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나의 자녀교육법

- 이계삼

학교를 그만두고 나니, 가끔 학부모들 앞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생긴다. ‘교육불가능’을 떠들고 다니는 전직 교사라 하니, 무슨 이야긴가 들어보고 싶은 마음들일 것이다. 가로세로 떠들고 나면 질의응답 시간에 가끔 ‘당신은 자식을 어떻게 키우는가’라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나는 ‘자녀 교육’이라는 말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같은 세태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교육한다는 말 또한 여러 의미에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도 켕기는게 많아서 답변을 피하고 싶고, 그래서 나는 ‘자녀 교육’이라는 말이 적절치 않다고, 부모들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돌리기도 한다.

내가 관찰하건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사춘기 시절을 지나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갖는 영향력이란 실로 미미하다. 생각해보면 예전 부모님들은 땀 흘려 일하면서 자식들에게 정말 좋은 교육을 하신 셈인데, 오늘날 아이들은 부모가 어떤 노동을 해서 자신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지, 부모의 삶 자체를 잘 모른다. 무엇보다 오늘날 아이들은 또래집단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부모는 책가방을 메고 집으로 들어오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문득 ‘저 녀석이 저렇게 컸구나’, 하는 마음으로 글썽이며 아이를 바라볼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머릿속에는 오늘 학교에서 겪은 일, 어떤 아이가 지나가듯 던진 욕설 비슷한 한마디가 무슨 의미인지, 그 진의를 생각하느라 부모가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든 아무 생각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아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와 아내는 우리 아이에게 제대로 뭐 하나 해 준 게 없다. 아내는 임신 때 유독 힘겨워했고, 우리는 나름 애를 썼지만 결국 자연분만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녀석은 세상과의 첫만남을 수술실에서 가져야했다. 출산하고 나서도 아내가 젖몸살이 심해 모유를 먹이지 못하고, 결국 분유를 먹여야 했다. 우리 부부는 맞벌이였고, 양가 어른들 또한 여러 일들로 분주하셨던지라 녀석은 우리집으로 출퇴근하시는 아주머니가 돌보아주었고, 세 살부터 어린이집을 다녔다.

그리고, 나는 내 아이에게 자연을 주지 못했다. 내 어린 시절의 여름날 살갗을 새카맣게 태워먹을 정도로 쉼없이 자맥질하던 강도, 한겨울 꿩과 토끼를 잡으러 뛰쳐다니던 산도, 책가방 던져 놓고 캄캄해질 때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놀던 시골 마을도 주지 못했다.

녀석은 휴일에도 전교조와 지역 활동을 하는 엄마 아빠를 따라 내내 집회 현장을 쫓아다녀야 했다. 그래서 다섯 살땐가, ‘철의 노동자’를 완창해서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열두살이 된 지금은 지역에서 몇 달째 이어지고 있는 송전탑 반대 촛불집회든, 무슨 행사든 도통 움직이려 하지 않는 ‘보수 반동’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부모가 신경을 쓰지 않으니 책도 전혀 보지 않는 것 같고(‘개똥이네 놀이터’같은 어린이 잡지를 잠깐 보는 것 같긴 하다만), 수학이 신통치 않은 듯 성적 통지표에서 지난 몇 년간 담임선생님들은 빠짐없이 ‘수학에 대한 자신감’을 언급하신다. 엄마 아빠가 밖으로 돌고 자신은 학원조차 다니지 않으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녀석은 그 사이 홀로 지내는 법을 터득한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축구’이다. 축구공을 들고 근처 운동장으로 나가면 그럭저럭 축구하러 나온 형이나 또래들을 만나게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EPL 축구 중계를 보겠다고 거의 텔레비전을 독점하다 보니 시청 시간은 평균치보다 훌쩍 높은 것 같다. 학교에서도 방과후 대부분의 시간을 축구에 바치고 있다.

요컨대 우리 아이는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이걸 자랑이라고 써 재끼는 건가? 그렇다. 자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끄럽다거나 딱히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최소한 학원 따위에는 보내지 않고, 체험학습이니 뭐니 하는 돈으로 세팅된 프로그램에 아이를 집어넣지도 않는다. 책 읽으라고 닦달한 적도 없다.

나처럼 심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이나마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도 돌이켜 보면 우리 부모님이 나를 완전히 방임해주셨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대학을 국문과로 진학해도, 자취방을 수없이 옮겨도 부모님은 모르셨다. 때로 한달에 열흘 가까이 돈한푼 없이 지내도 나는 부모님께 연락을 하지 않았고, 부모님 또한 그런 줄을 모르셨다. 대학 4년 학점이 바닥을 쳐도, 그 성적으로 뭘 하겠니? 하는 걱정 한번 없으셨다. 아마 당신들은 학점 체제도 잘 모르셨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다가 겨우 학교를 졸업하고, 선생이 되었다. 도시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도, 지역에서 벼라별 사회운동에 다 껴들어도 부모님은 일절 말씀이 없으셨다. 부모님은 내 삶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으셨고 영향을 끼치려고도 하지 않으셨다. 내가 기억하는 부모님은 당신들의 인생에서 1/3은 행상, 1/3은 농사, 그리고 1/3은 식당 일을 하셨다. 당신들은 무엇보다 쉴새없이 일하셨다. 당신들은 다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당신들의 인생을 사셨을 따름이다. 그리고, 때때로 당신보다 딱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여러 경로로 도와주셨다. 아주 어릴 적, 여러 차례 이런 기억이 있다. 거지가 동네를 돌아다니다 우리 집을 찾아왔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우리 먹는 밥보다 더 잘 차려 밥상을 내오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동네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앞장서서 시신을 수습하고 염을 해서 입관하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떠오른다. 내가 가끔 힘겨운 순간에 놓였을 때, 이를테면 우리 학과에서 제일 늦게 가게 된 군대 생활 초입에서 빌빌거릴 때, 임용고사에서 떨어져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때, 부모님은 내게 진심어린 위로를 해 주셨다.

나 또한 그저 내 인생을 열심히 살 것이다. 자식의 삶에 대해 미칠 수 있는 부모의 영향력 또한 더없이 가녀린 시대에 부모가 자식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기울이는 관심은 대개 이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부모 스스로의 불안과 그간의 좌절의 기억에서 배태된 보상심리를 투사(投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많은 경우, 자식에게 뭔가를 가르치려 드는 부모보다 아이들 자신이 더 나은 경우가 많다. 그건 아마 내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자녀교육은 어떠한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냥 ‘방치하고 있다’고 답한다. 녀석은 중학교를 가지 말고 아빠가 곧 시작하는 귀농학교에서 농사짓는 법이나 목공 따위를 함께 배웠으면 하는 내 마음을 알고 있지만, 아마도 중학교에 진학하게 될 것 같다. 축구를 해야 하니깐. ‘얌마, 거기 가면 형들이 돈 뺏어’라고 엄포를 놓아도 막무가내다. 녀석은 동시대(同時代) 속으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나로선, 어찌할 수 없다. 다만, 나는 나대로, 그냥 내 인생을 열심히 사는 길밖에는, 달리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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