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규칙, 지킬까 말까. 1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1. 법의 근거

홍아야, 너는 세상에 ‘하라’는 말보다 ‘말라’는 말이 더 많아서 짜증난 일이 없니. 또 왜 하거나 말라는 건지 이유나 근거가 분명하지도 않은데 어른들이 규칙이라며 강요하면 짜증나지 않니. 때로는 하기 싫은 것은 하라고 하고 싶은 것은 말라고 하는 것이 짜증나지 않니. 그러니 홍아야, 규칙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규칙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왜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만들고 어디까지 지키거나 어길 건지를 결정할 수 있는 그 기준을 찾아보자. 만약에 공자님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지 않겠니.

근데 규칙이란 게 뭐지. 사전에 보니 ‘여럿이 지키기로 정한 법칙’이란다. 24시간 동안 지구가 자전하여 하루가 되는 자연법칙을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건널목에서 빨간불일 때는 멈춰 서야하는 법칙은 그걸 지킬 인간이 만든 거구나. 원래부터 거기에 길이나 신호등이 있었던 게 아닌 걸로 알 수 있지. 그런데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이 같고 다른 게 뭐지. 둘 다 일정한 움직임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것은 같아. 그러나 자연법칙은 자연의 작용이나 작동을 일정하게 되풀이 하도록 규정하고 인간의 법칙 즉 규칙은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의 행동을 일정하게 되풀이 하게 규정하려는 게 다르구나.

그런데 왜 자연과 인간의 움직임을 ‘일정하게’ 되풀이해야 하지? 만약에 지구의 자전 속도가 일정하지 않아서 하루의 시간이 들쑥날쑥하다면 지구에 어떤 혼란이 올까. 생명의 존재도 불가능할 거야. 호흡이나 맥박 등 생명체의 생리작용도 ‘규칙적’이 아니면 생존할 수 없으니 생명체는 각각 다른 규칙으로 살아가는 거구나. 마찬가지로 ‘도적질 하지 말라’는 규칙이 없다면 어떤 혼란이 올까. 공격적인 인간성 때문에 생기는 사회적인 혼란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살려고 인간은 규칙을 만들어 지킬 거야. 결과적으로만 말한다면 인간이 모든 행위는 더 잘 살기 위한 동기와 의도와 목적을 가지듯이 규칙을 만들어 지키려는 까닭도 더 잘 살기 위해서일 것이야. 물론 잘못된 규칙은 사람을 더 못 살게 하며, 또 더 잘 산다는 뜻이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그럼 인간이 만들고 지키려는 규칙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네가 만들어 지키려는 일과표도 ‘일정한’ 삶을 되풀이하기 위한 규칙이란다. 또 운동경기에 규칙이 있구나. 규칙이 없다면 경기 자체가 생기지 않았겠지. 또 학교에는 교칙이라는 것이 있어. 또 함께 이익을 얻으려는 상거래에서 거래 조건에 대한 계약들도 반드시 필요한 규칙이고. 그밖에 서로 부딪치지 않고 도와서 잘 사는 행동방식을 정한 도덕적 규칙과 법률적 규칙도 있구나. 그런데 규칙들 가운데 도덕과 법률은 한 사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란다. 우리가 지킬 건가 말 건가를 따져볼 규칙은 그러므로 주로 도덕과 법률이야.

그런데 도덕과 법은 몇 가지 구별 기준이 있단다. 둘 다 일정한 행동을 요구하지만 관심 방향은 달라. 법이 눈에 보이는 행동의 외적인 결과를 따져 상벌을 주려하지만 도덕은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내적인 동기인 인간성을 따져 칭찬하든지 비난한단다. 그리고 법률은 주로하지 말라는 행동을 규정하고 도덕은 주로 마땅히 해야 될 행동을 규정한단다. 그러므로 금지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법률로 벌줄 수가 없지만, 도덕은 사회 구성원이 따르고 지키겠다고 동의했던 규칙들이라서 누구든지 내면화된 규칙을 지키고 따르도록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요구한단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쓰러져 있는 사람을 모른 체했대서 법으로는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아도 그런 경우 대부분의 인간은 도덕적으로 자신의 인간성 상실을 부끄러워한단다.

그러니까 법을 만든 쪽은 법을 지킬 쪽이 동의를 하든 말든 법을 만들어 이를 지키도록 강요하고 지키면 상을 어기면 벌을 주지만, 도덕은 스스로 세운 행동 기준이거나 남들의 행동 기준을 받아들인 규칙이라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며 내면화되어 있으며 이 개인적인 기준에 어긋난 자신을 자책하고 반성하는 것으로 끝난단다. 그리고 법은 사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도덕적 규칙만을 간추려 체계적으로 규정한 것이므로 법과 도덕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단다. 그러니까 법은 도덕의 필요한 최소한의 일부인 셈이지.

그런데 홍아야, 법이 뭐 길래 지켜야하는 거지. 중국에서는 고대에서부터 도가와 유가와 법가들이 법을 지켜야하는 이유나 근거를 따지는데 서로 다른 근거와 이유를 대며 논쟁을 벌렸단다. 그러나 서양에서 법을 따르고 지켜야하는 이유나 근거를 따지기 시작한 것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 근대에 들어서야. 고대에는 관습법을, 중세에는 기독교가 말하는 신이 내린 법을 믿었어. 그러니 법을 어떻게 해야 잘 지킬 수 있는지만 물었지 법이 무엇이어야 하고 왜 지켜야하는지 물을 필요가 없었어.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신이 요구하는 행동방식을 버리고 인간이 법을 만들려고 하다 보니 법이 대체 무엇이고 왜 지켜야하며 어떻게 좋은 법을 만들 수 있는지를 반성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어.

먼저 자연법주의자들이 법이 무엇이고 왜 지켜야하는지, 법의 근거에 대한 물음에 대답했어. 자연이 규칙적으로 작용하거나 작동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아 자연이 법칙에 따르고 있듯이 인간도 혼란에서 벗어나 질서 있게 잘 살려면 법칙을 잘 따르고 지켜져야 한다고. 그러자 실정법주의자들은 법의 내용이 정당한 행위를 요구해서가 아니라 법을 만들어 이를 따를 것을 강요하는 주체의 강제력이 법의 근거라고 대답했어. 그러자 이번에는 법의 정당성보다는 강제력을 중시하는 실정법주의에 반대하는 법 형식주의자들이 법은 자율성과 자발성을 가진 인간의 이성의 반영이라며 법의 근거를 인간 이성이라고 대답한 거야.

칸트는 순수이성이 법의 근거라지만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욕심에 물들어 있어서 순수할 수가 없다는 게 문제야. 법을 만드는 자들의 욕심이 내비치는 악법들을 보면 법률이 불완전하고 불순한 만큼 이성도 불완전하고 불순하다는 거지. 그래서 법의 다른 근거를 찾았어. 법의 근거가 상위 규범이 위임해준 것이라는 위임설이나, 피지배자의 승인설이나, 다수의 여론에 불과하다는 여론설 또는 다수설 등이 주장되었어. 그러나 그 어느 학설도 다른 설을 압도할 만큼 타당하고 충분할 만한 근거를 지닌 것이 아니라서 아직도 법의 근거를 정확하게 짚어내지는 못하고 있어.

홍아는 말할 거야. 그럼, 하버지의 법의 근거는 뭐야. 홍아야 하버지의 법의 근거를 말하기 전에 대표적인 법의 근거에 대한 학설들을 좀 더 살펴보고 나서 이어지는 하버지의 주장을 들어 다오.

강제력이 없는 도덕적인 규칙에서 강제력을 가진 법률적 규칙을 분리시키 버린 실정법주의자들 또는 법 실증주의자들은 <자연 상태에 선악이 없다>고 주장해. 그들은 경찰과 군대라는 합법적인 폭력을 지닌 국가의 실정법 테두리 밖에서는 아무도 선악을 규정해서 상벌을 줄 수 없다는 거야. 그들은 도덕적 규칙들의 선악에 대한 사회적인 칭찬과 비난은 강제력에 따른 실효성이 없으므로 있으나마나라는 거지. 그러나 자연법주의자들은 이미 실정법을 만들기 전에 우리가 하거나 말아야 행동이 자연 상태에서 이미 정해져 있대. 그들은 <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자연 상태에서는 이미 선악이 정해져 있다>고 보니까 신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 선이고 이를 거스르는 것이 악이래. 그러므로 법과 도덕 즉 규칙의 근거는 신의 의지래. 이는 동양의 유교에서 자연이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이치(理致)이듯이 인간이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인의(仁義) 즉 도덕과 법이라는 주장과 같아.

그러나 실정법주의자인 스피노자는 자연법주의자들의 주장을 논박했어. “만약 자연의 질서 즉 신의 의지가 있어서 인간이 이성이 신의 의지에 따라 선하게 살도록 정해져 있었다면 인간은 누구나 필연적으로 이성에 따라 선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인간이 이성보다는 오히려 욕망을 따라 악하게 산다. 그러므로 오히려 욕망에 따라 악하게 사는 것 또한 자연의 질서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자연법주의자들의 ‘신이 만든 자연의 법칙’이란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법의 근거를 일반/보편 의지에서 찾아. 다른 실정법주의자들은 군주가 됐든 귀족이 됐든 강제력만 가지고 있다면 그들의 명령인 법을 만들어 피지배자에게 강요하면 법이 된다고 믿었어. 그러나 군주제보다 공화제를 선호하는 스피노자는 다수는 언제나 선하고 소수는 언제나 악하다고 믿었어. 마르크스도 노동자 편에 서서 자본가들을 ‘한 줌의 적들’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법의 근거를 일반/보편 의지에서 찾는 것으로 보여.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을 실정법주의와 구별하여 이들의 주장을 일반/보편 의지설 또는 다수설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거야.

법의 근거를 신성이나 인간성, 자연법칙, 사회의 역학관계 등에서 찾을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법의 근거를 못 찾는대서 법을 없애 버리고 법 없이 살 수도 없잖아. 그래서 다수설이 법의 근거를 기존의 사회 유지에 필요한 잠정적인 유용성에서 찾으려고 했어. 다수설은 비록 법이 완전하지 않더라도 혼란을 피할 수 있는 잠정적인 유용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수의 의견을 법으로 확정해야 한다고. 그러나 다수가 만들었다고 해도 그 법이 반드시 정당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법의 근거 찾기가 끝난 것은 아니야.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을 법의 근거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혼란보다는 질서를 원하는 다수의 의견이 법의 근거래.

그러나 공동체가 커지면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다수가 다 함께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을 만들 사람을 뽑아 법 만들기를 맡기게 되잖아. 그러면 위임받은 소수가 위임해준 다수의 의견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 그 소수가 더 큰 몫을 차지하는 법을 만들기 때문에 법이 그들의 이익을 지키는 수단이 돼. 같은 공동체 안에서 법이 강자와 약자 누구의 이익을 옹호하는가, 하는 문제는 이미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피스트들이 제기한 문제였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미국식 민주주의에서도 보듯이 사회적인 생산물을 다수가 평등하게 나눠 가지는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권력자와 부자들이 더 많이 차지하는 법을 만들게 돼. 권력과 돈이 공모하여 대중이 자신을 배반하는 선택을 하도록 여론을 조작하고 이를 보고 들은 대중은 그 소수의 배반자들을 계속해서 지지하기 때문이야. 따라서 다수설이나 여론설도 껍데기 민주주의를 포장하는 학설일 수 있단다. 그래서 미국에 빈익빈 부익부를 갈수록 더하게 만들지.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법은 약자나 소수자의 이익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강자나 다수자의 이익을 강제하는 장치라고 주장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제나 민주주의가 전제하는 ‘소수보다 다수가 더 선하다’는 명제를 뒤집어서 더 많은 경우 다수가 더 많이 악했다는 것을 밝혀내. 언제나 다수가 정상이고 소수는 비정상이라며 다수자가 소수자를 한 구석으로 몰아부처서 현실에 발을 못 붙이게 휘두르는 폭력을 다수라서 의식하지 못할 뿐이라는 거야. 근대까지 어느 사회나 소수자인 문둥병자는 게토(빈민촌)로 몰아넣었단다. 문둥병자만이 아니라 유태인이나 집시들이나 흑인들 등 이방인이나 이교자들, 천하다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오늘날에는 한국의 도회지 아파트 단지에서도 임대아파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한단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결론은 다수자나 강자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악법에 불복종 운동을 펼쳐 법의 효력을 잃게 하여 개정시키거나 없애버려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또 한 가지 법의 문제인데 법이 자유나 정의, 평등이 실현되지 않아서 생기는 인간의 모든 갈등을 다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거야. 1960년대 중국의 문화 혁명 당시 한 여성 노동자가 이렇게 자아비판을 했대. “세상이 바뀌어 다른 건 다 평등해서 좋은데, 다수의 여성들이 한 남성을 좋아하는 일이 벌어질 때가 있다. 다른 건 다 평등하게 나눌 수 있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나누어 가질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사회주의적인 이상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개인적인 인간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줘. 법이 해결하지 못하는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끝에 가서 생각해 보자.

앞서의 논의들은 법의 근거를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고 또 거꾸로 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가를 보여주는구나. 이 모든 법 이론들이 법이라는 규칙이 정당하다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타당하고도 충분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지? 공자는 ‘내 나이 칠십이 되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또는 규칙)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했단다. 홍아야, 우리도 하거나 말아야할 행동 판단의 기준이 분명하여 공자와 같이 저절로 규칙에 맞는 정당한 행동만을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만약에 우리가 남들과 더불어 살면서 해야 할 것과 말아야 할 것을 저절로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자유롭겠니. 그리 되려면 우리도 우리의 규칙의 근거를 찾아내야 하겠다. 감히 우리 같은 범인이 어린나이에 공자의 경지에 이를 수는 없으나 그래도 성인처럼 자유를 얻기 위해 죽을 때까지 이 노력을 멈출 수는 없어. 그러니 다음 글에서 우리가 하고 말 것을 어떻게 하면 쉽게 판단할 수 있는지 판단의 기준이 될 만한 규칙의 근거를 함께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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