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밀양과 신자유주의 대항 운동으로서의 점거(2)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박은선 (리슨투더시티 디렉터)

*이 글은 신자유주의 테제 안에서 밀양 어르신들의 점거 운동의 의의와 방법론을 살피는 글로서  1, 2회에 나누어 걸쳐 연재할 계획이며 위클리 수유너머, urban drawings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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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대항의 공간으로서의 신체

또 하나 신자유주의 기획의 가장 중요한 공간은 개인의 ‘신체’이다. 철탑에 올라갔던 현대차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종탑에 올랐던 재능 교사들, 육 년 넘게 텐트에서 생활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한 재능 해고 교사들, 콜트 콜텍 노동자들과 활동가들, 내성천에 텐트를 치고 강을 관찰하는 내성천 지킴이들, 몸을 서로 결속하여 구럼비를 지키려는 지킴이들, 원자력 발전소, 고압 철탑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나이 어린 용역들과 싸우는 밀양의 할머니들, 이들의 점거는 공통재를 끊임없이 수탈하는 신자유주의의 무정부적 팽창을 저지하는, 신자유주의의 훈육을 거부하는 대항 품행 주체들이다.

신자유주의 통치성 작동의 단자로서, 기초단위로서 ‘신체’는 경제의 풀(pool)에서 자율적 운동을 실행한다. 신자유주의의 금융화라는 특질에 앞서 모든 사회 가치를 경제로 환원 가능케 했던 질서자유주의자들의 ‘경쟁하는 신체’ 이론 등장을 살펴보면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금융정책이 아니다.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를 정치적, 문화적, 정신적, 경제적인 이데올로기로 상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의 대처 총리는 신자유주의를 문화혁명이라고 불렀다. “경제는 방법일 뿐이고 목표는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간들, 임동근 외 옮김, 문화과학사,2008, 27p)이라고 말이다. 푸코는 [생명 관리 장치의 탄생]에서 독일 질서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탄생 과정을 밝히며 경제적 자유주의와의 차이점을 짚어낸다. “뤼스토우가 비탈폴리티크(Vitalpoitik)생명정책이라 부른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생명정치는 각 개인이 자연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사회의 골조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초단위가 다름 아닌 기업의 형식을 가진 골격을 구성하는 것이다. ‘기업’이라는 형식을 가능한 최대한으로 확산 일반화 하는 것, 이것이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이다.” (푸코, 생명관리정책의 탄생, 난장) 신자유주의는 사회체로서의 인간을 사회로부터 분리시켜 시장이라는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기업(enterprise)주체를 만든다. “시장 법칙만이 경제의 전반적 조절 원리, 사회의 조절 원리가 될 수 있도록 제도들을 정비하자는 것이다.” 오이켄이 말한 것처럼 의식적인 경제적 사회는 없고 경쟁하는 개인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 개인의 신체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서 작동하게 된다. 신자유주의의 민중은 기본적으로 자본에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신체가 아니라 경제 게임에 적극 가담한 하나의 참가자일 뿐이다. 이 시스템 하에 실업자, 해고자는 불쌍한 사람도 아니고 도태된 이들도 아니며 다음 게임을 기다리는 대기자일 뿐이다. 경쟁이 내재된 개인들의 집합. 그것이 신자유주의 사회의 본질이다. 경쟁하는 주체로서의 개인은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화 된 지 오래이며 ‘경쟁’은 자본주의사회의 가장 중요한 개인의 덕목이 되었다. 지금의 지성과 예술의 역할은 이 질서에 길들여 있는 신체의 감각, 신체를 경쟁에 길들이고 익숙하게 하는 리듬, 개인만이 존재한다는 훈육으로부터 이탈하게 하는 것 아닌가? 점거를 구성하는 것은 공간과 신체이고 시간이며 신자유주의 훈육으로부터 저항하는 적극적 퍼포먼스이다. “반복은 차이를 생산한다. 반복은 언젠가는 도래하는 혹은, 반복적으로 생산되는 연속과 연쇄 속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과 맞닥뜨린다. 그 사건의 다른 이름이 차이다.”(앙리 르페브르, 리듬분석, 갈무리 63p) 산재해 있는 저항의 공간들은, 신자유주의의 속도에 대항하는 공간들은 속도에 부적응한 자들과 그리고 그 속도를 거부하는 집단 지성의 창조적인 사건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신체 정치는 세계화 개념과 똑같이 자본축적에 대해서 탈세력화되고 있다. 축적을 위한 고깃덩어리로서의 신체로부터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노동자 개념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엇이 필요하다.”(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간, 임동근외 역, 문화과학사)라고 한다.  점거는 하나의 고깃덩이인 신체를 시간과 일상 리듬의 중지로서 정치적 행위자의 위치로 탈바꿈시킨다. 점거는 언어가 오염된 시대에 새로운 물리적 시적 언어로서 일상의 중지와 감각의 중단으로 우리에게 사고할 시간을 부여한다. 비포는 집단 지성의 주체화 과정을 만들기 위한 제언들 ‘시적 언어’ 그리고 예술이 치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와 치료는 장차 올 날들에서는 동일한 활동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절망과 우울증, 공황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탈성장 경제에 익숙하지 않을 것이며, 녹아내리고 있는 우리의 근대적 정체성을 상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화적 임무는 이 사람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정신병을 돌보면서 그들에게 가까이에 있는 행복 적응을 추구하는 방법을 보여 주는 것이다.”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노동하는 영혼,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12, 301p) 신자유주의 시스템에서 점거는 단순한 시위 직접행동의 하나가 아닌 공간과 시간의 절단으로서의 새로운 언어가 되어 가고 있다.

밀양은 계속될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은 ‘시장의 실패’로 나타나고 있다. 4대강 사업과 같은 환경 재앙, 골프장과 과도한 도로망의 구축, 중소기업의 도산, 젊은 세대의 실직, 자영업자 몰락 등 삶이 근본부터 무너지고 있다. 한국의 자살률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피폐한지를 그대로 보여 준다. 만 명당 31명이라는 경악스러운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인터넷 보급 이후 사람들은 웹으로 전달되는 평면적 정보를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느끼며, 실제 공간에서의 감각보다는 웹으로 전달된 시각 자료에 의지하여 판단한다. 도쿄 독극물 테러, 오옴 진리교의 아사하라 쇼코의 이야기는 세 가지의 생태학에 대한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그의 고향은 미나마타현 근처의 어촌이자 간척지였다. 즉 그는 진짜 땅을 밟고 자라지 않은 것이다. 그는 형이 잡아준 물고기를 먹고 수은에 중독되어 형과 함께 장님이 되었지만 미나마타와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산재 인정을 받지 못했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그리고 그는 증오를 키워 왔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4대강 보면서 우리도 그런 괴물을 언제 맞이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산업통상자원위원회에서 ‘송·변전 설비 주변 지역의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일명 ‘송주법’이 통과되었다. 송전탑 송전선의 문제를 근본에서 처리하는 게 아니라 주민들이 말을 안 들으면 토지를 수용하거나 보상을 해 주겠다는 말이다. 6차 장기 송·배전 설비 계획에 따르면 동해안의 신울진(신한울) 원전에서 출발하는 765킬로 볼트 송전선이 강원도와 경기도의 많은 지역들을 지나가게 된다. 경기도의 여주, 이천 등이 포함된다고 한다. 할머니들의 점거로 도시 사람들은 시간을 벌게 되었지만 언제 우리에게 닥칠지 모르는 일이 되었다.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은 ‘권력자는 최전선으로 원전은 서울에’라고 얼마 전 논평을 냈다. 맞는 말이다. 우리 코앞에 원전이 있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지 느껴야만 제동을 걸 수 있지 않을까? 신자유주의의 훈육은 공통의 가치 대신 소수의 이익이 공익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것을 깨우친 자들도 그 리듬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지만 밀양의 할머니들은 미리 깨달은 자들이다. 도시의 사람들은 할머니들의 말을 들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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