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규칙, 지킬까 말까. 3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3. 공감능력과 규칙의 근거

홍아야, 이제부터 거울뉴런이 가진 공감 능력에서 규칙의 근거를 찾는 우리의 과제로 돌아가자. 먼저 양심이 거울뉴런의 공감능력에서 생기는지 양심의 실재성을 살펴보고, 만약에 실재한다면 양심이 규칙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알아보자. 역사적으로 볼 때 거의 모든 문화는 양심의 존재를 인정했었고 몇몇 종교에서는 신의 목소리라고 믿어왔단다. 그러나 근대 경험주의 철학은 양심의 선천적 자명성을 부인했어. 그러므로 양심에 대한 서로 다른 몇 가지 개념에서 양심이 어떻게 생기는지 밝혀보자.

직관주의는 양심을 어떤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타고난 직관(경험에 비춰보거나 이성적으로 추리하지 않고도 보자마자 곧바로 알아차림)적 능력’으로 본단다. 경험주의는 양심을 어떤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과거에 누적된 경험’으로 봐. 행동주의는 양심을 특정 사회의 자극에 따른 ‘일련(가지런하게 하나의 전체로 정리됨)의 학습된 반응’으로 보고. 프로이트는 ‘초자아’라는 개념으로 양심을 설명했단다. 그에 따르면, 초자아는 욕망의 ‘나’와 타협의 ‘나’와 함께 나를 이루는 주요 요소로서 어린 시절 부모의 인정과 처벌을 통해 도덕적 가치가 내면화된 ‘나’ 즉 양심의 ‘나’란다. 그러므로 나쁜 행위를 금지·비난·억제하는 내면화된 장치가 양심으로 알려진 초자아란다.

여러 개념 정의들에서 양심이 언제 어떻게 생기는지 즉 양심의 근거에 대한 관점이 학설마다 다르구나. 그러나 양심이 어떤 행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어. 그런데 그 판단 능력을 직관주의는 선천적인 직관 능력으로 보나 경험주의나 행동주의나 프로이트 심리학에서는 후천적인 경험이나 학습의 누적으로 생겼다고 본다는 것이 다르지. 그러나 하버지는 선천적인 직관 능력과 후천적인 경험(또는 학습) 결과 둘 다를 인정하며 또 이 둘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어느 한 쪽을 부정하지 않고 직관 능력과 경험 결과가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모순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반론할 수도 있어. 왜냐하면 직관능력이 있다면 경험이 없어도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는 주장과 경험이 없다면 선악을 판단하지도 못하므로 직관력 같은 것은 없다는 주장이 서로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야. 이 두 주장 사이에서 직관과 경험이 서로 연동되어 맞물려 작용한다면 이는 양다리를 걸치는 모순일까. 과연 직관과 경험이 연동될 수 없기에 양자에서 택일해야 하는가. 경험 없이 직관만으로 또는 직관 없이 경험만으로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직관과 경험이라는 두 벡터가 상보적인 관계로 작용한 결과가 양심이라는 하버지의 주장이 정말 모순인지 살펴보자. 먼저 인간이 보편성과 특수성을 생각해보자. 인간의 보편성을 찾고자 한다면 동물 집합 가운데 다른 동물과 구별하기 위해서 인간을 개념 정의할 때 지적되는 인간의 본질들 즉 본래적인 성질들을 떠올려보자. 이를테면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에서 인간은 사고능력이 있고, ‘사회적 동물이다’에서 사회성도 있다. 그 밖에 언어사용이나 도구제작이나 문화 창조나 유희성, 종교성, 예술성, 상징성, 공감성, 등등.

그러나 홍아야, 여기서 말하는 보편성에 대하여 두 가지를 꼭 알고 가자. 하나는, 보편성의 어느 한가지만으로 인간 전체의 보편성을 대표할 수 없다는 점이고 둘은, 이들 보편성이 개체의 경험보다 앞서는 존재 즉 선험적 존재라는 사실이야. 이를테면 사고능력은 다른 동물과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인간만이 가지는 특성은 아니므로 사고능력 하나만을 기준으로 인간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는 없단다. 사고 능력 한 가지로만 보면 어린아이보다 똑똑한 동물이 있을 수 있고 동물보다 멍청한 인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보편성은 이제까지 발견한 인간의 보편성 모두를 하나의 전체로 묶은 인간의 경험 가능성 즉 인간성을 가리켜. 물론 아직 발견되지 않아서 지적되지 않은 인간성이 더 있을 수 있으나 모르는 것에 대하여는 말할 필요가 없어.

그리고 여기서 인간성은 현실성이 아니라 가능성을 가리킨단다. 특수하고도 구체적인 개체로 실현된 인간성 즉 개성이 아니라 개성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리켜. 가능성이 있어야 현실성도 있을 수 있고 현실성이 있어야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단다. 거꾸로 말하면 가능성 없는 현실성 없고 현실성 없는 가능성 없단다. 현실성은 개체에게 나타나 있지만 모든 단위존재의 가능성에 대한 정보가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실성이 나타날 수가 없는데도 현실적인 단위존재들로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잖아. 그럼 가능성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어야 돼. 생물학자들은 그것이 염색체의 유전 정보로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가능성을 바탕으로 하는 개체의 설계도이지 인간이라는 종의 가능성은 아니야. 그리고 이런 유전 이론을 원자나 분자 단위에는 적용할 수도 없고, 그래서 하버지가 믿고 따르는 화이트헤드라는 철학자는 모든 단위존재들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곳을 신이라고 이름 붙였어.

그런데 바로 이 인간의 가능성 즉 인간성은 경험과 상관없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최소 공배수 또는 공통분모와 같은 것이라는 점에서 경험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임을 알 수가 있어. 마찬가지로 공감뉴런으로 생긴 양심이 누구에게나 있는 인간성의 일부라면 우리는 양심을 선험적인 직관력으로 인정해야 할 거야. 사이코패스의 경우도 공감 가능성이 매우 적게 실현되어서 양심이 희미할 뿐이지 인간으로 태어나서 공감능력과 양심이라는 인간성 즉 인간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순 없어.

아무리 문화권이 달라도 맹자의 말대로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내면 칭찬하고 모른 체했다면 비난할 것이다. 이와 같이 문화권은 달라도 공감에 따라 남들이 좋아하는 행동은 하자고 규정하고 싫어하는 행동은 말자고 규정하지 반대로 규정하지는 않아. 어떤 행위가 옳고 그름을 문화적인 경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판단하기는 하지만 선악을 판단한 결과가 차이나는 부분보다 공통되는 부분이 오히려 훨씬 더 많다는 것은 양심이 선험적 직관력이 있기 때문이야. 성악설은 생리적 이유이든 심리적인 이유이든 공감 능력의 부족이나 결여로 원초적인 욕망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본래적인 인간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야. 선악을 따지는 것 자체가 원초적인 욕망을 공감 능력으로 제어할 수 있게 진화된 이후에나 가능했을 거야. 뿐만 아니라 공감에 따라 양심대로 살려는 삶의 의지 그 자체를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양심이라는 선천적 직관능력을 인정해야 돼.
인간이 영장류에서 진화되었다 하더라도 영장류와 인간과의 경계선이 뚜렷하므로 누구나 인간과 원숭이를 구별할 수 있어. 원숭이와 인간 사이에 우연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떠올릴 수는 있으나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성은 인간들과 원숭이들 뿐이야. 인간에 가까운 원숭이나 원숭이에 가까운 인간 등, 원숭이와 인간 사이에서 그 중간으로 분류되는 현실적인 존재는 없어. 이와 같이 진화는 무한한 점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 단계의 포함하면서 초월하는 질적인 비약이야. 수정란이 엄마의 태반에서 진화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자라는 과정에서 물고기에서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 영장류를 거쳐 사람 꼴이 나오는 것을 보아도 진화는 전 단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포함하면서 초월해.

이와 같이 초월하고 비약하는 진화과정 때문에 단위 존재들 사이에 위계성(단계적인 위치에 놓이는 성질)이 생겨. 그리고 초월과 비약에 따른 위계성은 우주의 진화에 질서가 있고 방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수많은 진화 과정을 꿰뚫는 하나의 열쇠 말은 진화될수록 경험 가능성 즉 의식의 확대야. 그리고 또 하나, 경험 가능성 또는 의식이 확대되는 만큼 각 단위 존재들의 물리적 또는 생리적 구조도 경험 가능성을 담기 위해서 복잡진다는 거지. 이를테면 원숭이에서 인간으로의 진화는 엄청난 정신 능력의 비약이고 또 육체적으로는 인간으로서의 경험이 가능하도록 직립하여 손이 자유를 얻었으며 두뇌 용량과 정교함에서 원숭이보다 훨씬 복잡해졌어. 특히 인간은 진화의 방향을 잘 보여주는 존재야.

여기서 말하는 경험가능성이라는 의식작용은 생물만이 아니라 진화 과정에 나타나는 모든 단위존재 즉 원자나 분자 따위 무생물도 가지고 있다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을 하버지는 믿고 있단다. 그리고 이 경험가능성 즉 의식작용은 인간의 자의식만이 아니라 자율신경계의 생리작용과 환경에 반응하는 생태활동을 포함하는 무의식적인 모든 생명활동을 가리켜. 의식 중에서 인간은 자기의 의식을 떠올릴 수 있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자의식 밑에 깔려 결코 떠올릴 수 없는 무의식이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해. 무의식은 오랜 세월의 진화과정에서 전 단계의 모든 생명활동을 포함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크고 깊고 많겠지.

그러니까 진화의 방향은 의식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이고 그것은 경험가능성을 확대하는 과정이기도 하지. 그리고 또 여기서 말하는 경험가능성은 그 단위존재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을 가리켜. 이를테면 앞에서 말한 인간의 보편성을 줄여서 인간성이라 했을 때 그 인간성이 바로 인간의 경험 가능성을 가리켜. 새로운 인식을 받아들기 위해서 기왕의 인식체계가 재구성되는 정신작용뿐만 아니라 밥을 먹고 그 영양소가 피와 살과 뼈가 되어 새로운 세포로 거듭 나는 생리적 활동과 새로운 경기의 기술을 익히는 육체적 활동도 모두 다 중요한 경험가능성이고 보편적인 인간성이야. 그러니까 경험가능성이란 생리적이든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외부 요소를 끌어들여 나의 몸과 마음의 일부로 만드는 모든 인간의 생명활동이야.

그런데 우주의 진화를 보면 현실성이 없는 가능성도 없고 가능성이 없는 현실성도 없단다. 우주의 어딘가에 실재하는 증거로 드러난 가능성만이 가능성이지 우주의 현실에서 실재하지 않는 가능성은 가능성이라 말할 수 없단다. 앞서도 말했지만 상상으로는 인간과 원숭이 사이에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이는 실재로써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실재하는 가능성이 아니란다. 또 가능성이 없는 현실성이 없다는 뜻은 어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이라도 인간이라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가능성 즉 인간성을 벗어난 인간은 없다는 뜻이야, 이를테면 원숭이에 더 가까운 인간이나 인간에 더 가까운 원숭이는 없다는 뜻이란다. 물론 여기서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어선 가능성과 그에 따른 수많은 현실성들을 결코 부정하는 것이 아니란다. 이를테면 양자의 불확정성의 세계가 관찰을 되지만 왜 그런지를 알지는 못하니까 불가지론(不可知論)이니 논외로 삼자는 거야.

홍아야, 여기까지 따라오느라고 힘들었지. 힘들게 해서 미안해. 거의 다 왔어. 앞에서 거울뉴런이 공감을 만들고 공감이 양심을 만든다는 것을 밝혀냈잖아, 이젠 양심에서 규칙의 근거를 찾을 차례야. 양심이 선천적인 직관력이냐 후천적인 경험 축적이냐 하는 문제를 양심이 선천적인 경험의 가능성이냐 후천적인 경험의 현실성이냐 하는 문제로 바꾸어 생각해보자는 거야. 인간에게는 거울 뉴런이 있어서 누구나 공감 가능성을 타고나나 특히 어린 시절의 경험에 따라 다정다감한 현실성이 될 수도 있고 사이코패스와 같은 현실성도 될 수가 있지. 마찬가지로 양심도 어린 시절의 경험에 따라 맑고 밝은 거울이 될 수도 있지만 녹 쓴 철판이 될 수도 있어.

남의 동작인 표정이나 언어, 문화만이 아니라 어떤 일의 시비(是非)나 미추(味鄒)에 대한 이해와 판단도 공감과 공명 능력에서 나온 모방과 학습 능력 때문에 가능하고 선악(善惡)을 판단하는 양심도 남이 좋고 싫어하는 감정을 공감하는데서 나온 댔어. 그런데 만약에 인간으로서의 경험 가능성 즉 인간성이라는 걸 타고났기에 인간으로서의 경험이 시작되고 축적되어 정도와 양상이 다르게 실현된 개성 즉 현실성도 생기게 된 거야. 여기서 공감의 가능성은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직관력을 가리키고 공감의 현실성은 경험이 축적된 인식체계를 가리켜. 그러므로 양심의 현실성은 어린 시절에 보호자의 규칙을 내면화시킨 초자아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지.

내 말은 공감 능력인 양심의 근거를 선험적인 직관이 아니면 경험적인 학습과 축적이라고 양자택일로 몰아가지 말라는 거야. 거듭 말하자면 가능성 없는 현실성 없고 현실성 없는 가능성 없다면 양심은 공감의 가능성과 현실성이 함께 작용한 거야. 그리고 공감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려는 인간성으로 미루어 본다면 규칙의 근거는 공감과 양심이란 거야. 공감과 양심이 일정한 행동을 하게도 하고 말게 하잖아.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이 더불어 살려면 남이 좋아하는 행동은 해야 하고 싫어하는 행동은 말아야하는 것이 행동의 기준인데 그 기준이 공감 때문에 생기며 그 기준으로 규칙을 정하니까 규칙의 근거는 공감과 양심이라는 거지.

거울 뉴런이 실재하는 것이면 양심도 실재하는 것이야. 앞에서 보았듯이 그래서 예수님이나 공자님도 공감에 따라 즉 양심에 따라 해야 될 행동들과 말아야 될 행동을 구별하여 규칙을 정했어. 그러므로 드디어 우리는 규칙의 근거를 찾은 거야. 홍아야 우리가 돌고 돌아서 찾은 규칙의 근거는 신도, 이성도, 힘도, 여론도 아닌 바로 인간이 지닌 공감 능력 또는 양심이었구나.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