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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파업에 대한 두 개의 짧은 인터뷰 –가야트리 스피박, 마리나 시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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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총파업에 대한 두 사람의 짧은 인터뷰를 올립니다.

첫 번째 인터뷰 자료에서 스피박은 총파업에 대한 요구를 단지 그것이 법적인 변화나 노동 조건들에서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이유로 개량주의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혁명을 어떤 상상된 ‘대격변’으로 바라보는 관점이야말로 이제는 무덤에 보내야 할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어휘들을 통한 일종의 딱지 붙이기를 통해 새롭게 일어난 변화를 보지 않으려 해서는 안 된는 것이지요.

두 번째 인터뷰 자료에서 시트린은 총파업에 대한 요구가 지니는 의미는 지난 세기에 가졌던 의미, 즉 공장의 생산을 멈추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생산의 중지만이 아니라 우리가 노동이나 소비, 더 나아가 우리 일상과 맺는 관계 자체를 바꾸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것을 총파업이 요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래 대강의 번역 대본을 올립니다. 참고로 영어 기록과 번역에는 뉴욕에 있는 선재씨와 수유너머R의 고병권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1)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 -총파업은 개량주의가 아니다(The General Strike Is Not Reformist)

혁명을 대격변(catastrophic change)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개량주의적(Reformist)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격변이라는 관념은, 그러니까 뭐랄까, … 어떤 역사적 제약도 없는 그런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건 완전히 틀렸으며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 입증되어 왔습니다.

대격변이라는 것은 대체로 절대주의 국가로부터의 국가 형성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로 이해되었습니다. 아시겠어요? 그래서 나는 그걸 대격변이라는 걸로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은, 혹은 대격변이라는 것은 잘 해야 민족 해방 같은 것이죠.

잘 들어보세요. 나는 영국령 인도에서 태어났어요. 나는 그걸 대격변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나는 대격변이라는 관념을 이젠 장례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자본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무런 별도의 경제적 강제가 없는 것… 나는 19세기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는 겁니다, 당신은 정말로 계속되는 과정(결정적인 한 방이 아니라 쭉 지속되는 과정)에 매일, 매주, 전지구에 걸쳐 참여해야 합니다.

그걸(그런 실천을) 그냥 낡은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것뿐이라고, 단지 개량하는 것뿐이라고 묵살하는 일은 정말, 정말, 정말로 낡은 겁니다. 연원이 깊죠. 그건 절대주의 국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니까요. 하지만 내 생각에 사람들은 왜 그것이 개량주의적이 아닌지 묻기보다 개량주의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격변이라는 관념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도요.

우리는 우리의 어휘(vocabulary)를 현실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건 단지 내가 말들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말들을 뭔가를 묵살하는 데 쓰지 말고 그 말들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고 우리의 변화된 상황 속에서 사태를 달리 파악하는 법을 정말 배우라는 겁니다. 기존의 어휘들을 합리적으로 골라서 사태를 파악하려 들지 말고요.

말하자면 –글쎄 이건 내 이야기는 아닌데요- 아주 멋진 이야기죠. 현악4중주와 거미를 닮았다고 보는 것. 둘 다 8개의 다리를 가졌잖아요. 사실 놀라울 것도 없죠. 당신이 어떻게 개량주의를 인식하는가 하는 것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구조, 계속해서 바뀌어 갈 그런 구조 안에서 법들을 바꾸는 데 관심을 두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어휘를 사용하는 정말 낡고 잘못된 방식입니다. 변화된 어떤 것을 알려하지 않는 것이죠.

2) 마리나 시터린(Marina Sitrin) -새로운 총파업을 상상하기(Imagining a New General Strike)

부분적으로 그것은 총파업을 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묻는 것이고, 이는 또한 미국에서 계급이 의미하는 바를 묻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이런 질문과도 아주 유사하죠. 즉 점거 운동, 그리고 지구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지구적인 물음과 민주주의 형식들에 대한 실험들이,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처럼 조합화되어 있지 않는(non-unionized) 사회에서, 그리고 파업에 들어가면 많은 노동자들이, 단지 노조만이 아니라 많은 노동자들이 처벌될 수 있는 사회에서, 하지만 또한 많은 노동자들이 이민자라든가 여하간의 이유로 아주 불안정한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에 파업을 일으킬 수는 없는 그런 상황에서, 총파업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부분적으로 사람들이 지금 요구하는 것은 19세기와 20세기적 의미에서의 총파업, 즉 모든 생산을 중지시키는 파업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일을 하지 않고 학교를 가지 않은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지금 대안들(alternatives)이 나타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뉴욕에서는 상호부조의 날(mutual aid day)을 조직하는 그룹들이 있어요. 음식을 나누고 아이들을 돌보고 민중적 교육을 만들어가죠. 그 순간 우리가 살고 싶은 그런 사회를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총파업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변환시키는 겁니다. 그것은 단지 공장에서의 생산이라는 관점에서의 생산을 멈추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압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방식(the way we do things) 자체를 다른 식으로 바꾸는 겁니다.

따라서 설령 몇 가지 이유에서 누군가 일을 하러 가야 할 때조차, 가령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아이들을 돌봐야 할 유일한 사람이기에 직업을 잃을 수는 없는 사람들 일 수 있으니까요, 운동하는 사람들은 당신 아이들이 길거리에 나앉아 살아남아야 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이렇게 말하죠.) 그것(총파업)은 다르게 생각하기, 다르게 행동하기라고요.

우리는 이 사회에서 존재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파업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존재하는 방식이란) 노동과도 관련되어 있지만 또한 아주 많은 것들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죠. 그것은 사람들이 상품화되는 것과도 관계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으려 하고 있지요. 서로 간에, 그리고 경제와 달리 관계를 맺는 것.

그래서 총파업에 대한 요구는 희망컨대, 노동에 대한 우리의 관계, 소비에 대한 우리의 관계, 그리고 바로 우리의 일상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관계맺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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