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의 뒷골목

노예제 (3): 원죄와 구원의 역사

- Beilang(동아시아사상사연구자, 뉴욕이타카)

미국인은 아니었지만 존 뉴튼(John Newton 1725-1807)의 신앙과 삶에 대한 자신의 회고와 후세의 전기적 서술 그리고 신학적 해석은 서구역사가 노예제를 어떻게 단절된 과거의 일부로 ‘정상화’하여 결국 그것을 다루는 것을 회피하는 지를 잘 보여준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애창되는 곡의 하나로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에서도 널리 불렸고 한국에서도 “나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널리 불리고 있는 찬송가 “Amazing Grace”의 가사를 쓴 뉴튼은 과거 노예선을 타고 노예무역을 했던 인물이다. 젊은 시절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나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나서 신의 은총을 깨달고 하나님을 만나는 거듭남을 경험하고 노예선 선장으로 일하다 후에 목사가 되는데 자신이 노예무역을 했던 것을 반성하고 그런 타락한 과거를 가진 자신이 어떻게 신의 은총으로 거듭났는지를 얘기하며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자로 활동하다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노예선 내부의 모습을 찍은 사진

노예선 내부의 모습을 찍은 사진

그런데 노예선은 천오백만 정도로 추산되는 검은 피부의 불행한 영혼들을 짐승처럼 화물처럼 실어 날랐고 약 이백만 명이 그 안에서 즉결처형과 고문, 그리고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간 지상의 연옥이었다. 오죽하면 노예선을 탔던 이들의 입에서 “그 끔찍함이 인간의 상상력을 벗어나는 곳”이라는 소리가 나왔을까? 죽으면 그들의 시신은 상어의 먹이로 던져지고 약 두 달의 항해 끝에 살아남은 자는 ‘신세계’라는 또 다른 지옥으로 팔려갔다. 인간을 짐승으로 다루며 스스로 짐승이 되어버린 존재가 느낀 ‘신의 은총’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거듭난 후에도 여러 해를 노예선 선장으로 일하며 말을 듣지 않는다고 어린 소년들의 엄지손가락을 바이스에 넣고 부숴버린 그가 입었다는 은총은 과연 어떤 것일까?

주로 노예제 철폐론자들이 노예선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그린 노예선의 그림. 최대한 이윤을 올리기 위해 그리고 항해 중에 죽는 노예들을 보충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노예를 실었으며 실제로는 최대 400여명 정원의 배에 700 가까이 싣기도 했다.

주로 노예제 철폐론자들이 노예선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그린 노예선의 그림. 최대한 이윤을 올리기 위해 그리고 항해 중에 죽는 노예들을 보충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노예를 실었으며 실제로는 최대 400여명 정원의 배에 700 가까이 싣기도 했다.

물론 뉴튼이 나중에 죄를 고백했고 용서를 받지 않았느냐는 반론을 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자신의 넘치는 고백과 여러 전기에 등장하는 그에 대한 서사를 살펴보면 그의 삶의 궤적은 불편함과 함께 어떤 작위적인 느낌을 준다. ‘거듭난 노예선장’이라는 불편함은 그가 얼마나 노예들을 인간적으로 다뤘는지를 강조하는 서사로 미화되는데 노예제의 온갖 비인간성에 대한 진지한 반성 없이 문제의 심각성을 호도하는 미국역사속의 “자애로운 노예주”와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뉴튼은 왜 어린 노예들의 엄지손가락을 부순 끔찍한 행위를 고백한 것일까? 이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과 속죄를 구하는 용기 있는 행동이었을까?

여기서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로서 자신의 구원을 얘기하는 맥락에서 그가 과거의 죄악을 강박적으로 반복하여 언급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뉴튼의 경우 이런 식의 삶의 재기술은 기독교의 죄악관 그리고 구원관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구원이라는 것은 죄를 필요조건으로 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 죄의 크기에 비례해 구원의 강도도 커져간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정확하게는 구원 받았다고 주장하거나 믿는 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얼마나 큰 은총을 입은 인간인지, 특별한 선택을 받은 자인지를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가까운 친구의 회고처럼 뉴튼이 “입만 열었다하면 노예선 얘기를 꺼냈다”는 것은 비록 과거의 죄를 참회한다는 형식을 취하곤 있지만 그의 “고백”은 청중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구원받은 사람인가를 입증하는 수사일 뿐, 자신 수하의 수많은 노예들의 고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인다. 아니 좀 심하게 얘기하면 그들의 고통은 거듭난 자, 구원받은 자로소의 자신의 영광을 더욱 빛나게 하는 어둠의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밀양>에 등장하는 유괴살인범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죄책감을 떨치고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지 자신이 죽인 아이나 그 엄마의 고통과 고뇌를 덜어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피해자의 용서를 물리치며 자신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사함을 받았고 아주 평안하다고 뻔뻔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현제의 잣대로 과거를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종종 들린다. 지금은 누구에게나 비난받는 행동이지만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인정한 것에 대해 함부로 현재의 척도를 들이밀며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충고가 종종 과거의 악행이 가진 비윤리성의 충격을 완화하고 그 악행에 빌붙어 이득을 취한 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면소해 보려는 장치로 동원되는 것은 큰 문제다. 노예제가 과연 당시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따져보다. 노예제는 시초부터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흑인도 신의 자식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는 것이 초기의 신학적 판단이었으며 16세기부터 지속적으로 노예제 철폐 운동이 있었으며 미국에서는 퀘이커들을 중심으로 노예제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철폐를 주장하는 세력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강간, 애비와 자식의 윤간, 근친상간, ‘노예 번식’, 딸 성노예로 팔아먹기 등등이 당대에 별다른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동이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서구의 역사는 ‘짐승의 역사’다. (백인들이 진정으로 흑인을 짐승으로 여겼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윤리적 잣대에 의해 걸핏하면 수간을 해댄 짐승이 된다.) 따라서

많은 뉴튼 전기 가운데 하나의 표지. 노예선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그가 작사한 “Amzaing Grace”가 삶의 서사의 정점으로 차용된다.

많은 뉴튼 전기 가운데 하나의 표지. 노예선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그가 작사한 “Amzaing Grace”가 삶의 서사의 정점으로 차용된다.

뉴튼 소개 웹싸이트에서 그의 삶의 전환점을 묘사하는 부분에 삽입된 그림. 노예선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가 마치 무슨 모험가였던 것처럼 묘사된다.

뉴튼 소개 웹싸이트에서 그의 삶의 전환점을 묘사하는 부분에 삽입된 그림. 노예선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가 마치 무슨 모험가였던 것처럼 묘사된다.

노예제가 당시의 상식이었다는 주장은 기만이다. 실제로 노예선 선장같은 도덕적 타락자 가운데서도 아무리 노예라지만 다른 인간의 손가락을 부숴버리는 것 같은 끔찍한 짓은 차마 할 수가 없노라고 고백하는 기록도 남아있다. 끊이지 않았던 철폐운동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느끼고 있었던 노예제의 비윤리성, 부당함에 힘입은 것이다.

노예제 같은 ‘원죄’라 불릴만한 극단적 패악질의 가해자로서 피해자의 고통을 공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그 한계를 인정하고 그 불가능성에 ‘절망’하는 것이 가해자로서의 올바른 자세다. 그 절망을 신의 이름을 빌어 손쉽게 떨쳐버리고 구원받음의 도구로 삼는 것만큼 뻔뻔한 짓이 또 있을까? 그런데 미국역사 기술의 패턴은 이런 뉴턴의 신학적 자기합리화와 아주 유사하다. 오만함이야말로 미국인들이 자신의 과거를 해석하는 핵심적 기조다. 자신들이 행해온 어떤 패악질도 자신들의 위대함을 증거하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는 그런 끔찍한 잘못까지도 인정하는 대단한 나라다, 그런 실수(!)를 딛고 이렇게 위대한 나라를 건설한 선택받은 민족이다, 라는 것이 이들의 뿌리 깊은 역사관이자 국가관이다.

서구가 정작 역사적 죄악과의 화해불가능성을 얘기하기 시작한 것은 홀로코스트 이후의 일이다. 아이메 세자르(Aimé Césaire)가 일직이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그건 홀로코스트가 그 자체로 유별나서가 아니라 이제까지 노예들, 제3세계인들만을 향했던 백인들의 악행이 자신들의 일부를 상대로 저질러졌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홀로코스트 이후에 시를 쓸 수 있는가?”라고 얘기하며 유태인 학살이라는 극단적 폭력의 표상불가능성 앞에 절망했지만 서구의 어느 지성도 노예제를 두고 그렇게 절망한 기록은 보지 못했다. 감수성이 뛰어난 시인인 롱펠로우도 유럽의 낭만주의에 발을 담근 채 영국에서 돌아오는 대서양의 배위에서 노예선에 관한 시(“The Witness”)와 딸을 성노예로 팔아먹는 농장주를 소재로 시로 썼다. (이후 그는 다시는 노예제에 대한 시를 쓰지 않기는 했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이후 역사학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 역사의 트라우마와 역사서술 사이의 관계에 관한 정치한 문제의식 등이 노예제 연구에 뒤늦게 적용된 것은 가해자 역사기술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뉴튼은 양심의 가책 때문이 아니라 건강 때문에 노예선을 떠났다. 그리고 그가 노예제 반대의 깃발을 올린 것은 이미 노예철폐의 여론이 상당히 비등해졌을 때다. 미국의 과거의 잘못에 대한 인정도 이와 동일하다. 부인하고 무시하고 시치미 떼다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을 때가 되면 그 죄악의 참상에 대한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슬그머니 인정하면서 이제 앞으로 나아가자고 선동한다. 물론 그 인정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리고 자신들이 그런 고난을 넘어서서 얼마나 큰 진보를 이룬 위대한 민족인지를 떠벌이며. 왜 미국이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를 끝없이 들먹이며 자국의 원주민의 역사에 훨씬 앞서서 국립 ‘홀로코스트 뮤지엄’을 만들어 특정 기억을 증폭시키는 것은 미국역사 서술의 단계가 아직 뉴튼처럼 자신의 잘못을 되새김 하는-그것이 아무리 문제가 많을 지라고-단계에도 도달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따위 역사관과 국가관을 가진 나라이기에 9.11이 터지고 영원한 가해자에서 한번의 “피해자”의 입장이 되자 자신들이 무고하게 때려잡은 몇 천만의 생명에 대해서는 눈도 깜짝하지 않다가 몇 천이 죽었다고 “세상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며 게거품을 물고 핏발선 눈으로 납치, 고문, 대량학살의 자격을 얻은 것처럼 날뛰며 근 백만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 지난 십년 이 잘난 “선진국”, “민주주의 국가” 미국이 해온 짓거리다. 참 노랫말처럼 “주 은혜 놀랍다.” 이런 짓거리를 아직까지도 하도록 내버려 두시다니. 아, 더욱 더 큰 은총을 내려주시려나?

이것이 우월한 능력과 도덕성을 가졌다고 자부하며 역사의 승자로 군림해온 백인 집단이 자신의 우월성을 합리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해온 짓거리들이다. 언제까지 ‘돌아온 탕자’ 그리고 “역경을 딛고 일어난 승자”류의 유치한 이야기와 소꿉놀이하며 역사를 기만 할 것인가? 과거는 결코 끝나버리거나 청산되지 않는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과거는 유령처럼 우리의 주면을 배회하다가 악몽처럼, 강시처럼 벌떡 되살아나 돌아오곤 한다. 과거는 아무리 멀어도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아스라한 아픔이다. 내가 직접 가해자나 피해자와 연결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삶은 그 모든 과거와 떼어놓을 수 없는 인과의 고리로 얽혀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해자의 죄책감과 피해자의 아픔은 모두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역사는 결코 청산되지 않는다. 위안이 있다면 기약 없이 역사에서 스러져간 어느 원주민 족장의 예언처럼 어쩌면 역사는 언젠가 아픔이 아니라 다시 바람으로 나무로 그리고 꽃으로 나비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지도 모른다는 것이겠다.

응답 3개

  1. Marieh말하길

    Action requires knwgledoe, and now I can act!

  2. 이정림말하길

    미국의 양면이 참으로 …역설적이네요.
    미국은 역시 참 흉도 많은 나라입니다.

  3. 카모마일말하길

    Amazing Grace는 위선의 극치를 보여주는 노래였군요.

    정말 이번편을 읽고 멘탈이 붕괴될 것 같은 충격을 맛 보았습니다.

    유투브에서 정말 아름다운 노래 를 들으며 숨은 비화를 되씹어 보자니 오소소소 소름이 돋으면서 정말 씁쓸하더군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저렇게 까지 이중적 일 수 있다는 사실에 왠지모를 혐오감이 들면서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