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규칙, 지킬까 말까. 2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2. 거울뉴런과 공감능력

그런데 법에 근거가 없다며 다들 법을 어겨 마음 내키는 대로 산다면 어떻게 될까. 나의 자유가 남의 자유를 또는 남의 자유가 나의 자유를 가로막으면 이를 어떻게 해결하지. 이런 혼란을 해결해 주는 법이 있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다수설에서 주장하는 법의 잠정적인 유용성이야. 법의 근거를 찾을 수도 없고 또 법이 불완전한 것이지만 그나마 없으면 더 혼란스러워지니까 지금 당장은 법이 필요하다는 얘기야. 그러면 정말 법의 근거가 없는 걸까. 아니면 있는데 못 찾는 걸까. 그도 아니면 앞서 살펴보았던 학설들이 다 부분적인 법의 존재 조건으로써 법의 근거들이었을까. 홍아야, 이제부터는 우리가 한번 법의 근거를 찾아 나서 보자.

만약에 우리가 찾는다면 법의 근거를 찾을 게 아니라 규칙이 더 넓은 게념이니까 규칙의 근거를 찾는 게 더 쉬울 것 같아. 법은 규칙의 일부니까 규칙에 근거가 있다면 당연히 법도 근거가 있게 되고 없다면 없게 되는 거잖아. 전체집합의 일반성을 부분집합도 반드시 가져야 하지만 부분 집합의 특수성을 전체집합도 반드시 가져야 된다고 주장하지 못하잖니. 그러니까 홍아야. 우리가 법의 근거보다 더 찾기 쉬운 쪽으로 규칙의 근거를 찾아보자 거야.

이를테면 곤충 집합의 부분집합으로 개미, 메뚜기, 벌, 파리 따위가 있어. 이들은 곤충의 일반적인 특징인 세 쌍의 발과 두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어. 그러나 일개미에게는 세 쌍의 발은 있는데 두 쌍의 날개가 없어. 개미 굴 속에서만 살던 수개미와 여왕개미는 교미할 때 하늘 높이 올라가는데 필요한 날개를 가지고 있으나 일개미는 거기에 끼지 못하니까 날개가 퇴화되어 버린 거야. 그렇다고 일개미가 곤충이 아닌 것은 아니야. 거꾸로 일개미가 날개가 없으니 모든 곤충은 날개가 없다고 억지를 부려서도 안 되고.

그런데 법 없이 살았던 원시 사회도 있었다지만 사실은 그 때도 도덕과 구별되는 관습법이란 게 있었어. 그 관습법은 도덕적 규칙들의 일부지만 강제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강제력이 없는 다른 도덕적인 규칙들과 구별되었어. 그러나 구별되었을 뿐이지 관습법이 도덕적 규칙이 가지는 일반성에서 벗어나는 것, 분리된 것은 아니었어. 그러니까 성문법이나 관습법이나 다 도덕적인 규칙의 일부라는 거야. 그리고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사람들 사이에는 주로 ‘~하라’고 행동을 긍정 진술한 도덕적 규칙과 주로 ‘~말라’고 행동을 부정 진술한 법률적 규칙이 언제나 있었다는 거야.

그렇다면 사람 사이에 ‘~하라’는 행동과 ‘~말라’는 행동을 어떻게 정해놨을까. 먼저 인류의 스승들이 사람 사이에 지켜야 행동을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살펴보면서 그 ‘어떻게’에서 규칙의 존재할 수 있는 이유나 근거를 추리해보자. 예수님은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공자님은 ‘네가 싫어하는 짓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가르쳤어. 하버지는 이 두 규칙의 말씀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해본단다.

예수님의 말씀인 ‘~하라’는 사람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당위의 도덕적인 규칙들을, 공자님 말씀인 ‘~말라’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금지의 법률적인 규칙들을 대표한 말씀이라 생각한단다. 또 예수님의 말씀은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를 보여준 도덕적 대원칙을 밝힌 것이고 공자님은 서로 부딪치지 않고 살아가는 ‘금지’를 보여준 법률적 대원칙을 밝힌 것이리라. 그래서 이 두 분의 말씀을 하나로 모으면 사람끼리 부딪치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규칙들의 규칙을 밝힌 것이라고 본단다.

이 두 말씀의 공통점은 공감을 근거로 사람 사이에서 해야 될 행동과 말아야 될 행동을 규정하고 있다는 거야.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와 ‘네가 싫어하는~’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내 맘을 미루어 남의 맘을 알 수 있으니 그 공감을 따라 행동하라. 그러면 저절로 규칙에 들어맞는다는 말씀이야. 이 두 말씀으로 미루어 본다면 우리도 공감으로 규칙을 정할 수 있다는 건데 그렇다면 공감이 규칙의 근거일 수 있다는 얘기 아닌가. 정말 그럴까. 홍아야, 만약에 공감이 규칙의 근거라고 주장하면 또 다른 학설이 나오겠다. 이 학설의 진위를 판단하려면 공감이 규칙이 존재하는데 본질적이고도 필수적인 존재조건인지를 따져 보아야 하겠네.

<공감의 시대>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은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본성을 지닌 인간을 이타적 존재로 보았단다. 그는 고대부터 인간을 본질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못 박았던 기독교 문명과, 다윈의 적자생존의 진화론을 받아들인 19세기 서구 사상가들의 견해를 차례로 반박하면서 인간은 적대적 경쟁보다 가장 차원이 높은 욕구로써 유대감을 지향하는 존재라는 거야. 그래서 그는 인간을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 : 공감적인 인간)’라고 명명하고 공감의 패러다임을 주장했어. 그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화, 철학, 문학, 심리학, 예술, 정치, 경제 등 방대한 영역을 뒤져서 인류문명사를 `호모 엠파티쿠스`의 성장사로 재해석했어.

인간은 남이 느끼는 감각과 감정뿐만 아니라 남이 하는 동작과 표정을, 그리고 상상과 추리를, 의도와 목적까지를 공감하고 공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대. 인간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남들의 표정이나 동작을 보고 따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들의 추리와 상상도 이해할 수 있대. 게다가 남들의 행동을 보고 남의 동기나 의도나 목적을 공감하고, 동기나 의도나 목적에 비추어 본 남의 행동의 의미와 가치까지를 공감으로 알아낼 수도 있대. 그래서 인간은 공감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으며 예술 작품으로 공감을 나눌 수 있대. 또 엄마는 아이와 희로애락을 공감하기 때문에 아이의 요구에 따를 수 있고, 어린 아이는 어른들의 말을 배울 때 발음을 흉내 내고 의미를 공감하면서 배울 수 있대. 그리하여 이러한 공감 능력에 따른 모방과 학습 능력을 가지고 인류만의 문명을 건설했대.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공감으로 모방하고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다른 동물과 비교해본다면 이는 결코 당연하지 않은 신비야. 이 신비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어. 그 비밀은 ‘거울신경세포(일명 공감뉴런, empathy neuron)’ 속에 들어 있지. 이 공감뉴런은 1996년 이탈리아의 신경심리학자인 리촐라티(Giacomo Rizzolatti)가 한 원숭이가 다른 원숭이나 주위에 있는 사람의 행동을 보기만 하고 있는데도 자신이 움직일 때와 마찬가지로 반응하는 뉴런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그렇게 명명했대. 지금까지의 연구를 종합하면 인간의 거울뉴런은 뇌의 3곳에 분포되어 있대. 전두엽 전운동피질의 아래쪽과 두정엽의 아래쪽, 측두엽과 뇌성엽의 앞쪽이래.

내가 그것을 직접 할 때와 똑같이 남들의 언행을 보거나 듣고만 있는데도 그 언행을 하고 있는 당사자의 뇌와 똑같이 반응하는 뉴런이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 얼핏 생각하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길 수도 있으나 인간의 뇌와 마음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에게는 엄청난 발견인 거야. 왜냐하면 지구상에서 인간이 왜 그리고 어떻게 가장 지적인 존재가 되어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이 공감 뉴런에서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야. 인간이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앞의 세 군데 거울뉴런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정보를 처리해 공감의 체계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지각한 행동의 가치와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래. 만약에 어떤 행동의 가치와 의미를 공감했다면 그 행동을 모방하거나 학습하려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왜 이런 거울 뉴런이 존재하는 것일까?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므로 다른 구성원들과 의사를 소통해야만 살아갈 수 있어. 사회적인 동물인 원숭이나 앵무새도 운동피질에 하나의 공감 뉴런이 있으니까 어떤 소리나 동작을 잘 흉내 낼 수 있어. 그러나 동물은 인간처럼 공감뉴런들의 입체적인 작동으로 남의 행동 속에 들어있는 동기나 의도 또는 목적까지를 그리고 동기나 의도나 목적에 비춰본 그 행동의 의미나 가치까지를 공감할 수가 없어. 하지만 인간의 뇌에는 여러 곳에서 거울뉴런들이 활동하여 이들의 감각적인 정보를 입체적으로 종합할 수도 분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치나 의미 공감이 가능하대. 이러한 공감 능력은 더불어 살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일 거야.

만약에 인간이 남의 행동에 반영된 동기나 의도나 목적을 공감할 수 없었다면 모든 인간이 자폐적이었을 거야. 역지사지하고 이심전심하여 눈치 보기를 잘하지 못하는 자폐환자는 상황에서 벗어난 엉뚱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웃음거리가 되거나 왕따를 당하기 일쑤지. 만약에 인간이 모두 자폐였었다면 오늘날처럼 복잡한 사회를 조직하거나 문명을 발전시킬 수가 없었을 거야. 실제의 실험 결과도 자폐환자들의 거울뉴런들이 거의 활동을 하지 않는대. 이 실험으로 미루어 자폐에 대한 신경학적 원인을 찾는다면 이 거울뉴런의 작동 여부라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리고 자폐 환자의 거울뉴런이 활성화되지 않는 실험 결과는 거꾸로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이 남들과 조금이라도 더 잘 소통하기 위한 노력으로 공감 뉴런을 더 많이 진화시켰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어.

특히 인간은 공감을 더욱 확대하기 위한 소통 수단으로 언어를 발전시켰어. 남들의 행동의 동기나 의도나 목적을 공감으로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언어라는 의사소통 수단으로 공감을 주고받으며 증폭시켜야 공감을 쉽게 주고받을 수 있어. 그리고 공감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그 공감에 알맞는 행동을 주고받으며 더불어 살 수 있고. 그런데 어린 시절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남들의 발음을 모방하고 의미를 공감하는 언어 습득 능력은 공감 뉴런의 ‘따라하기’ 능력이라고 볼 수 있어. 그러니까 인간이 언어를 공감으로 습득하여 공감을 증폭시키는데 활용한다는 거지.

그리고 공감 뉴런의 더 중요한 역할은 한 인간이 사회화하면서 공감으로 습득한 문화로 한 인간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역할이야. 한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이나 한 사회의 전통문화가 계승되고 발전하는 것도 결국은 다 공감뉴런의 역할이고 그 결과라는 거야. 그러니까 문화란 한 사회가 가진 공감능력의 총화이고 정체성이란 한 인간이 가진 공감 능력의 총화랄 수도 있겠어. 하버지는 내가 나됨과 한 사회가 그 사회됨이 공감 뉴런의 능력과 역할이 가져온 결과라고 보는 거야. 남과의 관계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감능력은 물론 인간의 경험의 가능성의 중요한 일부라고 보는 거야.

만약에 우리가 모든 것들을 직접 경험해야만 알 수 있다면 오늘날의 인간과 사회와 문화가 가능했을까. 공감에 따른 모방이나 학습 능력 없이 모든 것을 진화로만 해결해야 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의 경험을 축적해야 오늘날의 인간과 문화에 도달 할 수 있을까. 북극곰은 북극의 추위를 견디려고 털로 자신의 몸을 감싸는데 아마도 몇 만 년의 진화 기간이 필요했을 거야. 하지만 에스키모 아이가 곰을 잡아 털옷을 만드는 부모를 보고 하루 만에 이를 학습했을 걸. 아마도 부모가 털옷을 만들어 입는 동안에 그 아이의 뇌에 있는 뉴런들도 부모의 행동을 흉내 내고 있었고 부모가 그 털옷을 입는 것을 보고 부모와 마찬가지로 따뜻함을 느끼고 당장이라도 털옷을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낄 거야. 여기서 수만 년과 하루는 얼마나 큰 차이인가. 그리고 이 차이가 대체 어디서 온 것이겠어.

발톱이나 이빨 등 변변한 공격 무기나 튼튼한 가죽이나 빠른 다리 등의 뛰어난 방어수단도 없이 인간이 생존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서 가장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것이 바로 이 공감 뉴런으로 설명이 되지 않을까. 인류가 도구와 언어를 사용하여 문명을 창조하기 시작한 것이 불과 4~5만 년 전이래. 뇌신경 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수백 만 년 전부터 현재와 가까운 두뇌 용량을 가졌지만 문명이 가능해진 것은 거울뉴런 시스템의 갖춰지는 이 시기부터래.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됨에 가장 중요한 능력은 놀랍게도 어쩌면 거울뉴런의 체계적인 작동에서 생긴 공감의 경험 능력일 수도 있어.

그렇다면 기쁨과 슬픔을 누가 더 많이 공감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엄마와의 유대감으로 공감을 얼마나 깊이 그리고 많이 경험했는지가 공감 능력을 결정한대. 그리고 상식적으로도 그렇지만 실제로도 여성이 남성에 비해 거울뉴런이 더 활성화되어 있대. 그러나 공감능력 만으로 인간의 능력을 다 평가할 수는 없으며 공감능력이 많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도 아니래.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공감 능력에서 뒤지지만 인간관계와 상관없는 전문분야에서는 더 잘할 수도 있대. 그리고 여성 쪽이 공감을 즐기기 위해 자잘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거나, 또 TV드라마에 더 많이 중독되기도 한대.

그럼 홍아야, 우리의 과제였던 규칙의 근거와 공감뉴런 즉 거울뉴런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걸까. 하버지는 규칙의 근거가 인간의 공감 능력에 있음을 밝히려고 인간의 공감능력이 어디서 오며 얼마나 신비롭고 뛰어나며 중요한지를 이처럼 기다랗게 늘어놓은 거란다. 다음 글에서 이른바 양심이라는 것과 규칙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만약에 양심이라는 것이 공감뉴런을 근거로 타고나는 실재하는 직관력이라면 우리는 양심에 따라 규칙을 만들고 지킨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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