 그만 갈까 막막한 심정일 때 운이 좋게도 자전거를 탔다. 바람이 불었고 바닷 내음이 났고 오는 길에 그냥 쉽게 사랑을 받았다. 다시 보고 싶지만, 아마 종적 장벽인지, 아님 나이의 장벽인지, 널 만나러 가는데 다들 어찌나 지랄인지 모른다.

“제주도민의 아름다운 희망을 위하여 고엽제 전우들 만세. 대한민국 만세.” 확성기 너머 저 멀리 들리는 소리는 나의 대갈통을 부숴버려야 한다고 했다. 어느 순간 나는 ‘반미친북세력’이 되어 강정천을 가운데 두고 멍청하게 갈라서 있다. 턱 밑으로 개미가 지나갔다. 너는 저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느냐고 물어봤다. 어느 누구의 아버지, 어디선가 밥을 얻어먹은 음식점 아저씨와 비슷한 음성, 그것 말곤 나로선 모르겠다. 어떤 아름다운 희망이라고 너의 몸통을 부숴버려야 하는 걸까. 물어보고 싶었다. 유치하지만 만약, 오늘이 우리들의 마지막 날이라면, 보고 싶을까 미안할까 고마울까. 어느 누군가에게는 오늘이 그런 날이겠지만, 살아남은 것들은 안보를 지켜야하나 명령을 지켜야하나 소중한 것을 지켜야하나.

얘기하고 싶었다. 전화번호도 있었지만, 긴 머리 휘날리며 가는 조약골 뒤를 붙잡아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밥도 못 먹은 분을 두 시간이 넘도록 앉혀놓고 이야기를 했다. 아래에 있는 사람. 인터뷰가 끝난 후에 내게 남은 그의 인상이다. 여기에 있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전하고 싶다.


대추리, 새만금, 용산, 두리반 등에서 오래 활동하셨다고 들었다. 이전의 다른 곳에서의 활동과 지금 이 곳이 어떻게 이어지고 달라졌는지 듣고 싶다.

다른 현장과의 차이점을 먼저 말하자면, 여기는 더 힘들다. 아나키스트는 다른 어떤 폭력보다도 국가 주도의 폭력에 민감하다. 나 역시 평소 그 부분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이전까지 다른 현장의 경우, 초기 폭력이 가장 컸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물론 그 가운데도 폭력이 일어나지만, 대개 국가 주도의 폭력은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다. 저강도의 폭력으로 조여오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강정마을은 갈수록 더 심한 폭력으로 제압하려고 한다. 국가가 주도하는 폭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고 앞으로는 더 강해질 것이라는 두려움도 생기게 된다. 이런 점이 견딜 수 없이 힘들다.

삶과 투쟁이 분리되지 않은 방식이여서 더 힘들지 않을까 싶다. 현장에서 생활하면서 활동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얘기해달라.

우스갯소리로 밥을 먹는 것도 투쟁이라는 말을 한다. 일상이 투쟁의 리듬에 맞춰지고 숨을 쉬는 자체가 투쟁이 된다. 투쟁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는데, 왜 현장에서 사는 방식이냐고 묻는다면, 나한테는 구체적인 장소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대안적인 공간을 만들어나가는 것. 나 스스로 공간이 되고 대안이 되는 것. 이것이 아나키즘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라는 구호가 있다. 이는 잘못된 구호다. 다른 세상은 이 순간에도 존재하고 이전에도 존재해왔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저 멀리 있다고 가리키는게 아니라 24시간을 살아내는 원칙이며, 꿈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실재하는 것. 이것이 내게는 아나키즘이다.

조약골 씨에게 아나키즘이 어떤 것인지 더 자세하게 듣고 싶다. 스스로 공간이 되고 대안이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했는지?

평택 대추리 마을에 폭설이 온 적이 있다. 농민들이 트랙터로 치우러 나서자, 활동가들도 따라서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서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면? 국가 공공 기관이 나서서 치운다. 이런 사소한 것부터도 그렇지만, 국가는 수없이 많은 촘촘한 기능들을 수행한다. 공동체에서 이런 기능을 대신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국가의 필요성을 느끼고 손을 벌리게 된다. 평택 대추리 마을의 경우, 평화 마을이 세워지고, 없던 솔부엉이 도서관이 만들어지고 했다. 대안방송국이 부족하면 다시 그걸 만드는 식이다. 이렇게 매일 일어나서 국가가 떠난 빈 자리를 메꾸는 일을 한다. 당시 평택의 농민들이 주민등록증을 한 곳에 모아 태워버린 일이 있었다. 국가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하나의 표현이었다. 국가가 ‘국책사업’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과 다른 가치를 보여줘야 했다. ‘안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다른 종류의 ‘안보’가 중요하다고 증명해내야 했다. 직접적으로 말해, 군대의 힘보다 평화의 힘을 말해야 했다. 만약 국가 없이도 살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는 아나키스트다.

최근 강정마을에서는 문정현 신부님의 추락 사고가 있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주저앉았고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런데 누구 하나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주는 이가 없었다. 그런 순간이면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강정마을에도 문정현 신부님을 비롯한 리더들은 있다고 보는데, 이들이 권위적인 지도자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사실 아나키즘이라고 하면 흔히 무정부주의, 지도자의 부재를 떠올리기 쉬운 것 같다. 앞서 말한 국가에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디까지인가?

아나키즘을 기반으로 활동한다고 하면, 그 곳에도 리더가 있지 않느냐는 반문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나키즘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 중의 하나다. 아나키스트는 투표를 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것도 그렇고. 사실은 오히려, 지도자의 유무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 강정에서도 전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따로 없다. 무언가 기획하거나 청사진을 그려본 후에 투쟁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실제로 우리는 지침 받는 것을 기대할 때가 있다. 익숙한 기존의 모습들이 남아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 아나키즘은 다른 종류의 흐름을 만들어간다. 지도자가 없어도 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지도자가 있건 없건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어떤 관계를 만들고 있는지다. 이런 가치 추구의 과정에 있다보면, 아나키스트는 끊임없이 비효율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회의 한 번을 해도 좀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수평적으로 역할을 배분하자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효율을 쫓다보면 비효율적인 것은 버려야 할 것, 없애야 할 것이 된다. 하지만 효율과 비효율로 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어디에나 있는 갈등이 그 중의 하나다.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이여도 좋다. 이런 것을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나키즘이다.

현재 강정에서 활동중인 조약골은 잠시 짬을 내 부재자 투표를 했다고 한다. 출처 :: 조약골의 트위터 @dopeheadzo

현재 강정에서 활동중인 조약골은 잠시 짬을 내 부재자 투표를 했다고 한다. 출처 :: 조약골의 트위터 @dopeheadzo

지금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활동 중이시다. 저는 ‘해군기지 백지화’ 자체만으로 성공을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좀 전에 말씀하셨듯이 군대의 힘이 아닌 평화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면 말이다. 여기에 3주 간 있으면서 가장 많이 내뱉은 말이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폭력을 말하고, 그 다음에 평화를 말하고, 그 다음에 폭력을 말하고, 또 다시 평화를 말한다. 어느 순간, 뭔가 아이러니한 느낌이 들었다. 가장 멀어지고 싶은 국가적 폭력과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 머물고 있다. ‘평화활동가’로 계시는 것이 힘들지 않는지, 평화의 힘을 어떻게 지켜내시는지 혹은 어떨 때 느끼시는지 묻고 싶다.

일단, 도망갈 데가 없다. 어딜 가도 여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평화가 뭐냐? 어디에 평화가 필요하냐? 그래서, 그 어떤 것보다, 평화가 필요한 곳으로 가게 된다. 어디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다시 또 다른 폭력을 겪게 된다.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괴로워하고 있다. 그걸 용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이런 곳에 있게 되는 것 같다. 또한, 일상 속에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닮아가지 않기 위해서 여기 왜 왔는지를 되짚어본다. 그리고 폭력에 물들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구럼비 발파 이후로 잠시 중단된 상태지만, 이전부터 그런 문제들을 느꼈고 여타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준비해왔다.

‘다시 한 번 경고방송 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공사장 앞에 앉아서 공사 출입을 막고 있습니다. 지금 이런 행위는 형법상 업무방해에 해당됩니다. 지금 즉시 불법행위를 중단하시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행동은 다 채증되고 있습니다.’ 평화적 시위가 아닌 폭력적 시위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폭력은 뭐고 비폭력은 뭔지, 그것이 갖는 힘이 있다면?

나에게 폭력이란 상대방의 속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 그런데 누군가는 폭력을 느껴도 다른 누군가는 느끼지 못한다. 끔찍한 것이다. 진압 경찰들이 ‘시위대’라고 표현할 때, 우리는 이미 낙인 찍히고 만다. 그러면 가서 “나는 평화 활동하는 사람이지, 시위대가 아니다”라고 얘기한다.

하루 혹은 한 주의 일과가 어떠신지, 이 곳에서 생긴 습관 같은 것이 있다면?

비상 사이렌으로 인한 노이로제. 그리고 신짜꽃밴의 음반이 나올 예정이다. 이 음반은 다른 음반하고는 의미가 좀 다르다. 음악하고 소통하고 현장을 만드는 것이 함께 들어있으니까. 한 주의 일과는 없다. 하루 단위로 움직이는게 보통이다. 상황이 터지면 함께 대응하고, 찍은 동영상은 편집해서 올리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알린다. 내일도 기자회견이 있고. 이러다보니, 사고가 짧아진 것도 있고 장기적인 계획을 잡기는 당연히 어렵다. 그래서 어떤 때는 축소되고 매몰되는 느낌도 받는다. 시각이 협소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도, 다시 여기에서 수많은 가치를 보게 된다. 많은 운동을 함께 해나가고 있다. 환경운동, 인권운동, 아나키스트 운동….

응답 1개

  1. 사루비아말하길

    이걸 이제야 봤네.
    조약골이야 원체 말 잘하는 거 알고 있었는데
    산호의 질문이 정말 좋네요!!! 강정에 있는 산호의 마음도 함께 느껴지는 글이었어요. ^-^
    난 5월에 갈 수 있어욤. 그때 봅시다~ 쫍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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