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스테인레스 접시에 담긴 죽음Ⅱ

- 성태숙(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스테인레스 접시에 담긴 죽음Ⅰ에 이어서…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일 생길 때마다 찾는 마음을 모른 척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할머니와 함께 입원해 있다는 동생을 찾아가보니 아픈 기색이 역력한 초로의 아저씨셨다.

아저씨는 열여섯 넘어 돈 벌러 고향 전라도를 떠나와 여기저길 떠돌았다고 한다. 그렇게 식구들과 소식이 끊기고 어찌 여자 하나를 만나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살았는데, 그 마누라도 벌써 십여 년 전에 집을 나가고 그 뒤로 자식들도 차례로 집을 나갔다고 한다. 그리곤 위암에 걸렸다고 한다. 그럼 식구 소식은 통 모르냐는 말에 마지막으로 곁을 떠난 서른 넘은 아들은 방세를 못 내 결국 방을 빼게 되었는데. 월세 보증금 거의 전부를 강탈해가다시피해서 나간 후 아무 소식이 없다는 대답이다. 자식 노릇은 고사하고, 찾아와서 무슨 행패나 부리지 않을까 무서우니 말도 꺼내지 말란다.

그렇게 아픈 몸을 끌고 집도 없고 식구도 없이 홀홀단신이 되어 대림역 인근의 친구 집에서 의식을 잃고 쓰려져 119로 실려 오게 되었다는 것이 얼추 그간의 사정이다. 그 몸과 그런 사정으로 30년 만에 누나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런 동생이 자꾸 배가 불러오니 MRI라도 찍어봐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어떡하겠느냐고 좀 도와달라는 것이 할머니의 부탁이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급하긴 하였다. 어쨌든 구로에서 지원을 받으려면 구로사람이어야 하는데 아저씨는 방은 뺐지만 여전히 방이 있던 광명시 주민으로 되어있었다. 대림역 집은 어찌 된 것이냐 물어보니 친구 집에 조금 돈을 내고 잠깐 얹혀살려던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 할머니 집으로 아저씨 주소지를 옮기자고 하였다. 그런데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네도 아저씨가 들어오시면 지원이 변경될 수도 있다고 하니 그도 또 망설여졌다. 그럼 그 다음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우리 집밖에 없엇다. 부탁할 만한 곳도 없고 다급한데 더 따질 일도 아니다 싶었다. 진짜 아저씨를 들일 형편은 안 되지만 일단 주소지를 옮기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신청을 하든 다른 방법을 좀 찾든지 해서 차차로 그 다음 일은 해결할 일이다 싶었다.

필요한 서류를 들고 다시 아저씨 사인을 받으러 병원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아저씨도 할머니처럼 글을 모르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편찮으셔서 그런지 어쩐지 아저씨는 자기 이름자도 제대로 쓸 줄 몰라 하셨다. 가운데 봄을 뜻하는 글자에서 ‘ㅊ‘은 특히 어려운 눈치셨다. 60년이 넘는 세월을 자기이름 글자조차 제대로 못쓰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 깡마른 몸뚱이로 이 엄청난 자본주의가 산업자본주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그리고 신자유주의로 넘어가는 것을 고스란히 겪어내면서 그 남자는 자기 이름 글자 석자도 감당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온 몸으로만 이 파고를 넘기려니 몸뚱이가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해 보였다. 평생을 써왔다는 인감은 당신 이름도 아니었다. 이름도 잘 못 쓰는 그는 온갖 것을 다 잃고 암 덩어리 하나만을 간직한 채 30년 만에 식구라고 그래도 누나를 찾았던 것이다.

할머니는 또 숨이 꼴딱꼴딱 조급해 하셨지만 병원비는 채 20만원도 안 되는 돈이었다. 당장의 병원비도 그렇지만 그 보다는 앞으로 어찌 살 것인지 그 궁리가 급했다. 아저씨를 기초생활수급자 지정을 받게 해드리는 것이 가장 나은 도리인 듯 싶었다. 그런데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려면 소식도 없는 가족들이 부양포기 의사를 밝혀야만 한다. 가출해서 연락도 없는 식구들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행정절차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참 답답하였다.

또 기초생활수급자가 된다 할지라도 어차피 식구들이 있어서 나오는 돈은 겨우 얼마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여기서 방 하나 얻어 방값내고 세금내고 나면 입에 풀칠도 겨우겨우 할 정도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양시설 같은 곳을 가시는 게 낫겠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환자가 완강히 거부를 하였다. 거기에 들어가면 다 죽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살기도 녹록치 않다. 이미 위뿐만 아니라 내장 전체에 암이 전이되기 시작하여 회복이 결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병원에 있으면서 누님 수발을 받으니 그래도 회복되는 기분이 드는가 요양병원 이야기에 펄쩍 뛰면서 방만 얻어주면 금방 일을 하러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열이 오르면 맥도 못 추고 화장실 가는 것도 힘겨워하시면서 일을 하러 나갈 수 있다는 말을 하시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울컥했다. 그래! 우리야 꿈적거리지 않으면 어찌 입에 풀칠을 하고 방바닥에 등허리를 붙여보겠는가? 몸뚱이가 아무리 죽겠다고 아우성을 쳐도 혓바닥이 살아있는 한 여기에는 뭘 올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다. 차마 아파서 입맛도 잃고 소화도 안 되고 뭘 먹고 싶은 마음도, 뭘 하고 싶은 마음도, 무엇을 할 수 있는 기력도 없어지는 것, 그래서 아픔이나 슬픔, 두려움이나 원망도 느낄 기력이 없어지는 게 우리네 인생에는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절로 뜨거워졌다.

그렇게 아저씨는 잠시 기력을 회복하는 듯 했다. 아저씨의 기력이 회복되면서 차차 밝혀지는 일들도 생겨났다. 이미 오래 전에 수술을 받고 올해 입원을 한 것은 갑자기 다시 상태가 나빠져서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을 할 때 친동생과 조카가 입원보증을 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출 신고를 해놓은 경찰에서는 나중에 자식들의 연락처를 알았다고 연락이 왔다. 연락을 해도 보고 싶지도 않다고는 해지만 찾긴 찾았던 것이다. 그래도 내 눈에는 그 어느 한 사람 코배기도 뵈질 않고 오직 할머니 말만 믿을 수밖에 없는데 며칠에 한 번씩 다른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이다.

일이 그러하니 나도 다시 ‘아따! 이 할마시 봐라!’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을 어디로 어떻게 보고 하는 생각에 절절한 마음이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럼 나 몰래 식구들끼리는 다 연통을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가면 무슨 말은 하고, 무슨 말은 하지 말라고 일일이 시켜는 할머니다. 당신 나름으로 수를 쓰시면서 나까지 시켜먹는 것이다. 그러면서 맨날 “선상님이니께 이런 말도 한다”고 하더니만 그것도 아닌 것이다. 섭섭할 일이 무에 있겠나? 다 그런 줄이야 안다. 알고도 당하고 모르고도 당하는게 내 신세 아니던가?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다. 그저 아저씨가 자기 이름 석 자도 제대로 쓸 줄 모른다는 것, 그것 하나면 난 족하다. 그것 하나면 내 명분으로는 부족함이 없다. 아직도 명분이 중요한 나는 오랜만에 눈물이 날 만큼 고귀한 명분을 얻었으므로 늙고 교활한 민중의 꼼수는 그냥 넘기기로 하였다.

드디어 기초생활수급자 신청도 되고 인근 복지관의 도움으로 한 달짜리 고시원 방도 얻어서 아저씨는 퇴원을 하게 되었다. 할머니가 벌써 여기저기 고시원을 알아보고 어디는 어떻다 난리를 부리며 절대 시장 안 고시원만은 안 된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고시원 앞의 꽃집 장사를 잘 아는데 그 사람들이 혹여 당신을 알아보고 왜 거길 드나드는가 묻는 게 싫으셨던 것이다. 손주들이 지적 장애 판정을 받은 것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할머니시다. 첫째 아이가 그래도 괜찮은 중소 문구류 제조회사에서 물류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걸 굳이 전공 살려 취업을 했다고 말하고 다니시는 꼿꼿한 분이시다. 비록 임대 아파트에 살지만 깔끔하게 하나도 흐트러짐 없이 아이들 건사며 집 정리를 해내시는 것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거기에 대면 나는 정말 허당이다. 그 할머니 눈에 나는 ‘등신 중에도 상등신’에 속하는 줄을 나도 잘 알고는 있다. 나도 또 우리 어머니도 좀 그렇다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퇴원을 하신 아저씨가 피를 뭣같이 쏟으며 다시 입원을 하게 된 것은 채 사흘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갑자기 사나흘 만에 할머니가 다시 도와달라는 전화를 해서 알게 되었다. 퇴원을 해도 앞으로 큰 짐 하나를 짊어지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안그래도 마음이 무겨웠는데 덜컥 다시 입원을 하셨다니 그럼 퇴원은 왜 했나 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앞섰다. 퇴원 전에 고시원 등등 해서는 한 번 지원받으면 땡인 것이 많았다. 이렇게 다시 입원을 할 줄 알았으면 그럼 퇴원을 말았어야 하는 건데 낭패감이 컸다. 그러기에 있을 수 있을 때까지는 그냥 병원에 계시라고 했더니 말을 안 들으시고 또 나름 꼼수를 부리다 사람 힘들게 하는구나 하고 성질이 왈칵 났다.

그러나 아저씨는 영 회복의 기미를 못 찾으셨다. 결국은 호스피스 병원을 알아보고 옮기자고까지 결정을 하였는데, 옮기기 전 날 아저씨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이들이 다 돌아간 밤이었데 할머니께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셨다. 이런저런 일로 퍽 지치고 쓸쓸했던 밤이다. 집에도 안 가고 서성거리고 있다 할머니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저쪽의 할머니는 울기부터 하셨다. 비명같은 울음이었다. “선상님! 그 놈이 갔어!” 뭐 그런 말이었던 것 같다. 쓸쓸하고 지치고 쉬고 싶은 밤이었는데……..아저씨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 이름만 올라와있는 아저씨가 말이다. 식구라고 해야 하나 어쩌나 하던 아저씨가 말이다.

할머니는 무슨 눈치가 있으셨던지 사나흘 전부터 시신기증을 해야겠다고 서둘렀었다. 나보고도 전화를 해보라고도 하고, 당신도 병원을 통해 또 말씀을 해놓으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돌아가신 아저씨는 그냥 기증이 되실 예정이셨다.

기증이 되실 아저씨는 처치실에 계셨다. 아래층 영안실 냉장고에 일단 보관이 되기 전 입원실 한 구석에 있을 때 나는 할머니와 둘째 아이를 만났다. 아이를 병원에서 본 것은 처음이다. 잠시 오고가기를 왜 안 했겠는가 만은 뭐 좋은 꼴이라고 하면서 할머니가 아이들 병실 출입을 가능한 시키지 않은 줄 알고 있다. 할머니는 울고 계셨다. 끝판에는 뭐한다고 나타나서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냐고 원망하던 동생인데, 그래도 불쌍하게 갔다고 울고 계셨다. 할머니를 붙잡고 위로랍시고 “그래도 이렇게 할머니 품에서 돌아가셨으니 아저씨는 편히 가셨을 거예요”라고 딴에는 말을 꺼냈는데, 할머니는 “이렇게 가는데 편히 가길 뭘 편히 간다고 그러냐”고 또 그 와중에 타박을 하신다. 그래도 날이 날인만큼 수긋이 듣기로 한다.

옮겨갈 인부들이 와서 함께 들어가 아저씨를 처음 뵙게 되었다. 할머니는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겨가면 줄 요량으로 속옷과 양말, 잠옷을 사놨는데 그걸 사자에게 입히면 안되겠냐고 간청을 하였다. 하지만 병원 측에서는 해부학용으로 기증될 시신이니 소용없는 짓이다 싶었던지 거절을 하였다. 사람 몸 크기에 딱 맞는 스테인레스 접시에 하얀 린넨 천을 깔고 덮은 아저씨가 계셨다. 얼굴빛이 약간 회색으로 굳은 모습이 스테인레스 접시가 너무 차갑고 천은 너무 얇아 추워서 그러는 것만 같았다. 식구라도 돌아가신 분을 거의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내가 어찌 나올까가 가장 궁금했다. 하지만 충격은 없었다. 할머니가 아저씨 이름을 부르며 소리쳐 울어대는 모습을 뒤로, 인부 둘이 침대를 끌어내기 시작하였다. 할머니는 울고, 나는 할머니를 부측하고, 둘째 아이가 뒤를 따르는 조촐한 장례 행렬이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언제부터 나도 울음이 터졌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살뜰한 정이 있을 리 만무하건만 나는 진심으로 울고 있었다. 아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눈물은 멈추질 않는다. 어쩌면 그만을 슬퍼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렵고 외롭게 살다가는 사람들은 그리 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울었을지도 모른다. 저리 가는 것을 하며 울었을 수도 있다. 저렇게 접시에 담겨 이렇게 쓸쓸히가는 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얼마나 안쓰럽게 살았는가? 맨 나중에는 간병인에게 “우리 누님 밥 먹었나 좀 챙겨 달라”고 했다는 것이 그래도 아저씨의 마지막 말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런 사람인데, 그들이 부리는 꼼수라는게 고작 그런 것인데…….하는 생각이 하염없이 나를 울렸다.

장례식장을 접어들어 모퉁이를 도니 삼열 종댄가 사열 종대가 아무튼 죽 늘어선 차가운 냉장실 문들이 보였다. 관 하나 크기로 짜여진 차가운 냉장실 안으로 아저씨가 쑥 밀려들어가는 것을 끝으로 이 장례 행렬은 끝이 났다. 그 순간만이라도 아저씨를 향해 붙들고 가지 말라고, 이렇게 죽으면 어떻게 하냐고 그런 말이라도 하며 붙들고 매달렸어야 했는데,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리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린 모두 울었지만 모두 시원찮았다. 그나마 할머니만 몸을 좀 못 가누어 하셨을 뿐이다. 하지만 그 울음조차 그리 옹골차지는 못했다.

사인을 하라는 요청이 있어 금방 서류를 보아야 했다. 잠시 위층의 상담실로 가자고 해서 따라 올라가 서너마디 말을 들은 뒤 우린 밖으로 나왔다. 다시 사망증명서를 떼느라 내가 다시 입원실로 올라가 거의 30분이 넘게 기다렸다 의사를 만나 증명서를 떼고 그걸 다시 장례식장에 갔다주고 오느라 밤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피곤한 슬픔이었다.

셋이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밤길에 내 손에는 할머니가 전하지 못한 아저씨 선물이 들려 있었다. 속옷 가게 로고가 찍힌 비닐봉지 안에는 새로 산 아저씨 런닝과 팬티, 양말과 잠옷 한 벌이 들어 있었다. 그 안에는 병실 자원봉사자와 할머니, 아저씨 세 분이서 함께 찍은 사진도 코팅이 되어 함께 들어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물건을 가져가기 싫다는 것이다. 어디 누구 줄 데 있으면 주라는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신 분께 전해 드리려고 샀던 물건을 누구에게 줄 수 있을까 하며 일단 받아 들었다. 버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교회를 나가신다. 그러니 아저씨는 죽어도 사잣밥 한 그릇 얻어먹지 못하게 생겼다. 죽자마자 차가운 냉장고에 누워있다 내일이면 해부학 실험실에서 낱낱이 찢길 운명이다. 아저씨는 그걸 알고 있겠지…..어쩔 수 없으니까 돌아가신 분도 아마 뒤도 안 돌아보고 얼른 이 땅을 떠나셨을 것 같다. 당신의 서글픈 신세야 ‘뭐 어차피 죽은 거, 죽은 몸뚱이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누’하고 그냥 넘겨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돌아가신 분은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장례나 제사야 원래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장례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우리 집이나 나는 본 데 없이 그냥 편히 지내온 사람이다. 종교도 없으니 더더욱 뭘 어찌하는지를 모른다. 하지만 죽어서 먼 길 갈 사람한테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냉수 한 사발이라도 올려드리고 싶은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집에 있는 아들에게 작은 상을 내려 달라고 하면서 “혹시 아니? 그래도 마지막 주소지가 우리 집이잖아. 아저씨가 그래도 여길 한 번 오실지도 모르잖아.”하고 애써 이유를 갖다 붙여본다.

새로 밥을 지을 정성까지도 없는 하찮은 마음이었다. 상 위에 밥 한 그릇에, 물 한 사발이었다. 이래야하나 하고 밥그릇에 숟가락 하나를 꽂아 두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준비한 선물을 앞에 두었다. 누님이 주신 건데, 입어 보지도 못한 건데, 그래도 말은 그렇게 해도 이렇게 준비까지 했었더라고 보이고 싶었다. 그렇게 쓸쓸한 상 하나가 문 밖 복도 한 켠을 밤새 지켰다. 곡을 하는 사람도 없이 상 하나 달랑이다. 그나마도 다음 날 사람들이 혹 놀랄까봐 새벽에 얼른 치워버렸다. 그리고 선물은 어찌 할 바를 몰라 아직도 내 방 한 켠에 그냥 두었다.

할머니는 다음 날 병원비 정산을 하셨다. 40만원 가량의 돈이 모자란 것을 함께 일하던 교사의 남편분이 해결해 주셨다. 할머니는 얼른 사망신고를 해서 미안하게 이름 올린 것을 얼른 빼주어야 한다고 서두르셨다. 서너 차례나 고맙다고 인사도 하러 오셨다. 언제나 할 인사는 제대로 하고 보는 깔끔한 어른이시다. 그래도 전화비랑 이것저것 돈 쓴 것은 수급자 비용에서 장례비가 나오면 물어주고 싶다고 하셔서 절대 싫다고 거절을 하였다. 물론 나 혼자 다 감당한 일은 아니니 공치사를 혼자 다 들은 일은 아니었지만 공치사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나도 다른 면에서는 깔끔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나도 꼼수가 없지는 않았다. 할머니가 공치사를 다 하고, 내가 들인 수고를 몇 푼으로 갚지 못하게 붙들여 매두었던 것은 나도 수작이 있었던 것이다. 내 바람은 할머니가 이제는 제발 세상을 향해 조금이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사셨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할머니의 삶을 다 모르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어쭙잖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다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속여먹으려고만 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켜드리고 싶었다. 절대 아무도 할머니를 무시하지 않는다고 간곡히 말하고 싶었다. 함머니가 얼마든지 우릴 속여도 괜찮다고….아니 사정이 그러하니 힘든 점이 있을 것이고 그걸 미리 배려하지 못한 우리가 더 잘못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이 이 세상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런 바람을 가져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러고 싶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속셈을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진정한 마음은 정말 그랬다. 할머니의 고마워하는 마음이 나에게 중요했던 이유는 할머니가 혹시라도 그런 세상을 조금 느끼셔서 그래서 내가 아닌 세상이 새삼 고마운 것은 아닌가 하는 공연한 희망의 살렘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이 어쩐지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할머니는 요즘 조용하시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글은 나의 조문이다. 별로 잘 알지도 못했던 아저씨에 대한 나의 조문이다. 귀찮게 생각하고, 날 속여먹으려 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며 만났던 미안함이 많은 아저씨에 대한 조문이다. 사람이 그렇게 속절없이 가는 줄도 모르고 괘씸하게도 생각했던 아저씨에 대한 미안함이고 안타까움이다.

이제는 어디에 계실런가? 아마도 그 어디든 이 세상보다 낫지 않을까 싶다. 그립던 부모님들도 만나지 않았을까? 혹시 떠났던 부인과 아들, 딸의 모습도 지켜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날 밤 누님이 흘리는 눈물과 애통한 울음소리도 들으셨을까? 그리고 이렇게 아저씨를 기리며 긴 조문을 쓰는 내 마음도 아실까?

평안히 가셨는지 여쭙고 싶다. 그리 만나 그리 헤어지니 참 헛헛하고 죄송스러웠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렇게 만나고 또 그리 떠나보내게 될 줄 차마 몰랐다고…..아마 곧 뵙고 인사드릴 날이 곧 올 것이다. 그래도 한 집에 함께 이름을 올린 식구였는데….. 가서 인사올리면 반갑게 맞아주시라고 바래본다. 여기는 다 잘 있으니 모두 잊으시라고….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