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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칼럼

마을만들기 파트3-3 그림자에 그늘 질 때 -3.12후쿠시마, 5.15오키나와, 그리고 이토 타리 퍼포먼스-

- 신지영

* 이토 타리의 목소리.

“제가 이토 타리예요.”
“앗, 처음 뵙겠습니다! 퍼포먼스 보러 가려고 하는데요….”
“길은 알아요? 주택가에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을텐데.”
“실은 제가 길치라서…”
“못 찾으면 이 번호 말고 갤러리로 전화해요. 이 번호는 집번호거든요. 아니면 내 핸드폰으로. 번호는XXXX…”

이토타리는 여성 퍼포머다. 그리고 위의 대화는 내가 그녀와 나눈 최초의 대화다. 갤러리에 전화를 건다는 것이 이토타리 자택으로 전화를 해 버린 것이다. 이 첫 전화대화에서 나는 이토 타리의 개인 핸드폰 번호를 알게 되었다.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바로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는 목소리 앞에서, 나는 멈칫했다. 이 느낌은 뭐지? 뭔가 일반적인 통화와는 달랐다. 처음 듣는, 이상한 일본어 억양의, 갑자기 집으로 걸려온 전화 속 낯선 이와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화하고, 어느새 쑤욱~ 내 바로 옆까지 다가설 수 있는 걸까? 이 강한 직접성, 이 부드러운 신뢰.

사실 우리는 이토타리처럼 핸드폰 번호를 알려줘 본 적이 없으며, 또 이토 타리처럼은 핸드폰 번호를 알려 주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산다. 단지 핸드폰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날의 통화에서 타인을 만날 때 늘 고려해야 하는 위계, 도덕, 권력, 그리고 그러한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일순 사라지고, 어떤 존재와 직접 대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몸이 마치 내 옆에 있는 것처럼 마치 먼 옛날부터 그랬던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4월 7일 6시, 갤러리 브로켄, 이토타리 아트 액션2012. “오키나와 편: 하나의 응답- 배봉기씨와 세어지지 않는 여성들” “후쿠시마편: 방사능에 색이 칠해저 않기 때문에 다행일지 몰라…라고 깊은 한숨…을 쉬다”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나는 일정을 되뇌어 보았다.

* 메일 덜컥병과 관계의 식민지성.

새학기가 되면 부산해진다. 전화도 메일도. 마음은 더욱더. 밥한끼, 차한잔, 이거 번역 조금, 저거 통역조금, 이 자료 조금, 이 글 조금 등을 모으면 산더미가 된다.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나는 메일이 잔뜩 도착해 있으면 가슴부터 덜컥한다. 별로 울리지 않는 전화가 울리면 깜짝 놀란다. 일명 새학기-메일-덜컥병이라고 부르는 증상이다. 그런 자신을 약간 희화화해서 갑자기 늘어나는 새학기 인간관계의 부담을 가볍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비단 나만의 증상은 아닐 것이다. 이 두려움과 부담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나는 때때로 이처럼 관계를 맺길 두려워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 만나는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을 본다. 우리는 “A와 만나는 것이 부담이 된다”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A라는 개인이 아니라 가 아니라 나와 A의 관계를 결정짓고 있는 권력, 도덕, 제도다. 보이지 않지만 강한 시선으로 작동해서 나와 A 사이에 끼어들어 우리들의 직접적인 만남을 불가능하게 하는 권력. 그 밑에서 이유도 없이 갈등/경쟁/분열하고 두려워하는 관계성이야말로 식민지성의 증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메일을 기다리고 사람들을 만나길 원하고 바라고 희망한다.

메일 덜컥 병은 일상적이고 가벼운 예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성을 통제/감시하는 강력한권력의 시선 하에 놓여 있을 때는 어떨까? 이는 아메리카와 일본의 점령당했던 오키나와 속에서, 다양한 분열을 낳았다. 1972년 5월 15일의 복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갈등과 분열들은 그간 오키나와 안에서 축적되어 온 점령자들의 폭력성이 거꾸로 드러난 것이었다. 후쿠시마에서는 3월 12일의 원전 사고 이후, 피난한 사람과 남은 자, 피난가능여부, 방사능 오염 정도, 원전을 받아들인 마을과 그렇지 않은 마을 등 다양한 분열과 갈등이 마을에서 가정 깊숙이에서 나타나고 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옆집이 아니라 아메리카이거나 일본정부이거나 도쿄전력이거나 함에도, 우리는 옆집사람과 친구들과 가족들과 싸운다, 아메리카나 일본정부나 도쿄전력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의 타인을 두려워한다.

올해는 미국의 점령지였던 오키나와가 일본을 반환(1972년 5월 15일)된 지 40년째이며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 및 지진 쓰나미의 피해가 발생(2011년 3월 11일~12일)한 지 일년째가 된다. 나는 5월 15일의 한달 전, 그리고 재해 이후 정부가 최초로 원전 재가동을 선언한 4월 13일 직후에 이 글을 쓰고 있다. 후쿠이(福井)현 오이(大飯) 원전의 안정성이 확보되었으며 여름의 전략사용을 대비해야 한다는 이유이다. 오키나와 반환이라는 국제적 퍼포먼스는 오키나와에서 사는 오키나와인을 점령에서 해방시켜 준 것이 아니라 일본의 미군기지를 모두 오키나와에 설치함으로써 이중의 점령-지배 하에 놓이게 했다. 그곳에 살던 이족들은 또한 일본정부로 반환됨에 따라서 불법 체류자로 돌변했다. 정부의 안정성 검사는 결코 원전 근처에 사는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우리의 에너지 우리들의 직접적인 관계는 국제 관계, 국가 과학, 국가 보호를 받는 대기업 앞에서 굳게 입을 다문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단지 우리들을 분열시키기만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 싸우고 수없이 많은 갈래로 분열되는 상황에 놓인 우리는, 항상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동일한 두려움의 대상을 끊임없이 확인해 왔다. 그 두려움의 대상을 직시하는 순간, 우리들의 갈등과 분열과 두려움은 뭉쳐진 에너지로 화르르 타오를 가능을 지닌 무정형의 무엇이다. 그리고 나는 서로의 눈동자에서 확인하곤 하는 그 무정형의 에너지를 더 깊이 몰두하고 탐구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나약함에 안타까움을 느끼곤 한다. 이토타리는 바로 그 부분에 서서 그 눈동자들을 비명들을 어떤 매개도 없이 어떤 권력도 없이 직접 연결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바람이 아주 세었던 그 봄밤, 흔히들 비참하다고 여기곤 하는 그녀들의 삶 속으로 파고든 그녀의 퍼포먼스를 보고,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지금도 나는 강하고 부드러운 힘에 몸을 기꺼이 내어주듯이 그 장면들을 문득 문득 떠올린다.

* 배봉기, 셀 수 없는/세어지길 원치 않는 여자들

일본에 온 직후였던가? 나는 이토 타리씨의 퍼포먼스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정신없이 졸고 말았다. 그 직전에 낯선 이와 일본어로 장시간 대화한 탓이기도 했지만, 이토타리씨의 퍼포먼스가 너무 직접적으로 비참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의식을 약간 흐릿하게 해서 마음을 보호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는 똑바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직접적이고 강렬한 고발성이 부드럽고 따뜻한 힘을 동반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강하고 날카로운 눈빛의 이토타리는 퍼포먼스를 할수록 이토타리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그때마다 망각된 그녀들의 몸이 비명들이 육박해 왔다.

첫 번째 퍼포먼스는 “하나의 응답- 배봉기씨와 세어지지 않는 여자들”이었다. 1944년에서 2000년까지 오키나와의 전쟁과 군대와 미군기지 주변에서 희생된 위안부나 성매매 여성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퍼포먼스는 오키나와인이 아니라 재일 조선인 배봉기 할머니의 사연에서 시작되었다. 배봉기 할머니는 한국에서는 오키나와 할머니로 통한다. 1914년 충청남도 예산군 신례원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집을 나간 7살 때부터 가난에 시달린다. 17세에 결혼했으나 고통스러운 결혼생활을 견디지 못해 도망쳐 북쪽 흥남 부둣가에서 막노동을 한다. 그러던 중 “입을 벌리고 있으면 바나나가 떨어지는 곳” “돈 많이 벌 수 있는 곳”이라는 속임수에 넘어가 일본말도 전혀 모른 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배에 몸을 싣는다. 그녀는 녹취록에서 “민간인이 아니었어요 일본군이 오키나와로 데리고 왔어요”라고 말문을 연다. 모지, 가고시마, 오키나와를 거쳐, 도카시키섬에 도착한 것은 1944년 10월. 위안부로서 지내다가 1945년 3월 23일에 시작된 오키나와 전쟁에 휘말려 산 속에서 일본군과 함께 숨어 지낸다. 일본 패전 후 막노동과 성매매를 전전하다가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반환되자, 그녀는 갑자기 ‘외국인 불법 체류자’로 분류된다. 그녀는 외국인 등록증을 받기 위해서 스스로가 위안부였음을 밝힌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스스로 위안부였음을 증언하기 이전에, 1972년 오키나와의 복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가 위안부였음을 밝힌 배봉기 할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증언록에서 “나는 정말 나라(일본을 의미)를 위해서 고생했어요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을 만큼…”이라고 몇 번이건 반복한다.

이토타리씨는 땅바닥에 못을 마구 떨어뜨렸다. 못이 튀어오르고 떨어지고 부딪치는 소리가 오키나와 기지 근처 환락가의 영상을 배경으로 공간을 가득 채운다. 그녀는 이 못들을 처음보는 듯이 호기심과 두려움에 가득한 몸짓으로 건드려보고 입에 물어보고 바라보았다. 그럴 때마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낯선 배에 올랐던 그녀들의 호기심과 희망에 가득찬 처음의 몸이 떠올랐다. 퍼포먼스의 절정은 흩뿌려진 못 위에 여성들의 속옷을 하나씩 덮으면서, 그 위를 테이프로 붙이는 장면이었다. 그 테이프에는 미군기지 주변에서 온갖 방법으로 성폭행을 당해 왔음에도, 가해자인 미군에게는 정당한 처벌이 내려지지 않았던 사연들이 깨알같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각각의 사례에 따라 테이프의 길이도 달랐다. 이 행위는 못으로 상징되는 미군기지에 의해 세어지지 못한 여성들의 피해를 고발하고 그녀들을 기억해 주기 위한것이었다. 그렇게 몸을 파고들고 몸을 속박하는 방식으로만 그녀들은 바다를 건너 이동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들이 세어지기를 바라는 동시에, 남성적인/법정의/신문기사의 언어로는 세어지길 거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옷에 강간내용을 적은 테이프가 붙여질 때마다 마치 그 못이 그녀들의 몸을 파고드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는 그녀들이 처음 배에 올랐을 때 비록 속은 꿈이었으나 그들이 가졌던 어떤 희망과 호기심들은 그 자체로 강한 에너지를 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들의 호기심, 그녀들의 희망, 그녀들의 고통은 기존의 법과 신문의 언어로는 세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배봉기 할머니는 스스로가 위안부임을 밝힘으로써 1975년 1월 외국인 등록을 인정받는다. 배봉기 할머니에 대한 기사를 본 가와다 후미코씨는 10년간의 인터뷰와 현지답사를 거쳐 1987년 <빨간 기와집>이라는 논픽션을 낸다. 가와다 후미코씨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배봉기씨는 만신창이 된 자신의 몸을 도려내듯이 지난 이야기를 토해냈다. 처음에는 일본의 과거사를 고발해야겠다는 목적으로 시작한 일인데 결과적으로 한 개인의 아픈 상처를 가혹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들춰내고 말았다. 그 죄책감 때문에 그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 90년에 배봉기씨를 찾아갔던 윤정옥 연구자는 88년에 찾아갔을 때는 면담을 거절당했다고 한다. 아픈 기억을 들춰내는 사람들에게 시달린 결과 사람 기피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세어지지 않는 그녀들은 ‘그들의 방식’으로는 세어지길 원치 않았다. 그리고 그녀들의 삶은 기억과 망각이 주는 이 모든 이중 삼중의 고통 속에서 유유히 지속되어 왔다.

* 방사능에 색이 칠해져 있지 않아 다행일지도 몰라…. 라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두 번째 퍼포먼스는 “후쿠시마: 방사능에 색이 칠해져 있지 않아 다행일지도 몰라… 라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였다. 이 제목은 이토 타리씨를 후쿠시마로 불러 퍼포먼스를 하도록 주선했던 그녀의 친구가 한 말이다. 이 말은 미묘한 울림이 있다. 상식적으로 보면 이 말은, “방사능에 색이 칠해져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색이 칠해져 있지 않아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깊은 한숨이 되어 있다. 방사능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철저한 절망 속의 표현이다.
이토 타리는 양파에 물감을 칠하거나 방사능 알람 메터의 소리를 들려주거나, 온몸을 동여맨 줄이 번쩍거리게 하거나 함으로써 방사능에 고통받는 우리의 몸을 드러냈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벗어나고 싶어서 끊임없이 달라붙는 방사능은, 이렇게 보이지 않덧 것, 들리지 않던 것, 우리들의 타자와 만날 때 존재를 드러냈다. 그리고 여성에게 가장 강력한 타자와의 만남은 출산의 경험일 것이다. 이토타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벽에 붙여진 끈적이는 두꺼운 고무들을 떼려고 노력한다. 길게 늘어진 고무들은 마치 여성의 자궁처럼 보였다. 그 고무를 떼려고 늘리면 다시 벽으로 되돌아갔다. 방사능과 함께 자라는 자궁 속 태아처럼. 그리고 (장애인) 아이가 태어날 때 방사능의 고통이 우리 눈 앞에 드러날는지도 모른다.

퍼포먼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하나의 테이프를 읽는다. “미군들은 기지 주변에 살던 장애인 여성을 4일간 기지 안에 감금한 채 강간한 후 그녀를 기지 밖으로 내보냈다.” 후쿠시마에서 방사능이 오염되어 장애아로 태어날 가능성을 품고 몸부림치던 그 몸은 어느 순간 강간 당해 기지 밖으로 내버려진 장애인 그녀의 몸과 겹쳐지고 있었다. 감금당하고 강간당한 그녀가 기지 밖으로 나왔을 때, 방사능으로 고통당한 신체 속에서 장애인 아기가 태어날 때, 그러한 채로 삶이 결연히 이어질 때, 이 삶은 어떻게 세어지고 어떻게 칠해질 수 있을까? 방사능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는 방사능이 차라리 보이지 않아 망각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말하는 철저한 절망 속에서의 삶이.

* 그녀가 세상으로 나왔을 때. 그림자에 그늘이 질 때

우주 속 모든 생물과 죽은 것을 포함하여 “관계”라는 것은 붙거나 떨어지거나 두 가지 상태로 나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 두가지 상태 사이에는 붙거나 떨어진 흔적들, 자국들, 미처 떨어지지 못하거나 미처 붙지 못한 상태로 남은 것들이 덜렁 덜렁 덜렁 휘날린다.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 위를 뒤덮는 여성들의 몸과 비명, 방사능과 함께 자라나는 자궁 속 태아의 몸부림처럼. 이렇게 오키나와와 후쿠시마를 붙이고 떨어뜨리면서 이토타리는 이 둘 사이에 자신의 몸을 밀고 나가 길을 낸다.

이토 타리의 퍼포먼스는 식민권력의 책임과 잘못을 묻고, 피해를 인정받지 못했던 억울한 사연들을 풀어놓는다. 그러나 거기에 멈추지 않는다. 감금당하고 강간당한 여성의 삶, 방사능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삶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말과 감각과 가치가 요청되기 때문이다. 미군에게 강간당한 여성들의 피해를 인정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 궁극적으로 미군기지를 없애는 것은 꼭 필요하다. 동시에 그녀들이 불쌍한 피해자로 머물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드러낼 수 있는 모색이 필요하다. 방사능의 수치를 명확히 드러내고 후쿠시마 주민들의 피난의 권리를 주장하고 방법은 마련하는 건 시급한 요구이다. 동시에 방사능과 함께 살 수밖에 없고 살 수밖에 없었던 삶 자체를 어떻게 하면 차별 없이 그대로 표현하고 거기서 새로운 관계성을 찾는 것도 필요하다. 방사능의 공포가 장애인에 대한 공포로 전이되어, 장애인의 신체를 비하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면서.

절망 속의 희망이라는 말이 어려운 것은 단지 절망과 희망이라는 가치 분류를 그대로 두고, 절망 속에서 기존에 기준에 적합한 희망 -정상인, 순결한 여자, 오염되지 않은 신체 등-을 찾아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절망과 희망을 나누는 우리의 가치기준과 감각 그 자체, 좌표계 그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되돌려 절망과 결여 그 자체에서 새로운 희망의 계기들을 끌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기존의 방식으로 그녀들을 세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의 비명과 몸과 흔적들을 통해서 새로운 ‘셈’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장애인을 정상인으로 만들거나 장애인이라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의 신체를 통해서 정상인의 신체가 느끼지 못하는 부분들을 새로운 가치로 드러내는 것이다.

극단 타이헨은 1983년부터 오사카에 거점을 두고 활동해 온 세계 최초의 장애인 신체표현 극단이다. 극단 대표는 장애인 재일 조선인 2세인 김만리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장애 자체를 표현력으로 전화시켜 전대미답의 미를 창출할 수 있다고. 자신은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이 신체적 변화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탐구해 왔다고. 자신에게 우주를 의식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식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입다문 장애인들의 신체연극은 이렇게 질문한다. 네가 두려워하는 그 대상이 정말 네 눈앞에 등장했을 때, 그것은 정말 네가 두려워하던 대상이었는가? 오히려 두려움은 저 머리 위 권력이 유포한 환상이었던 것은 아닐까? 네 눈 앞에 나타난 두려움의 대상은 오히려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출구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이번 퍼포먼스는 그 출구들을 내게 느끼게 해 주었고 그것이 깊은 곳으로부터 나를 위로했다. 쉽사리 두려움에 쫓기곤 하는 나는 그럴 때마다 이 출구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제목으로 붙인 말은 김시종의 시 <그림자의 그늘지다>의 제목이다. 그림자에 그늘이 지기 위해서는 그림자 속에서 빛이 생겨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늘’이 아니라 ‘그늘지다’라는 그림자 속 빛의 매일 매일의 행위, 그림자와 두려움과 절망과 대면하는 매일매일의 행위 속에서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토 타리씨의 퍼포먼스를 늘 보러 오시는 그녀의 연로한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타리는 퍼포먼스에 쓴 재료들을 버리지 못해 집안에 그것들이 담긴 주머니가 잔뜩 있다고. 그건 마치 죽은 사람의 무덤에 바치는 불교식 계명(戒名), 저 세상 사람들의 이름이나 영혼과 같기 때문이다. 산자의 말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말, 정상인이 아니라 장애인의 신체, 순결한 여성이 아니라 강간당한 여성의 신체가 우리에게 건네는 그 말을 이토 타리는 그들의 몸이 되어서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음성은 내가 내 속에 갖고 있는 결여와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 속에 그늘진 곳에 대한 풍부한 감수성을, 그곳에 함께 움직이고 있는 빛과 출구를 열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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