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대 과학

지동설 대 천동설 (4) – 1

- 박성관

( 지동설 대 천동설 (4) – 2  / http://suyunomo.jinbo.net/?p=12136 )

 

 

이번 주에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부정 실험이라는 마이켈슨-몰리 실험을 다루며, 아 참! 지난주에 등장했던 지독한 난문에 대한 답도 알려 드린다. 우선 지난주까지의 내용을 간략 정리하며 시작해보자.

 

1. 놀라운 발견과 심각한 의문

 

전기와 자기는 별개의 것이었다. 그런데 1820, 30년대에 외르스테드와 패러데이를 통해 둘은 서로 전환 가능한 것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패러데이와 맥스웰에 의해 전자기는 뉴턴 식의 원격작용이 아니라 장을 통해 전파(傳播)되는 것임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맥스웰은 그 전자기장(場)을 수학 방정식으로 통해 진술하는 데 성공하였고, 헤르츠에 의해 그런 수학적 구조물이 실재한다는 게 입증되었다. 전자기장은 실재했던 것이다. 이제 논리적,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원격작용은 사망하였다, 적어도 전자기학에서는 말이다.

 

헌데 문제는 맥스웰 방정식에 따르면 전자기파의 속도(즉 광파의 속도)는 진공 속에서라면 늘 초속 30만 Km라는 것이다. 이건 심각한 문제이자 어떤 해결의 실마리 같은 느낌을 동시에 주었다. 문제는 이런 것이다. 관측자의 운동 상태에 상관없이, 혹은 같은 말이지만 전자기파(광파)를 발하는 원천의 운동 상태에 상관없이 늘 동일한 속도(초속 30만 Km)라는 건, 뉴턴의 원격작용 못지않게, 실은 그것보다 더 심각하게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나마 뉴턴의 인력은 “자석도 그렇지 않느냐?”고 항변이라도 할 수 있지만, 광속이 일정하다는 것, 그것도 실측이 아니라 수학 공식에 의해서 늘 그러도록 정해져 있다니, 이게 무슨……

 

반면 해결의 실마리라는 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여러 차례 측정되었던 광속이 늘 초속 30만 Km였다는 점이다(물론 측정 시마다 미미한 차이는 있었지만, 오차는 대단히 작았다). 둘 다 말은 안 되지만, 말이 안 되는 일이 자연계에서 반복된다는 건, 우리의 말에, 우리의 논리에 어떤 문제점이 있다는 말이, 그런 논리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최소한 그럴 가능성은 있지 않겠는가?

 

일단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보자.

 

전자기파가 있다고 하자(이게 없다고 하려면 다시 뉴턴식 원격작용이라는 신비주의로 돌아가야 한다). 광파가 있다고 하자(19세기 초 토마스 영 이래로 빛이 파동이라는 게 서유럽 자연과학계의 압도적인 대세였다). 그렇다면 그 매질은 무엇인가? 파동이라면 그 파동이 전파되는 매질이 있어야 하니까 이는 당연한 질문이다. 매질 없는 파동이라는 건, 관중들 없는 파도 응원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관중들의 움직임은 파동의 전파 방향이나 패턴과 전혀 다르지만(만일 같다면 그건 입자 운동이다), 파동이 그런 관중들에 의해 생산되고 전파된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관중 없이 파도도 없다!

 

여기서 잠시 짚어 둘 것이 있다. 전자기파와 광파는 같은 것인가? 광파는 전자기파의 일부인가? 그러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전자기파와 광파의 속도가 동일하다는 것, 그것도 전자기파나 광파를 발하는 원천의 운동 상태와 무관하게 늘 일정하다는 점에서도 전자기파와 광파는 동일했다(이게 말도 안 되는 현상이라는 난점 또한 둘은 공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자기파의 매질도, 광파의 매질도, 지금까지 지구인들이 겪었던 그 어떤 물질과도 다른, 어마무지하게 특별한 매질이어야 했다(이 점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말했었……죠? 기억……나시나요? ^^;).

 

2. 매질을 찾아라!

 

전자기파와 광파가 동일한 것이든 아니든, 그 매질은 반드시 있어야 했고, 대단히X대단히 특이하고 기이한 것이어야 했다. 실제로 맥스웰 방정식이 그려낸 전자기파의 매질은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은 입자들의 바다가 아니라 장(場)이라는 이름의 바다였다. 맥스웰을 비롯한 당대 과학자들은 이 바다의 이름을 에테르라 붙였다. 에테르…… 이 말의 형용사형인 ethereal을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시라. “희박한, 가녀린……” 뭐 대체로 이렇게 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정확하게는 “희박한, 가녀린” 앞에 무쟈게, 졸라, 울트라 같은 말은 30만 개는 붙여야 할 것이다. 고대부터 중세까지 서구인들이 천체는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다는 걸 상기해보라. 엄청, 무시무시하게 희박한 물질로 되어 있으니 밤하늘의 그 무수한 별들이 지구로 쏟아지지 않고 영원히 천구를 돌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빛의 매질,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음파나 지진파의 매질과는 다르다. 음파의 속도는 음파의 원천이나 음파를 측정하는 측정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당연하다. 음파의 속도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의 속도가 그러하다. 그렇지 않다면 갈릴레오의 상대성원리는 물론, 우리의 상식 전체가 무너져 버린다. 그런데 빛의 속도는 어떤 운동 상태에서 측정해도 동일하다. 물론 여러분도 의구심을 가지셨겠지만, 이건 빛의 속도가 절라 빠르기 때문에, 그에 비해 인간의 측정 도구나 방법은 극히 둔중하기 때문에, 운동 상태의 차이에 따른 속도의 차이가 검출되지 않을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더욱 정교하게 실험을 하다 보면 그 차이가 드러날 수도 있겠다. 하긴 그것 말고 자연과학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쓸데없는 사변이나, 가능성도 희박한 희한한 공상에 몰두하는 것보다 더 정교하고 더 창의적인 실험에 매진하는 것, 이것이 서양 과학이 지금까지 발전해 온 제1 비결 아닌가? 물론 과학자들 대부분은 이런 길을 따랐다. 그런데 실험이라는 게 무작정 많이 죽어라고 측정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실험 이전에 좋은 가설을 세우는 것이 급선무다.

 

3. 매질에 관한 두 갈래 기로

 

이제부터의 설명은 주로 우리의 친구 아인슈타인이 맡는다. 그가 직접 쓴 『아인슈타인이 직접 쓴 물리 이야기(A. 아인슈타인과 L. 인펠트가 지었고 한울출판사에서 1990년에 번역 출간한 책이다)에서 그의 목소리를 발췌할 것이다. 나는 작년에 이 책을 속독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저 괜찮은 책이라는 인상 정도였다. 그런데 지난주에 이 책을 다시 한 번 정독해보니 겨우 그런 정도의 책이 아니었다. 책 표지에 출판사가 붙인 선전 문구대로, “걸출한 설명! 수학을 사용하지 않은 대가의 비범한 업적”이다. 이 책은 내가 읽은 어떤 상대성이론 해설서보다 뛰어나고 쉽고 깊고 풍부했다. 아인슈타인이 쓴 다른 책 『상대성 이론』(미래사)과 함께 다시 출간될 가치가 충분한 책. 언젠가 이 책을 리라이팅하고 싶은 욕망을 들끓게 한 책이다.

 

3-1 첫 번째 가정(갈릴레이 편에 서기)

 

“우리가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공기의 이동이 없는 닫힌 방 안에 앉아 있다고 생각해보자. 앉아서 소리를 낸다면, 이것은 물리적 관점에서 보면 공기 중에 음속으로 퍼져 나가는 음파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실험을 해보면 주어진 좌표계에서 바람이 불지 않고 공기가 평온하다면, 공기 중의 음속은 모든 방향에서 동일하다.”(『물리 이야기』 p.146).

 

만일 이 방이 어떤 커다란 공간 내에서 한쪽 방향으로 일정한 속도 하에 이동 중이라고 가정해보자. “외부의 어떤 사람이 운동하는 방의 닫혀 있는 창문에 달린 유리창을 통하여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고 있다.” 이 외부의 관찰자는 방의 속도를 알고 있으면, 방 내부에 있는 관찰자가 측정한 음속을 가지고 그 음파의 실제 속도를 알 수 있다(물론 여기서 실제 속도란, 상대적인 속도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외부 관찰자를 기준으로 한 속도. 즉 자신의 “좌표계(기준계)에 상대적인 음속을 알아낼 수 있”(p. 146)는 것이다. “방 안의 관찰자는 자신에게 음속은 모든 방향에서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외부의 관찰자는 자신의 기준계(좌표계)에서는 운동하는 방 안에서 퍼져 나가는 음속이 모든 방향에서 동일하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즉, 음속은 방의 운동 방향에서 표준 속도보다 크고, 그 반대 방향에서 더 작아진다고 주장한다…… 방은 음파를 전달하는 방 안의 매질을 운반한다. 따라서 음속은 외부의 관찰자와 내부의 관찰자에게 각각 달리 나타난다.”(p. 147) 말로 하니까 좀 복잡해 보이지만, 쉽게 예를 들면, 시속 150Km로 달리는 전철 안에서 전철이 달리는 방향으로 던지는 공과 반대 방향으로 던지는 공의 속도는, 전철 바깥에서 정지해 있는 관찰자에게 전혀 다르게 측정되지 않겠는가? 전철의 이동 방향으로 던지는 공은 300Km로, 반대 방향으로 던지는 공은 0Km로, 즉 정지된 것으로 관측된다. 물론 전철을 타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느 방향으로 던지든 구속은 150Km다. 공과 음파가 다른 것은 공은 입자고 음파는 파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파동의 속도가 이렇게 되려면 방은 이동하면서 동시에 방 안의 대기를, 즉 음파의 매질을 방 자체의 이동 속도와 같은 속도로 이동시켜야 한다. 그래야 방 밖의 관찰자의 입장에서 볼 때의 음속이, 음파 자체의 속도 플러스 방(즉 방 안의 매질)의 속도가 되는 것이다. 음파의 방향이 방의 이동 방향과 반대라면 음파 자체의 속도 마이너스 방(즉 방 안의 매질)의 속도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방은 음파를 전달하는 방 안의 매질을 운반한다. 따라서 음속은 외부의 관찰자와 내부의 관찰자에게 각각 달리 나타난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듣기 싫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재미있는 비결을 알려 준다.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는 방법 중의 한 가지는 말하는 사람의 주위 공기에 대해 상대적인 음속보다 더 빠른 속도로 말하는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다시 반복되지 않는 중요한 말을 듣지 못했을 경우 소리의 진행 방향으로 음속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가면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이 두 경우에 우리가 초당 약 333m 속도(즉 음속)로 달려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불합리한 점은 없다.” 지난주도 들었던 얘기지만 “실제 총에서 발사된 총알은 음속보다 훨씬 큰 속도를 가진다. 따라서 총알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총알이 발사되는 소리를 결코 듣지 못할 것이다.”(p. 147).

 

빛의 경우에는 어떨까? “방 안에 있는 관찰자는 이야기를 하는 대신(즉, 음파를 발하는 대신) 빛 신호나 광파를 모든 방향으로 내보낸다. 빛 신호를 내는 광원은 방 안에 영원히 놓여 있다고 가정하자. 소리가 공기를 통하여 전달되는 것처럼 광파는 에테르를 통하여 전달된다. 에테르도 공기처럼 방과 함께 운반될까? 우리가 에테르의 역학적 구조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의문에 대답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 “닫혀 있는 방의 운동이 그 속에 들어 있는 소리의 근원과 공기를 함께 운반하듯이 광원을 포함하고 있는 방이 에테르도 함께 운반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완전히 평온한 바다 속의 배가 매개인 바닷물을 운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항해하듯이 방은 에테르 속에서 운동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금 여러분은 이런 에테르 바다가 잘 상상이 안 될 것이다. 내가 아인슈타인보다 좀 더 좋은 예를 들어보겠다. 에테르는 겁나게 희박한 것이리라고 추정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실 것이다. 만일 에테르 바다가 그런 것이라면, 그토록 희박하고 성긴 바다라면, 이 세상 어떤 물질도 그것을 가두거나 담을 수 없다. 너무나 희박하기 때문에 무슨 초합금 강철이나 신비하기 그지없는 방수 재질로 만든 국자로도, 에테르를 푸거나 담을 수가 없다. 에테르에게 이 세상 만물은 한없이 성긴 그물이나 체에 불과하다.

 

에테르가 무지하게 희박하고 성기다는 점은, 운동하는 방이 에테르를, 방 안의 공기와 함께, 운반하는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그러하다. 두 가정의 차이는 그런 희박한 에테르 바다를 운동하는 방이 자기와 함께 옮기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만일 무한히 희박하지 않다면 방의 운동에 의해 에테르는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을 터이고, 무한히 희박하다면 방의 운동은 에테르 바다에 어떤 흔들림도 초래하지 못할 터이다. 바로 이 후자의 경우를 아인슈타인은 방이 에테르 바다를 통과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첫 번째 가정을 가지고 토론을 시작해보자. 에테르는 광원을 가진 방에 의해 운반된다고 가정하자…… [음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광파에서도 속도로 어떤 경우에는 더하고 어떤 경우에는 뺀다고 하는 간단한 역학적 변환 법칙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이런 간단한, 그러나 심오한 의미를 갖는 변환을 갈릴레이변환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이 순간 우리는 광원과 함께 운동하는 방이 에테르를 운반한다는 것과 고전 변환이 적용된다는 두 개의 가정을 도출할 수 있다[여기서 말하는 고전 변환도 역학적 변환, 갈릴레이변환과 같은 말이다].”(p. 149)

 

“방 안에 있는 광원에 스위치를 넣으면 광원으로부터 빛이 나오는데 이때 방 안에서 빛 신호의 속도는 잘 알려진 실험치인 초당 30만 Km이다. 그러나 외부의 관찰자는 광원이 방과 함께 운동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방 안의 에테르도 함께 운반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외부의 좌표계에서 광속은 방이 운동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 광속은 방의 운동 방향에서 표준 광속보다 더 크고 반대 방향에서 더 작다.””

 

당연하다. 전철 안에서 공을 던지고 구속(球速)을 외부의 관찰자가 측정할 경우, 공을 전철의 운행 방향으로 던질 때와 반대 방향으로 던질 때, 혹은 그 외 모든 방향으로 던질 때, 구속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데……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다. 비록 사고 실험에 의해서이긴 하지만(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은)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우리의 속도가 광속보다 더 크다면 우리는 빛 신호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과거에 내보내진 광파에 도달함으로써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목격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도 잘 아는 타임머신의 역설이 발생할 수 있다. 어떤 사회에 있어 이미 확정된 과거의 상황이나 사건들을 타임머신을 타고 가면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물리학만이 아니라 자연과학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인과성의 파괴!” 상황이 초래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결론들이 사실이라는 징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그 결론은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려는 모든 실험 결과와 모순된다. 광속이 어머어마하게 크기 때문에 생기는 기술적 어려움으로 인해 간접적인 실험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판단이 옳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광원의 운동 여부나 운동 형태에 관계없이 광속은 모든 좌표계에서 일정하다. 우리는 이 중요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게 해 준 많은 실험들에 대해 세세하게 기술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아인슈타인은 다양하고 정교한 실험들이 첫 번째 가정에 입각한 온갖 결론들을 산산이 박살냈다는 점, 나아가 설령 실험이 그것을 지지해 준다고 해도 논리적으로 그 가정은 지지될 수 없다고 말한다(p.150~151).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가 연구한 결과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광속은 광원의 운동과 무관하다. 운동하는 물체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에테르를 운반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리고 곧장 이렇게 나아간다.

 

3-2. 두 번째 가정(뉴턴 편에 서기)

 

“그러므로 우리는 음파와 광파가 유사하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두 번째 가능성으로, 즉 모든 물체는 에테르를 통과하여 운동하고[즉 모든 물체의 운동은 에테르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에테르는 어떤 형태로든 운동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생각을 돌려야 한다…… [이러한] 에테르 바다에 [대해] 정지해 있는 하나의 좌표계가 존재한다. 역학에 있어서는 서로 일정한 상대운동을 하는 좌표계 중에서 특별한 하나를 구별할 수 없다. 그런 좌표계들은 모두 동등하다. 서로에 대해 일정한 상대운동을 하는 두 좌표계 중에서 어느 것이 정지해 있고 어느 것이 운동하는가 하는 물음은 역학에서 의미가 없다. 단지 일정한 상대운동만이 관찰될 수 있을 뿐이다.”(p. 151) 이게 사실 내가 몇 주에 걸쳐서 지겨울 정도 반복해서 말했던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이며, 지구가 태양을 도는지, 태양이 지구를 도는지, 구분은 물리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바로 이어서 아인슈타인도 이렇게 말한다.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에서 볼 때 절대적으로 일정한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일정한 운동뿐만이 아니라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에 반하여] 절대적으로 일정한 운동이 존재한다고 할 경우,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간단하게 그것은 자연법칙이 다른 모든 좌표계와는 다르게 표현되는 하나의 표준 좌표계가 존재함을 의미한다.”(p. 151~152)

 

이렇게 되면 지구가 태양을 돌든지, 태양이 지구를 돌든지, 태양과 지구가 모두 양자의 질량 중심인 어떤 점을 중심으로 공전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어쨌거나 우주 내에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별이나 행성, 혹은 어떤 좌표점이 있어야 한다.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는 물론 파산이 나고, 뉴턴의 절대공간이 우뚝 선다, 마치 신의

대리자처럼.

 

“또한 그것은 모든 관찰자가 자신의 좌표계에서 적용되는 법칙과 표준 좌표계라고 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좌표계에서 적용되는 법칙을 비교함으로써 그의 좌표계가 운동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갈릴레이의 관성 법칙에 의해 절대적으로 일정한 운동이라는 것이 전혀 의미 없는, 고전역학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된다.”(p. 152)

 

“이제 두 가지 생각(에테르를 통과해버리는 운동,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을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테르 바다에 고정된, 특별한 하나의 좌표계가 존재한다면, ‘절대운동’ 또는 ‘절대정지’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이다.”(p. 152)

 

“그러므로 에테르의 바다라고 하는 구별된 하나의 좌표계에서만 광속은 모든 방향에서 동일하다. 에테르 바다에 상대적인 운동을 하는 다른 좌표계에서는 광속은 측정하는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p. 154)

 

4. 역사상 가장 유명한 부정 실험 “마이켈슨-몰리 실험”

 

자! 이제 그 유명한 마이켈슨-몰리 실험이 등장할 무대가 거의 차려졌다.

 

“에테르 바다를 통[과]하여 운동한다는 이론은 아주 엄격한 실험을 통해서만이 검증될 수 있다. 사실 [우리 주변의] 자연[세계]은 매우 빠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는 계에 놓여 있다. 지구가 태양 주의를 연주(年周) 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정이 정확하다면 지구의 운동 방향에서의 광속은 반대 방향에서의 광속과는 달라야 한다. 이 차이는 계산이 가능한데 이 계산을 검증하는 적당한 실험 방법이 고안되었다. 이론에서 추측컨대 시간 차이가 아주 미세하리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매우 기발한 실험 장치가 요구된다. 이 요구가 그 유명한 마이켈슨(Michelson)-몰리(Morley)의 실험으로 충족되었다. 실험 결과는 모든 물질은 에테르를 통[과]하여 운동하며, 물질의 운동이 에테르를 운반하지 않는다는 고요한 에테르 바다 이론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방향에 대한 광속의 관련성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른 모든 실험도 부정적인 결과를 보여 주었고 지구의 운동 방향과 광속과의 아무런 관련성도 보여 주지 못했다.”(p. 154)

 

마이켈슨-몰리 실험. 대체 이 실험은 어떤 것이었을까? 역사상 가장 유명한 “부정 실험”이라는 이 실험에 대해, 언제나 유쾌한 파인만 씨에게 간단명쾌하게 설명해 달라고 하자.

 

“1887년에 마이컬슨과 몰리는 우주 공간에 가득 차 있으면서 빛의 진행을 매개한다는 가상의 물질 ‘에테르(ether)’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일련의 실험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훌륭한 아이디어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실험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후에 아인슈타인은 마이켈슨과 몰리의 실험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 유명한 상대성이론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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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2 마이컬슨과 몰리가 했던 실험의 개념도

 

마이켈슨과 몰리가 사용한 실험 장치는…… 광원(A)과 은(銀)도금을 한 유리판(B), 그리고 두 개의 거울(C와 E)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모두 견고한 바닥에 놓여 있다. 그리고 두 개의 거울은 B로부터 같은 거리(L)만큼 떨어진 곳에 수직으로 세워져 있다. 광원(光源)을 출발한 빛은 B를 통과하면서 두 줄기로 분리되어 서로 수직한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거울에 반사되어 다시 B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 빛은 B를 통과하면서 두 개의 중첩된 빛 D와 F로 재결합된다. 이제, 빛이 A->B->E->B의 경로를 거치는 데 소요되는 시간과 A->B->C->B를 거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정확하게 똑같다면 D와 F의 위상이 일치하여 보강 간섭을 일으키게 되고, 그렇지 않다면 D와 F는 소멸 간섭을 일으킬 것이다.”

 

보강 간섭과 소멸 간섭 같은 조금 낯선 말들이 나오는 것 빼고는 딱히 어려울 내용이 없다. 보강이나 소멸이니 하는 것들에게 간섭을 당해서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니까 이어지는 문장을 마저 읽기로 하자(이너넷에서 검색해보시면 금세 아실 수 있다, 부디 그리 하시길……).

 

“만일 지구의 표면에 설치된 이 실험 장치가 우주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에테르 안에서 완전하게 정지해 있다면 보강 간섭이 일어날 것이며, 지구가 에테르 속을 헤치면서 속도 u로 움직이고 있다면, 두 빛이 도달할 때 시간의 차이가 발생하여 소멸 간섭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이게 뭔 소린가 하실 텐데, 방금 전 문장을 뺄 거 빼고 다시 늘어놓아 보기로 하겠다. 그러면 여러분 눈에도 뭔가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 실험 장치가 우주 공간…… 안에서 완전하게 정지해 있다면 보강 간섭이 일어날 것이며,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면…… 소멸 간섭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러니 만일 실험을 해서 보강 간섭이 일어나면 지구는 우주에서 정지해 있는 것이고 소멸 간섭이 일어난다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일단 이 대목에서 놀라야 한다. 왜냐하면 실험 결과에 따라서(전자의 경우) 지구가 우주에서 정지해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리는 없을 터이다. 그건 지동설이 틀리고 천동설이 맞는 것으로 판명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실험도 전자의 결과와 후자의 결과 중 어느 것이 맞느냐를 따지려 했던 게 아니라, 후자가 당근 맞아야 하는데, 그 정도가 어느 정도냐를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차이가, 글쎄 그 차이가 하나도 검출되지 않았던 것이다. 차이가 검출될 것은 분명한데, 그 차이의 정도만이 문제였던 실험에서, 차이 자체가 검출되지 않았으니……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당연히 더 정교하고 더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였다. 고도나 계절을 달리 해서 실험해보았고, 실험 장치의 각도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이동시켜보았다. 그러나 실험 결과는 요지부동이었다. 매번 실험 결과가 달랐다면 그나마 우리 인간의 추리력이나 실험 장치의 미천함이 원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험 결과는 매번 똑같았다. 그리고 그걸 해석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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