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부활절에 부활을 기대하며..

- 김융희

교회는 예수의 40일동안 광야의 고난을 기억하며 속죄의 사순절로 지킨다. 2월 22일-4월 8일의 고난절이 끝나는 지난 4월 8일은 부활절이었다. 부활절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지 사흘만에 다시 사시어 하나님 곁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하는, 크리스챤에게는 가장 뜻있는 거룩한 축제의 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고, 성령으로 오시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것이다. 행사는 참회의 수요 예배, 목요일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세족식, 그리고 성 금요일에 이어,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부활절로 이어진다.

주위에는 항상 있는 일로, 삶이 있는 곳에는 늘 죽음이 함께 있다. 그럼에도 죽음은 슬픈 일이다. 지난 성 금요일과 부활제 사이의 토요일에 우리 교회는 한 교우의 죽음으로 슬픔에 젖었다. 막 펴려는 꽃봉오리의 젊은이가 교통사고로 그만, 피워보지도 못한 채 꽃망울의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는 명문 대학원에서 공학을 수료했고, 지금은 공학 분야의 촉망되는 기대속에 연구를 계속하는 일류 기업의 연구원이었다. 학문과 직장에서 활동이 돋보였으며, 남다른 성실성과 봉사정신의 너무 착했던 그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깝고 짠한 죽음이었다.

그는 세벽 녘 광화문 네거리의 횡단보도에서 사찰을 다녀오는 한 할머니에 의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우리 인간의 생명은 일회성이 철칙이다. 우리 앞에 너무도 감당하기 힘든 한 젊은이의 죽음앞에서 우리들은 이 직면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드려야 할 것인가?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이런 엄청난 사건 앞에서, 창조주까지도 관심 밖에 있는 우리 인간이 과연 영장으로써 자부할 수 있을까? 한창 축제 분위기의 부활절 직전에 착한 젊은 교우, 윤용하의 죽음이 너무 참담해 안타까움을 더한다.

과학정신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안된 사건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따르며 살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런 우리가 이처럼 이해 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너무도 어이없는 한 죽음을 보면서, 부활절을 믿고 지키며 하나님을 따르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무엇인가? 세상을 창조하고 관리하며, 지금도 끊임없이 역사하시고 계신 하나님을 우리는 계속 믿고 따라야 하며, 하나님은 그런 능력의 하나님이실까? “신이 우리에게 절망을 주는 것은 우리를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생명을 자각시키기 위함이라”고 한 H. 헤세의 말은 무었을 뜻하는 것일까?

성경에는 예수 부활의 장면을 여러 곳에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 24장에 따른 엠마오의 이야기는 가장 감동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음은 누가복음서 24장 1-12절의 내용이다.

“이레의 첫날 이른 새벽에,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무덤 어귀를 막는 돌이 무덤에서 굴러져 나간 것을 보았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의 시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데, 눈 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가 갑자기 그들 앞에 나섰다. 여자들은 두려워서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있는데, 그 남자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 고 하셨다.”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였다.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와서,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알렸다.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이다. 이 여자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이 일을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이 말이 어처구니 없는 말로 들렸으므로,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서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굽혀서 들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시신을 감았던 삼베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누가복음서 24장 1-12절)“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었든, 사람은 각자 자기의 삶속에서 세상과 우주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지평을 갖고 산다. 그러면서 우리는 꼭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이해하기 어렵고 슬픈 것이다. 맑고 순진한 생명의 저력임에도, 인간은 누구라도, 주어진 자기의 삶을 살 뿐, 그 어떤 생명도 책임질 수 없다. 그는 남을 위해 앞장서며 사랑하고 봉사로 믿음과 애정을 심어준 사람이었다. 공부도 잘했고 나누랄 데가 없게 심정도 깊고 항상 성실했던 윤용하. 그의 죽엄 앞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외경이나 사랑보다는 오히려 애정을 거두고 싶어진다. 어떤 알 수 없는 반발과 증오심에 분통이라도 터트리고 싶다.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된 부활의 사실을 믿고 따르는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에게는 그것이 한 젊은이의 어이없는 죽음앞에 절망하며 절실한 문제로 혼란스럽다. 어떻게 착하고 좋은 사람이 아무런 과실도 이유도 없이 무참하게 죽어야 한다는 그 사실이, 너무도 불가해의 절실한 문제인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밖에는, 무엇이나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가 예외 없이 결국엔 이 세상에서 죽는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신 이적이 성경에 있긴하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위대해도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으로써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고 심오한 세계와, 그 전지 전능함 앞에서는 무력하고 미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죽음을 되살릴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

우주적 사랑의 정점인 오메가 포인트의 수렴 과정을 이끌어 가신 하나님. 인간의 능력에 기초한 과학과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계시에 관심인 신앙의 기독교를 믿는 우리들.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물질적 풍요와 편리의 추구, 물질 세계의 본질과 응용에 대한 탐구는, 마침내 신비의 영역에 속해 있는 생명 현상까지 도전하는 현존의 우리들이다. 이 지상에 늘 있는 죽음을 은은히 감싸서 다시 탄생에 이르는 길은 없는가. 종교적 내면 세계의 추구를 그 본으로 하는 기독인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리석고 순진하게 찾아 나서는 꿈을 갖는다. 더 솔직히 말씀드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부활처럼 젊고 착한 윤용하가 살아 다시 우리와 함께 살았으면 싶다. 용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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