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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파 추리문학을 드라마로 1 – 모래의 그릇

- AA

요즘 트렌디 드라마의 제작자들은 원작을 건지기 위해 인터넷을 뒤진다. 젊은이들(!)의 감성으로 무장하고 유유히 네트워크의 심해를 헤엄치고 있는 인터넷소설을 찾기 위해서.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제작자들은 더욱 눈에 불을 켜고 인터넷의 바다에 그물을 던졌고 그 이후로 굉장히 많은 드라마가 인터넷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일본의 드라마 제작자들에게 있어 가장 훌륭한 바다는 만화계다. (그래서 대부분 일본의 드라마 작가들에게 있어 첫 작업은 만화의 각색인 경우가 많다.) 또 하나 우리나라와 차이가 있다면 무겁고 어두운, 그리고 오래된 문학 작품도 굉장히 많이, 그리고 끊이지 않고 드라마화된다는 것이다. 일본의 소설 중에서 드라마나 영화 등의 창작자들이 가장 애정하는, 그래서 수많은 리메이크버전이 계속되는 ‘사회파 추리 문학’ 중 그 시초라 할 수 있는 마츠모토 세이쵸,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모리무라 세이치의 원작을 영상으로 재창조한 작품을 소개한다.

지난 2009년, 일본의 모든 방송국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떠한 타이틀을 가지고 특집극을 제작했다. 방송국 뿐 아니다 영화도 만들어졌다. 저마다 다른 연출, 각색, 배우들이었지만 모든 작품의 타이틀은 같았다. 바로 ‘마츠모토 세이쵸 탄생 100주년 기념’이었다.

1909년 출생하여 1992년 작고한 마츠모토 세이쵸는 일본 문학사에 있어서, 그리고 일본 대중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작가다. 그는 반평생 기자가 되길 소망하며 노력하여 결국 기자가 되었고 41세부터 시작된 소설가의 삶 역시 매일을 노력과 열정으로 닦은, 그야말로 평생을 전력으로 질주했던 치열한 인물이었다. (그의 유서에 유명한 문구가 있다. “나는 노력만큼은 해왔다.”라고.) <인간극장>의 아이템으로 최적의 조건을 두루 갖춘 그의 일생은 출생과 사망년도가 증명하듯 20세기 일본과 일본인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 시절 시골 마을의 평범한 소년답게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할 수 있었고, 19세쯤엔 사상범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30대엔 전쟁을 경험했다. 패전 후 황폐해진 일본의 경제사정으로 전국을 돌며 빗자루 영업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간의 본성, 내면의 심리, 환경에 따라 좌우되는 선택의 기준 등 그의 작품에 다양한 인간의 군상이 밀도 깊게 담겨 있는 것은 소설가 이전의 삶이 그토록 다채롭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소설가 등단 5년째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추리소설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범죄나 트릭보다 그 주체가 되는 인간들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는 그의 소설은 인간이 군집해 있는 공동체, 사회, 국가와 필연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이유로 그의 소설은 일본 내에서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는 새 장르의 문을 연 시초가 된다. 다른 사람이 사용한 자료를 또 쓰고 싶지 않다는 그의 고집 때문에 그의 작품은 새롭고 방대한 자료들로 탄탄하게 바탕을 갖추고 있고, 또한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담겨 있으며 여기에 추리라는 장르가 주는 서스펜스까지 더해져 영상화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원작이었다. 심지어 베스트셀러라는 간판까지 붙어 있으니 흥행 면에서도 일정 정도 기본은 가지고 가는 셈이니까. 그래서 수많은 창작자들은 그의 원작을 영상화하고자 했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가운데 오늘 소개할 작품은 마츠모토 세이쵸가 1960년 발표한 소설 <모래의 그릇> 중 TBS에서 방송한 2004년판 연속 드라마다.

피아니스트인 와가 에이료는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나오다 한 중년의 남자와 마주친다. 현재의 와가는 누가 봐도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다. 넘치는 재능을 바탕으로 성공한 피아니스트이자 전 농림부장관의 딸과 약혼까지 한 스타다. 하지만 중년의 남자는 그를 히데오라 부르며 어째서 본명을 숨기냐고 묻는다. 와가는 일부러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남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몸싸움을 벌이다 본의 아니게 남자를 죽이게 된다. 와가는 범행을 숨기고자 그의 얼굴과 지문을 짓이기고 증거물을 감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와가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고 영감을 얻어 <숙명>이라는 타이틀의 곡을 만들기 시작한다. 한편 얼굴과 지문이 짓이겨진 신원 미상의 남성 살인 사건을 맡은 형사 이마니시 슈이치로는 목격담을 토대로 차근차근, 그리고 끈질기게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범인을 잡겠다는 집념으로 수사를 계속하던 이마니시는 피해자가 지방의 한 마을에서 온 퇴직 경찰 미키 켄이치인 것을 밝혀내면서 사건의 본질에 다가가고 결국 모든 것이 와가 에이료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와가 에이료의 본명은 모토우라 히데오, 26년 전 오오하타에서 일어난 대량 방화 살인사건의 범인 모토우라 키요키치의 아들이다. 전국을 경악하게 만든 엄청난 살인자 키요키치는 사실 그저 평범한 농부였다. 하지만 시골 마을 오오하타에 댐 건설 계획이 진행되며 마을 사람들은 그 탓을 모토우라 키요키치에게 돌리고 그 결과 그의 가족은 집단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따돌림은 키요키치의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이에 분노한 키요키치는 마을에 불을 지른 후 아들 히데오를 데리고 도주 생활을 시작했다. 1년여에 가까운 긴 시간, 부자의 처참한 도주 생활은 사람 좋은 경찰 미키 켄이치와 만나 끝이 나고 키요키치는 자수를 한다. 그러나 어린 히데오는 다시 고통 속에 빠진다. 마을에서 집단따돌림을 당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엔 살인자의 아들이라 괴롭힘을 당한다. 미키는 히데오에게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숙명이니 받아들이고 이겨내라 하지만 어린 히데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히데오는 생존을 위해 자신이 누구의 아들인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하고 미키의 집에서 도망쳐 거리 생활을 전전하다 보호시설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만난 동네의 평범한 소년 와가 에이료와 친구가 되지만 1982년 여름, 나가사키 집중호우로 와가와 그 가족들이 죽고 난 후 자신의 본명을 숨기고 와가 에이료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형사 이마니시보다 먼저 범인이 와가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를 사랑하게 되는 연극배우 나루세 아사미는 와가와 이어진 또 다른 자신의 숙명을 맞이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숨기면서부터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던 와가는 자신이 범인인 줄 아는 나루세가 자살을 시도하는 순간, 그녀를 구했다. 자신을 옭아맬 또 다른 운명임을 알면서도 고통에 찬 표정으로 바다에 몸을 던지려는 나루세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 나루세와 와가는 서로를 통해 온기를 느끼고 위안을 받는다. 이마니시의 수사 반경이 점점 좁혀지며 결국 그가 모든 것을 밝혀낼 것이라 직감한 와가는 곡의 완성을 위해 과거와 연결된 곳을 찾아가서야 비로소 과거와,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일 결심을 하고 곡을 완성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와가를 쫓아온 것이 아니라 마치 와가와 같은 곳을 향해 달려온 것과 같은 표정의 이마니시가 기다리고 있다.

과거를 파헤치는 남자와, 과거를 감추는 남자. 숙명을 받아들이는 남자와 숙명에서 도망치려 하는 남자의 줄다리기는 원작 소설의 무게감을 처절할 정도로 살리며 긴박감을 자아낸다. 원작에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제작진의 사명감은 종이와 글자로 이루어진 인쇄물 속에서는 볼 수 없는 요소들을 통해 드라마 곳곳에서 드러난다. 주연인 와가 에이료는 일본의 국민 가수 그룹 스맙의 리더 나카이 마사히로가 맡아 평소와 정반대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소화했고 형사 이마니시는 와타나베 켄이 열연했으며 나루세역으로는 이전 소개한 드라마 <마더>의 마츠유키 야스코가 출연하여 원작의 무게를 더했다. 또한 제작진이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를 선명하게 증명하는 장대한 영상은 압권 그 자체다. 그리고 하나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마지막 회에서 모토우라 부자의 26년 전 도주 생활, 그리고 수사결과를 보고하는 이마니시의 경찰서 장면이 피아노 협주곡 <숙명>의 전곡 연주가 울려 퍼지는 마지막 콘서트 장면과 교차 편집되어 감정의 몰입을 극대화시킨다. 드라마의 음악은 일본 드라마 아카데미 최우수 음악상을 3번이나 수상한 저명한 작곡가 센쥬 아키라가 맡아 장엄하고도 애잔한 선율로 드라마의 감동을 더했다.

(차례로 왼쪽부터 1974년 영화판, 2004년 연속드라마판, 2011년 단편드라마판)

(차례로 왼쪽부터 1974년 영화판, 2004년 연속드라마판, 2011년 단편드라마판)

<모래의 그릇>은 2012년 현재까지 영화로는 1번, 드라마로는 4번 제작되었다. 소개한 2004년판 이후 작년에는 아사히TV에서 2일 연속 방영으로 4시간짜리 버전을 발표했다. 100주년 기념이라 2009년에 유독 제작편수가 늘어났을 뿐, 마츠모토 세이쵸의 작품은 (일본에서는) 언제나 쉽게 드라마로 접할 수 있다. 올해는 그의 사후 20주년이라고 특별 드라마들이 벌써부터 하나 둘 방송되고 있다. 그의 소설 1000여 편 중 지금까지 440편 정도가 영상으로 재탄생되었다고 한다. 새로운 창작자를 만날 때마다 원작은 옷을 갈아입는다. 원작을 고수하는 창작자를 만나면 소도구 하나까지 신경 써서 재현한 실사판으로 탄생하기도 하고, 모험심 넘치는 창작자는 원작에 없는 새로운 인물을 관찰자로 개입시켜 작품을 다른 각도로 조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쉼 없는 시도는 그의 영향을 받은 사회파 추리소설의 2세대 작가들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모리무라 세이치 등이 만들어낸 소설도 드라마화될 수 있도록 하여 3세대 작가를 잉태하는 창조의 순환을 이어간다.

물론 작품성과 흥행이 보증된다고 하여 오리지널 극본을 등한시하고 소설에만 매달리는 것은 제작자들 스스로 경계해야 하고 아무런 창조의 노력 없이 같은 작품을 재탕, 삼탕하는 창작자는 직무 유기의 과오를 범하는 것과 같다. 또한 아무래도 소설의 모든 문장을 지문과 대사로 옮길 수 없으므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작품 본연의 색을 잃을 수도 있고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작가가 공을 들여 완성했을 문장들과, 특유의 문체는 드라마로 표현하기 힘들다.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문학 작품이 꾸준히 드라마로 재탄생되길 바란다. 문학작품의 드라마화는 종이 속의 인물과 사건이 영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 외에도 오래된 작가의 작품이나 무거운 작품을 보다 많은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로 인해 이전 세대의 문학 작품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서점을 향할 새로운 독자층을 생성할 수 있다는 점, 원작 작가의 팬을 TV앞에 앉게끔 하는 점 등 꽤 많은 메리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잘 만든 드라마는, 시청자로 하여금 생략된 원작의 내용이 무엇인지마저 궁금하게 만들기도 한다.

(마츠모토 세이쵸 기념관 내부 사진. 왼쪽에 스티커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전부 그의 소설 표지다.)

(마츠모토 세이쵸 기념관 내부 사진. 왼쪽에 스티커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전부 그의 소설 표지다.)

마츠모토 세이쵸의 작품은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기에 ‘사회파’ 라는 수식이 붙은 장르로 구분된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물론 몹시 다르지만 역사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힌 관계이고, 시간차는 있지만 서구 문물에 의해 재편된 근현대사의 흐름에 유사성이 있다. 오늘 소개한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다른 작품에서 등장하는 주둔 미군들과 관련된 사건이나 갑작스레 서구에서 밀려든 사상의 파도에 휩쓸린 이들의 인생 등은 우리의 역사에 대입하여 재고하기에 충분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하다면 <검은 가죽 수첩>, <짐승의 길> 을 일단 꼽을 수 있겠다. 일본의 단편 드라마 중 한글자막의 제작은 캐스팅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아 추천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짧은 것으로, 국내에서 구하기 쉬운 영상으로 보고 싶다면 영화 <제로의 초점>이 있다. 마츠모토 세이쵸 100주년 기념으로 명감독 이누도 잇신이 연출을 맡았으나 완성도면에서 작가와 감독 양쪽의 팬들조차 그다지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덧붙여, 필자가 나름 드라마를 많이 봤다 자부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역사적으로나 그 자체로나 의미 있는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한 국내 드라마는 고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활동이 그렇듯 문화 역시 유기체다. 영양을 공급하지 않고, 햇빛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그 가치가 고귀하다 해도 그 생명 자체는 죽고 만다. 과연 지금과 같은 교육이 계속되고 명작들이 그저 국어 교과서의 지문으로만 출제되고 만다면 50년이 지난 후의 아이들은 무엇을 기억하게 될까. 시간이 지나도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에 대한 성찰, 변하지 않는 가치, 기억해야할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해 숨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 방법과 방식은 책, TV, 인터넷, 또 다른 미지의 무엇으로 변할지라도. 50년쯤 지난 후에도 <토지>가 박물관의 유리장 속이 아닌 서점의 스테디셀러 코너에 있길 바란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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