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거기 다녀?

- 성태숙(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최근에 거기 다니는 아이들이 공부방에 들어왔다. 새로 들어온 아이들 각자의 열심이 모두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거기에 다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 아이들이 다섯이나 한꺼번에 들어오고 보니 조금 정신이 없기도 하다.

거기란 구로동에 있는 유명한 ‘M교회‘를 말하는 것으로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따르지 않은 일종의 이단 교회를 말한다. 이름에서 느껴지는 포스도 있지만, 이 교회가 압권이라고 느끼게 된 것은 몇 년 전 아이를 보내고 싶다는 어머니의 요청으로 면담을 하러 가정방문을 갔을 때의 놀랐던 기억 때문이다. 당시 그 어머니는 제법 재력이 있는 친정 덕분으로 크게 장사를 하면서 잘 살다가 결혼생활과 경제생활 모두에서 실패하고, 친정인 구로동에 단칸방을 얻어 아들 아이 하나를 데리고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단칸방이지만 생필품들이 그리 허름해 보이지 않는데다 무엇보다 방을 거의 차지하고 있는 침대는 그 동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물건이었던지라 무척 인상 깊은 가족이었다. 그런데 침대만큼 어색함과 충격을 준 것은 바로 방 중앙에 떡하니 걸려 있던 그 교회 목사님의 사진이 든 액자와 달력 때문이었다. 마치 북한 다큐멘터리에서나 봄직한 광경을 실제로 대하고 보니 살짝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더 걱정스러웠던 것은 아이의 모습이었다. 낯선 어른들이 왔다는 사실도 별로 의식하지 않은 채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이는 돈을 달라고 떼를 부리고 있었다. 정도가 좀 지나치다 싶은 아이의 무절제함도 놀라웠지만,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아이를 돌봐 달라는 엄마의 요구는 더욱 충격적인 것이었다. 기가 차서 절대 그럴 수 없노라 거절을 하고, 혹시 싶어 어머니가 취업을 한다면 언제라도 아이를 받아주겠다고 약속을 해주었다. 더불어 아이의 모습이나 아이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 모두가 너무 걱정스러워 인근의 건강가정지원센터를 알려주며 양육에 대한 상담을 좀 받아보시는 것이 좋겠다고 간접 도움을 드리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냈다. 하지만 초등 고학년이 되어 모자는 어떻게 기초생활수급권 가정이 되어 나타났다. 그 동안 아이는 ADHD 진단을 받고 약을 먹고 있었고, 학교 부적응도 심한 상태에서 고학년이 되어 공부방을 다니게 되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교회를 나가고 있었고, 아이는 조금만 자극에도 쉽게 흥분하며 주위 모두를 힘들게 하였다. 결국은 산골의 한 기숙대안학교를 다니게 되어 공부방을 그만두게 될 때까지 아이나 우리 모두나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모든 것이 만신창이가 된 속에서도 오로지 ‘M’만은 굳건했다.

사실 구로동은 만신들이 많은 동네였다. 거의 모든 골목마다 울긋불긋한 만신집의 신기(神旗)가 기다란 대나무에 매달려 펄럭거리는 것을 볼 수 있는 동네였다. 징을 치는 소리도 자주 들리고 굿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모두가 가난했고 모두가 불안스러웠으며 걱정과 근심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기에 무언가 매달리고 의지할만한 것이 너무나 간절히 필요했던 그런 동네였다.

그런 만신집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간 그 자리를 작은 교회들이 메우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M’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M’의 위세는 얼마나 대단한지 일정 구역에서는 함부로 ‘M’을 험담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한다는 소문까지 나도는 판이었다. ‘M’ 사람들은 거의 매일을 선교를 하러 다녔고, 그들이 나눠주는 간증지를 보면 수많은 치유의 기적들이 일어나고 전 세계 사람들이 ‘M”에 열광하여 한국으로 오거나 자기 나라에 “M”을 세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식구들이나 집안 혹은 동네나 심지어는 살고 있는구로구까지 무엇하나 번듯하게 내보일 것이 없이 늘 기죽고 열등한 존재감에 괴로운 가난한 이들에게 이런 자기 공동체의 위업은 참으로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절로 들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가리봉동에 사는 아이들 중에는 거기 다니는 아이들이 유독 많았다. 그래도 보호자가 직업이 있는 경우라면 형편이 나은 것이고, 보통은 직업이 일정치 않거나 없고,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가장 큰 특징은 아이들과 그 가족 구성원들 대부분 매우 염려스러울 정도로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순진하고 감정 표현이 단순하며 그리 인지 능력도 크게 높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순박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농촌 출신으로 생계를 위해 서울로 올라와 변두리 구로동에 정착해 가리봉 단칸방에 보금자리를 꾸리고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애처로울 만큼 열심이었지만 대부분은 무리하게 몸을 혹사하는 방식의 일자리밖에는 구할 수가 없었으며, 그나마 직업이라도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었다. 대부분 학력도 매우 낮았고 어떤 사회에서도 그리 주목받지 못하고 주눅 들고 멸시 당하며 업신여김을 당하며 살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살아 있으면서도 지금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불안한 사람들이었다.

이 인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지겨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M’은 이런 질문에 허물어질 사람들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아니면 지레 가난하고 힘들고 상처받은 이들이 ’M’의 거대한 가슴 속에서 미리 안식을 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M’은 크고 비정한 무명(無名)의 도시에서 버거울 만큼의 관심을 쏟아 부어준다. ’M’은 확실한 행복을 약속하고, 이런 삶은 그저 허깨비일 뿐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단 한 번도 누구도 진지하게 말해주지 않았던 그 말을 속삭인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한다. 너의 행복을 바란다. 그리고 이곳에서 너를 기다린다.”

‘M’은 믿을 수 있도록 보여 주었다. 서로서로 다니기 시작하면서 서로 익숙한 얼굴들을 확인할 수 있었고, 마침내 으리으리한 ‘우리들의 신전’이 지어졌다. 10대에 가까운 대형 버스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모습들을 직접 보면서 모든 말들은 분명한 확신이 되어 다가왔다. 영광스럽고 행복한 모습이다. 사회에서의 계층은 무의미하게 무너지고 ‘M’안에서는 헌신만으로 새로운 지위와 존경의 서열이 가능해졌다. 상층과 하층이 뒤섞이고 사회에서의 경멸의 대상이었던 무지는 신앙에서의 순결함으로 칭송을 받았다. ‘M’은 거대한 혁명적 안식처가 되었다.

최근에 들어온 두 형제도 그런 맥락 속에 있는 가족이다. 전라도 익산이 고향이라는 아이들의 어머니는 15년이나 된 서울이 아직도 무섭다고 한다. 엄만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면서 6학년인 큰 아이도 서울이 무섭고 5학년 때 왕따 당한 일이 너무 분해서 자살을 하고 싶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지난 해 결국 공부방을 뛰쳐나간 D도 무자비한 아버지의 폭행을 당하는 엄마를 끌어안고 ‘M’으로 가자고 먼저 졸라댔다고 한다. 맞은 엄마를 끌고 오빠가 졸라대면 한 살 어린 여동생은 울면서 찬송가를 불렀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가 없는 그 자리에 ’M’이 위로와 의지의 상징이 되어 이 맞아 죽어가는 가족에게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맑스인지 엥겔스인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을 했다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지만, 무엇보다 아편 성분이 든 진통제라도 맞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인민들이라는 점을 지적했다면 참으로 그 말은 옳다.

‘M’에 대한 입장은 한참 혼란스러웠다. 왠지 ’M’에게 바보스럽게 이용당한다는 생각에 거기 다니는 아이들은 받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래서 엄마가 죽어서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이를 데리고 혼자 살 길을 찾고 있으니 아이를 봐달라는 거기 다니는 아빠의 요청을 거절한 적도 있었다. 아이가 특정 시간에는 공부방을 떠나 거기로 가야 한다는 말을 하자마자 마음은 벌써 싸늘하게 굳어 버렸다. 다른 방과후 돌봄 프로그램을 안내하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이용당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러면서 두려웠지만 왜 ‘M’이 직접 자기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지가 의아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어쨌든 한참 뒤까지 한 번도 본적조차 없는 이 아이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고상하게 ‘UN아동권리협약’의 조약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아동들은 종교나 국적, 인종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무차별성의 원칙’에 어긋나는 짓을 했기 때문이라고 에둘러 됐지만, 실은 단순히 아동인권을 좀 더 알게 된 것만으로 거기 다니는 문제를 달리 바라볼 힘을 얻게 된 것은 아니다. 잘 모르지만 무언가 좀 더 근본적인 흔들림 때문이다. 어쩌면 인민들 스스로가 필요해서 아편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었다는 당연한 생각을 이제와 할 수 있게 된 탓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다닌다고 하면 그 동안은 마치 이미 괴물에 먹혀버려 아무런 희망쪼가리도 남지 않았을 것처럼 생각해왔다. 벗어나게 해주어야 정상이 될 것이란 조바심과 그럴 가능성도 힘도 없다는 좌절감 사이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방학 동안 거기 다니기 위해 가리봉 아빠 집을 다니러 온 동안만이라도 공부방을 다니고 싶다는 아이에게 ‘어른이 되었을 때 거기 다닌다는 의미를 한 번만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허락하겠다’고 한 적도 있다. ‘M’을 향한 굳센 믿음에 나름의 쐐기를 박았다고 자축한 순간이었다. 짝퉁이 아닌 ’진품 아편‘이어야 한다는 강력한 소망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실은 ’M’을 만들어내는 인민의 힘이 두려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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