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 남은 사람들

일신이생(一身二生), 김우진의 아비 초정 김성규

- 권보드래

극작가 김우진은 남성으로선 드물게 생애가 온통 스캔들화해 버린 경우다. 여성이야, 그것도 근대 초기의 신여성이야 소문과 스캔들 속에 갇혀 살았지만, 남성으로서 김우진만큼 풍문 속에 소진돼 버린 경우는 달리 찾기 어렵다. 1926년 8월 일본서 조선을 향해 오던 여객선에서 실종됨으로써 김우진은 지금껏 한 세기 동안 ‘정사’의 주인공으로 남았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사의 찬미」의 가수 윤심덕의 애인이라는 틀로써. 둘에 대한 관심은 좀체 사그라들지 않아, 자살로 위장한 후 해외로 도피했다는 둥, 유럽 어느 도시서 함께 살림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 둥, 여러 해 동안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생전에 발표한 글은 몇 되지 않지만, 유고로 남은 김우진의 평론이며 희곡을 보면 그 밀도가 만만찮다는 사실을 어렵잖게 눈치 챌 수 있다. 니체와 버나드 쇼를 사랑했던 김우진은 창작에서도 극적인 고뇌를 형상화해 냈고, 기대와 사랑이 속박이 되는 가족 관계와, 고집스런 정직성이 일의 논리와 충돌하는 사회적 생활을 여실하게 그렸다. 그 중 봉건과 근대가 얽히고설켜 어지러운 파열음을 내는 가족이라는 장에서 초점이 되는 것은 늘 아버지다. 초정 김성규(1863~1935). 개혁론자였던 아버지 아래서 자라나 일찍부터 산술과 외국어를 익혔고, 광무국 주사라는 한직에서 출발했으나 충청․강원 양도의 관찰사를 지냄으로써 환로(宦路)의 영광도 제법 누렸던 김성규는, “정력, 재능, 천재, 통찰력”을 두루 갖춘 야심가이자 성공가였다.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가계도를 따져보면 김성규는 하나뿐인 적자가 죽은 후 반쯤 적자처럼 자라난 서자였던 것 같다. 적장자는 성규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고, 적장자가 남긴 아들은 성규보다 나이가 많았으나 늦도록 말썽을 끼친 골칫거리였다. 성격도 편협하고 모질어, 김우진이 「난파」라는 희곡에서 표현했듯 김성규 모자는 “제 집 개보다도” 더한 멸시를 받으며 살았던 모양이다. 전환기의 풍조를 타고 현감으로, 군수로, 관찰사로 승승장구했던 김성규는 김우진을 낳을 무렵(1897년) 전라남도 장성으로 이주하고 생모의 묘도 이장해 온다. 몇 년 후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목포와 장성 일대를 기반으로 대지주가 되는데, 이 지역에는 별반 기반이 없었던 사람의 성공이라 자못 놀랍다. 하긴, 김성규는 철저한 섭생으로 나병까지 이겨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놀라운 의지력의 소유자였다.

자식들을 가르칠 때도 김성규의 성격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진이 소학교에 다닐 때 김성규는 방학 때도 6시 기상, 세수하고 청소한 후 8시까지 복습 1회, 오전과 오후에 각각 2회․3회씩으로 일과를 철저히 통제했고, 구마모토에 아들 삼형제를 유학시켰을 때는 동생들이 맏형 우진보다 “늦게 자리를 깔며 아침에는 먼저 일어날 것”을 요구했다. 서자였다는 추측이 사실이라면, 김성규의 이런 집념이랄까 엄격성은 가문의 정통성을 제 것으로 하려는 데서도 발휘되었던 듯하다. 조카 호진이 호남 일원에 “서자가 발호하는 바람에 적손이 망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가운데, 김성규는 증조부에서부터 부친에까지 이르는 3대의 문집을 낼 것을 열망했고 안동 김씨 일문을 휘하에 두고자 고심했다. 1923년, 죽을 고비에 처했을 때도 김성규를 일으킨 것은 “삼세(三世) 문집을 내야 한다”는 열망이었다.

토지 개혁 업무를 주도했고 전권대사 부임을 위해 홍콩에까지 다녀왔던 근대의 선구자, 초정 김성규에게 가문이란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고군분투하여 쌓은 이력과 재산, 그 근거는 근대 생활세계에서의 적응력이었건만, 김성규는 이것을 봉건의 적통(嫡統)임을 증명하기 위해 쓰고 있다. 뒤란에 생모의 사당을 지었고, 안동 김씨가 신라 적부터 있었던 성씨임을 자부했으며, 조카의 패악을 견디면서 집안의 실질적 수장이 되기를 갈망했다. 아마 김성규는 근대적 규율을 통해 추진되는 봉건적 야심이라는 복잡한 구조물을 아들에게도 물려주고자 했던 것 같다. 전 재산을 기탁해 세운 상성합명회사를 족친의 생활 기반으로 제공하면서, 김성규는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우진을 회사 책임자로 불러들인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면서도 “그이가 선 길과 내가 선 길 사이에는 태평양이 있습니다. 어떻게 넘어 뜁니까.”라고 탄식했던 김우진이 가출한 것은 3년 후의 일이다. 진작 결혼해 1남1녀를 두었던 김우진은 가족과 일체의 인연을 끊을 것을 선언했고 독일로, 혹은 러시아로 떠날 계획을 세웠지만,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봉건과 근대가 뒤얽힌 모순을 살았던 아버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탓이었을까.

응답 1개

  1. 탱탱말하길

    김우진의 삶의 기록을 보니 그의 작품들을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어떤 호흡의 흔적들이 남아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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