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과학연구의 다양성에 대한 단상

- 남창훈(면역학자)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말은 당위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다름’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단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지구상 모든 생명체는 각기 다른 개체들과 구분되는 독특한 특성과 ‘다름’을 지니고 있다. 다양한 개체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이야기이다. 어떤 인위적인 조작을 거쳐 이처럼 자연스러운 다양성을 없애면 어떻게 될까? 그 귀결은 그 군집의 도태와 멸절로 이어진다. 가령 벼나 바나나 같은 종의 품질을 개량하기 위해 유전자조작을 하고 병충해에 강한 종을 개발하여 대량 보급하게 되면 그 결과 점점 그 종내 다양성이 사라지고 가장 우수하게 개량된 개체로 수렴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이 극단에 이르러 한 개체의 유전자만 남고 다른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이 사라졌다면 그 종은 금새 멸종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유전자의 다양성은 개체들이 주변 환경 즉 다양한 토양, 기후, 인접한 곳에 자라는 다양한 생물군과의 관계에 맞춰 끊임없이 돌연변이를 통해 변모한 결과 얻어진 것이다. 즉 어느 종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적으로 벌이는 자기 생존전략의 결과 얻어진 것이 그 종의 다양성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인간이 대량생산에 가장 적합한 유전자를 지닌 개체만을 선택하고 거기에 집중을 거듭한 결과 다양성을 없애 버렸다면 그 종의 입장에서는 아주 심각한 멸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꼴이 된다. 대량 생산에 맞추어 개량된 종이 꼭 지구온난화에 가장 적합한 종이라는 보장도 없고, 다른 여러 재해나 병충해에 가장 적응력이 강하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다양성이라는 이슈가 과학 연구에도 중요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년 연구재단으로부터 ‘3책5연’ 제도에 대한 설문지를 받은 적이 있다. 3책5연 (또는 3책5공) 제도란 ‘한 연구자가 동시에 정부과제를 5개까지만 수행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것으로 이중 연구책임자로는 3개 과제까지만 수행이 가능한 제도’이다. 몇 가지 보완되어야 할 여지가 있지만 나는 이 제도의 취지 자체에는 찬성한다. 현재 한국 내에 거주하는 이공계박사는 모두 10만 명에 육박한다. 그중 과제를 기획하여 운영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모두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림잡아 20%라고 계산해도 2만 명에 이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국가과학자’라는 해괴한 직함의 과학자도 있고 ‘노벨상 유력후보’라고 일컬어지는 스타과학자들도 있다. 나는 그들의 창의성이나 천재성에 대해 논박할 의사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중 몇 사람은 개인적으로도 깊은 친분이 있고, 나 역시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하지만 과학연구에 있어서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제는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져야만 한다. 바로 과학기술연구의 다양성 문제 때문이다. 정부가 일 년에 투자하는 R&D 예산은 15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이를 앞서 어림잡아 본 2만 명의 과제 책임자로 간단하게 나눌 경우 한 사람 당 7억 5천만 원의 연구비를 수중에 지닐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한국의 과학자라면 잘 알겠지만 이런 연구비를 가지고 자신의 과제를 진행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이다. 그냥 산술적 평균에 해당하는 액수인데도 아주 유명한 대학의 교수들이 집행하는 연구비 수준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그 많은 돈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바로 그 답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우리 사회의 강고한 기조가 만들어 낸 현상들로부터 찾을 수 있다. 지난 출장 때 만난 어느 지방 국립대 교수는 일 년 연구비가 5천만 원에도 이르지 못한다는 고백을 했다. 그리고 그 사정은 그분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같은 대학 이공계 교수들 다수에 해당된다는 것을 얘기했다. 이쯤 되면 지방 사립대 (몇몇 유명 사립대를 제외하고)에 있는 이공계 교수들의 형편은 더 거론할 필요가 없게 된다.

과학 연구에 있어서 다양성은 과학 연구의 본질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탐구한다는 것’이라는 졸저에서 ‘왜 우리는 과학연구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답을 한 바 있다. ‘인간에 대해 보다 풍부하고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그리고 인간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자연 생물 및 무생물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라는 답을 던진 바 있다. 아주 개론적이고 원칙적인 답이지만 그 답의 배경에 있는 생각을 한 번 잘 반추하다 보면 왜 과학연구에 다양성이 필요한지 아니 더 나아가 왜 필수적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연구가 특별한 이유로 기획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그런데 그 특별한 이유에 ‘돈이 되기 때문에’라든지, ‘노벨상을 탈 수 있기 때문에’라든지 하는 본질을 벗어난 것들이 자리 잡는 순간 ‘한국에서의 과학’은 왜곡된 길을 걷게 되기 시작한다. 과학은 우리의 삶을 탐구하고 그 안에 비밀처럼 숨겨 있는 여러 논리와 원인과 메카니즘을 밝혀내는 중요한 임무와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결코 단일하지 않고 지극히 다양하다. 서울과 지방의 삶이 다르고, 산지와 해안가의 삶이 다르고 아이와 노인의 삶이 다르다. 부유한 이들의 삶과 가난한 이들의 삶이 다르고, 남자와 여자의 삶이 다르고, 다른 신체적 특징들에 맞춰 다 다른 삶을 영위하며 살고 있다. 더 나아가 그 다양한 인간의 삶들이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들 및 다양한 사물들과 맺는 관계는 가히 셈할 수 없이 다양한 현상과 그와 관련된 연구 주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 더 큰 돈을 벌어올 수 있다거나, 더 좋은 논문에 출간할 수 있다고 연구 주제를 제약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우리네 삶의 다양함을 포착하고 그에 근거하여 연구 주제를 발견하고 그 주제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 수 밖에 없다.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성인병 치료제나 암치료제에 대한 투자는 대규모로 되지만 그 수익이 불확실한 결핵 진단 및 치료제에 대한 연구는 아주 미미한 규모로 연구되는 현실은 이를 웅변하듯 보여주는 실례라 할 수 있다. 어느 학회에 갔다가 연변과기대의 교수 한사람이 일제시대 때 운영하다 폐광이 된 광산촌 주민들의 발암률이 매우 높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인근 환경에 대한 역학조사를 하려다가 예산을 따지 못해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광산촌 인근 주민들의 삶을 놓고 보자면 제안하려 했던 연구는 노벨상을 탈 수 있는 그 어떤 연구보다도 값진 연구라 할 수 있다. 몇 해 전부터 삼성반도체에 근무하던 노동자들이 아주 높은 빈도로 백혈병에 걸려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며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 그러한 문제를 과학자 전문 집단이 나서 풀 수 있는 시스템이 ‘선택과 집중’의 논리 아래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삶을 위한 연구를 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우리 사회 과학 기술 연구의 다양성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과학’이나 ‘민중과학’ 같은 큰 구호를 앞세우기 전에 그 구호들이 담고 있는 문제의식을 깊이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과학은 우리의 삶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의 삶을 근거로 그 삶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서로 공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과학(연구)의 다양성이 소실되고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우리 사회에 속한 다양한 삶들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연구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삶의 많은 부분이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된 듯 무시되고 중요하게 간주되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돈이 되는 과학, 국격을 높이는 과학기술 연구투자’와 같은 구호는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들에서나 의미 있는 구호일 것이다. 만일 국가가 이러한 근거로 과학기술 투자를 실행하고 있다면, 그리하여 그 결과 과학연구의 다양성이 자꾸 소실되고 있다면, 우리 과학의 미래는 개량된 벼 종자와 같은 미래를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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