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대 과학

지동설 대 천동설 (4) – 2

- 박성관

(지동설 대 천동설 (4) – 1  /   http://suyunomo.jinbo.net/?p=12125 )

 

 

5. 선택할 길이 없다. 길이 발명되어야 한다.

 

다시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졌다. 두 가정이 시도되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첫째는 운동하는 물체가 에테르를 운반한다는 가정이다. 그런데 광속이 광원의 운동에 대해 독립적이라는 사실은 이 가정과 모순된다.” 이 가정은 갈릴레오의 상대성원리를 비롯한 우리의 모든 상식에 부합하지만, 실제 실험 결과와 모순된다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극복할 수 없었다.

 

“둘째로는 하나의 특별한 좌표계가 존재하고 운동하는 물체는 에테르를 운반하지 않으며 오히려 고요한 에테르 바다를 통과해버리면서 운동한다는 가정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광속은 모든 좌표계에서 같을 수가 없는데 이것 역시 실험에 의해 반박되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운동체들이 에테르를 운반하는 것도 아니지만 완전히 무사통과하는 것도 아니라고, 다시 말해서 운동체들은 에테르를 통과하되 아주 미미한 영향을 끼치면서 통과한다고. 그래서 운동체 주변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에테르에 비해 아주 미미한 진동이나 떨림, 혹은 밀도가 커지는 현상이 발생한다고. “즉 운동하는 물체는 부분적으로만 에테르를 운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 역시 모두 실패하였다. 에테르는 운반된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아니다 단지 부분적으로만 운반된다…… 등등의 가정 하에 운동하는 좌표계에서의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좌절되었다.”(p. 155)

 

“그리하여 과학사에서 가장 극적인 상황이 발생하였다. 에테르와 관련된 모든 가정은 설 땅을 잃었다. 실험에 의한 판결은 항상 부정적이었다. 과학의 발달사를 되돌아보면 에테르는 물리학적 물질들 중에서 가장 무책임한 존재였다…… 파동을 전달하는 능력을 가진 어떤 것으로 에테르는 착상되었는데[이것이 바로 맥스웰 방정식의 전자기장이다. 뉴턴의 원격작용을 물리친 그 장], 이것을 제외하고 살아남은 에테르의 성질은 아무것도 없다.”

 

특수상대이론을 설명하는 과학서적들을 보면 대개 마이켈슨-몰리 실험을 설명한 다음, 아인슈타인은 간단히 그러므로 에테르 개념에 집착하지 않고 대범하게 그런 에테르는 없다고 보았다고 써 있다. 그리고 특수상대성이론을 세워 에테르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처럼 써 놓았다. 예컨대 『1905 아인슈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 실험은 실패로, 더욱이 실패한 실험 가운데 물리학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실험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시간, 위치, 고도를 달리 해서 그 실험을 되풀이해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속력에 아무 차이도 없었던 것이다. 비록 마지못해서이긴 했지만, 과학자답게 물리학자들은 그 결과를 받아들였다.” 사실 『물리 이야기』에서 아인슈타인도 비슷한 말을 하기는 한다.

 

“우리는 말할 것이다. 공간은 파동을 전달하는 물리적 성질을 가진다, 라고. 그리고 우리는 에테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p. 155).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런 설명은 이해를 돕기는커녕 이해를 가로막는다. 과학자들이 에테르라는 단어나 개념을 버리지 않았던 것은, 그것에 집착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걸 버릴 방법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단순한 집착이라면 다른 과학자들은 모두 대범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에테르라는 단어에 집착했던 것일까?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정교한 실험가로 평가받는 마이켈슨은 왜 에테르에 의한 광속의 차이를 검출하려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던 것일까? 심지어 특수상대성이론이 등장(1905년)한 이후에도 무려 1925년까지 실험을 계속했던 것일까? 노벨상 위원회는 왜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 수여를 끝까지 꺼려했던 것일까? 여담이지만 사실 노벨상 위원회는 1921년의 노벨상이 아인슈타인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결정할 때, 수상 연설의 주제를 상대성이론으로 하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그런데 스웨덴 국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기 때문에 결국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주제로 연설했다고 한다. 게다가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수여할 거면 아울러 닐스 보어에게도 주어져야 한다는 조건이 또한 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노벨상 수상은 1921년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922년에 닐스 보어와 함께 수상하게 된다. 이는 당대의 과학자들이 상대성이론의 기괴함에 대해 흔쾌히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에테르가 없다고 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무리한 가정을 도입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인용했듯이 에테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서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사전에서 단어 하나를 제거하는 것은 물론 완전한 처방이 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엔 너무 심각한 상황이다.”

 

우선 에테르가 없다는 것은, 빛이나 전자기파의 매질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고, 그렇게 되면 다시 예전의 반(反)과학적인 뉴턴 식의 원격작용이 품으로 안겨야 한다는 말이다. 전기를 띤 어떤 입자가 조금의 시간도 걸리지 않고, 어떤 매개도 없이 멀리 떨어진 입자에 영향을 끼친다는 이론으로 말이다. 게다가 광속이 일정불변하다는 실험 결과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그럴 경우 지난주에 길게 예시했던 난문, 나와 자전거와 자동차와 광속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6. 새로운 길의 발명

 

지동설 대 천동설을 주제로 우리는 꽤나 긴 길을 걸어왔다. 실제 역사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이제 서둘러 아인슈타인이 새로 발명한 길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지난주에 내드린 난문(難問)의 답을 말하고, 서서히 마무리 지어야겠다.

 

아인슈타인은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는 옳다고 가정하였다(당연하다). 그리고 광속이 늘 동일하게 측정된 것을 아예 광속도불변의원리라고, 앞의 상대성원리와 동일하게 가정하였다. 이것이 우리도 보았던 1905년 논문의 도입부였다. 우리도 알다시피 문제는 광속이 일정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인데, 아인슈타인은 그걸 아예 원리라는 지위로 올려버린 것이다. 그러자 새로운 모순이 또 발생하는데 두 원리가 모순된다는 점이다. 요컨대 아인슈타인은 원리일 수 없는 것을 원리로 상정하고 그럼으로써 상대성원리와 모순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 모순은 단지 “겉보기에만” 모순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자신의 해결책을 도입하면 두 가정, 두 원리는 모순 없이 양립한다. 이제 당신도 알고 있는 특수상대성원리가 등장할 시간이다.

 

먼저, 상대적으로 일정한 운동 관계에 있는 두 물체가 있다. 이 경우 한 물체가 정지해 있다고 본다면(갈릴레이 상대성원리에 의하면 어느 쪽도 이렇게 설정할 수 있다), 다른 물체는 운동 중이다. 그리고 이렇게 운동하고 있는 쪽은 시간이 지연되고 공간이 축소된다. 더 놀라운 것은 운동 중인 물체로 상정된 그 물체를 기준으로 하면 정지되어 있다고 상정되었던 그 물체의 시간과 공간이 같은 방식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특수상대성원리에 대해 자세히 들어보신 적이 없는 독자라면 이것 가지고는 100% 이해가 안 될 터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을 테니, 오늘은 더 이상 나가지 말기로 하자. 어쨌거나 이렇게 설정하면 상대성원리는 여전히 성립하고 광속은 늘 일정할 수 있다. 지금까지 긴 글을 읽어 오셨으니, 이걸 바탕으로 다른 책들에 소개되어 있는 특수상대성원리를 읽어보시면 잘 이해가 되실 것이다(부디 그러시기를……). 그리고 특수상대성원리에 어느 정도 소양이 있는 분이시라면, 왜 아인슈타인이 그런 길을 발명해야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그토록 파워풀 했는지 좀 더 이해가 가셨을 것이다.

 

좋다!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지난주에 내어드렸던 난문은 어케 되는가? 나와 자전거와 광속으로 운행하는 자동차는 1시간 후에 각각 어디에 있게 되는가? 아니 상황을 간단하게 하기 위해 1초 뒤라고 하자(광속이 너무 크기 때문에 쉽게 실감할 수 있게 바꿔본 것이다). 또한 내가 정지해 있는 곳을 기준계(좌표계)로 삼기로 하자. 1초 뒤의 광속 자동차는, 광속이 늘 일정하므로 나로부터 30만 Km 멀어져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문제는 자전거다. 이 자전거 역시 자동차와 같은 방향으로 달렸다고 상정하자(다르게 상정해도 해결하는 원리는 마찬가지지만). 이 자전거의 초속은 1Km라고 하자(이렇게 빠른 자전거가……?! 그냥 있다고 하자. 어차피 우린 광속으로 달리는 자동차가 있다고 서로 양해한 사이 아닌가!). 그럼 1초 후에 이 자전거는 나로부터 1Km 떨어져 있을 터이다. 자! 그럼 이 자전거와 광속 자동차의 거리는 1초 후에 얼마나 떨어져 있겠는가? 상식적으로는 당근 299,999Km다. 실제 답도 이렇다.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똑같다. 이상하다, 뭐가 달라진 거지?

 

우리의 문제는 이것이었다. 내가 광속 자동차의 속도를 측정해도 초속 30만 Km이지만, 달리는 자전거가 측정해도 초속 30만 Km라는 것이었다. 맞다, 맞아. 바로 그게 문제였어.

 

당신: 거, 이상하지 않소? 말한 것처럼 1초 후 자전거와 광속 자동차의 거리가 299,999Km라면, 자전거가 볼 때 자동차의 속도는 초속 299,999Km가 되는 거 아니오?

 

아인슈타인: 그 자전거가 측정한 자동차의 속도 역시 초속 30만 Km입니다.

 

당신: (짜증질을 내며) 아니 그럼 자전거와 자동차의 거리가 1초 후에 30만 Km가 되어야 하잖소. 그런데 실제로는 29만 Km가 되었지 않소? 초속이라는 게 뭐요! 1초가 흐르는 동안 이동한 거리를 말하는 거 아니오? 그렇다면 자전거가 측정한 자동차의 속도는 30만 Km가 아니라, 초속 29만 Km 아닌가.,,,,, 이 사람아! 이상한 말을 할 때 하더라도 분수껏 해야지.

 

아인슈타인: (빙그레 웃으면서) 자전거는 나에 대해 상대적으로 운동을 하였습니다. 물론 광속 자동차도 나에 대해 그리고, 자전거에 대해서도 일정한 운동을 했지요(그리고 이 두 가지 일정한 운동의 속도는 당연히 차이가 나겠지요). 저는, 정지해 있는 물체에 대해 상대적으로 운동하는 물체는, 정지해 있는 물체보다 시간은 지연되고 공간은 줄어든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창안한 새로운 길, 특수상대성이론이지요.

 

당신: ?%&$

 

아인슈타인: 그럴 경우, 광속 자동차는 자전거보다 시간이 지연되고 거리가 줄어듭니다. 그러므로 정지해 있는 사람의 시계 기준으로 1초 후에, 자전거와 자동차의 거리가 299,999Km일지라도 자전거는 자동차가 초속 300,000Km로 달렸다고 측정할 겁니다.

 

당신: 그러나 1초 후의 거리는 여전히 299,999Km 아니오?

 

아인슈타인: 그 1초는 정지해 있는 사람의 시계에서 볼 때의 1초입니다. 자전거에 달린 시계로는 아직 1초가 조금, 아주 조금 못 되었을 겁니다. 나를 기준으로 볼 때 자전거는 이동을 하고 있으니 시간이 조금, 아주 조금 느리게 갑니다. 따라서 정지해 있는 사람이 1초 뒤에 사진을 찍어서 자전거와 자동차의 거리가 299,999Km임을 주장한다면, 자전거에 탄 사람은 그건 1초 직전에 찍힌 사진이라고 할 겁니다. 그리고 그 시점으로부터 아주 조금 시간이 더 흐른 뒤에 찍은 사진을 들이대며 “이 보쇼, 나랑 자동차의 1초 후 거리가 정확히 30만 Km 아니오?” 할 겁니다. 그러나 정지해 있는 내 입장에서 볼 때, 자전거 탄 사람이 사진을 찍은 시간은 1초보다 아주 약간이나마 시간이 더 흐른 뒤의 시점입니다.

 

당신: ?*%^)))

 

아인슈타인: 달리 말해볼까요? 나와 자전거 탄 사람과 광속 자동차 탄 사람이, 우리의 난문을 해결하기 위해 1초 뒤에 일제히 사진을 찍었다고 합시다. 자기를 포함한 세 존재 모두를 말이죠. 물론 서로 간의 실제 거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죠. 자! 그럼 1초 후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 상황을 울트라 초 슈퍼 극도의 슬로우 비디오로 찍는다면 이렇게 될 겁니다. 1초 후에 내가 사진을 찍으면서, 그와 동시에 자전거와 자동차 탑승자 두 사람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야! 너희들 왜 아직 셔터를 누르지 않는 거야? 그랬더니 자전거 탑승자는 그 직후에 셔터를 누르면서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넌 왜 아직 1초도 안 되었는데 사진을 찍는 거야. 그리고 광속 자동차에 타고 있는 너, 넌 왜 아직 사진 안 찍어! 마지막으로 자동차 탑승자는 뭐라고 할까요? 당연히 이렇게 말하죠. 너희들 왜 아직 약속한 시간도 안 됐는데 사진들을 찍고 난리야! 하고는 바로 직후에 사진을 찍을 겁니다.

 

이런 차이가 왜 그럼 지금까지 검출되지 않았던 걸까요? 우리가 그동안 이 차이를 감지하지 못했던 것은 일상적으로 경험한 물체의 속도가 광속에 비해서 턱없이 느렸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모든 경험이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한 차이를 발생시키지만, 그것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제 말씀을 듣고 난 후에도 아직 충분히 공감은 안 되시죠?

 

지금까지 얘기에서 알 수 있듯이,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운동 상태가 다른 관측자마다 시간과 공간이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왕왕 아인슈타인이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하나의 시간을, 무수한 주관적 시간“들”로 무한 증식시켰다고 이해되기도 한다. 이런 이해는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운동 상태에 따라서 시간과 공간이 다른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운동 상태가 주어지면 그 운동 상태에서는 반드시 한 가지의 시-공간만 경험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절대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떤 한 가지 기준에만 맞추어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자유로운 삶이 못 될 것이다. 그러나 무수한 삶의 방식이 있으되 어떤 상태에서는 그 상태에 해당하는 방식만을 취해야 한다면, 어떨까? 크게 자유롭지 못할 것은 분명하며, 사실 어떤 면에서는 결국 한 가지 방식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수도 있으리라.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은 비록 무한할 수 있지만, 어떤 특정한 운동 상태에서는 특정한 하나의 시공간밖에 없다. 나와 일정한 어떤 속도 관계에 있는 대상은, 한 가지 시공간밖에 가질 수가 없다. 적어도 나와의 관계에서는……

 

7. 그럼 지동설 대 천동설은?

 

지동설과 천동설에 대해 나름 새로운 얘기를 하는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특수상대성이론을 설명하는 글이 되고 말았다. 물론 상대성이론에 대해서 충분히 말했다고는 결코 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 대목에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해보자.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지동설 대 천동설 논쟁에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가? 무척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다. 앞서도 계속 얘기했던 대로, 또 아인슈타인이 반복해서 얘기했던 대로 “‘광 매질’에 대해 상대적인 지구의 운동을 발견하려는 시도들이 실패”했던 것을 상기하자.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1905년 논문 도입부에서 예언조로 말했던 것을 상기하자. “‘빛 에테르’의 도입은 불필요하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전개될 견해는 특별한 성질을 가진 ‘절대적으로 정지한 공간’을 도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분은 이렇게 질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설령 아인슈타인의 말이 맞다고 할지라도, 그건 상대적으로 일정한 운동을 하는 두 물체들 간의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실제로 가속운동을 하고 있는 지구와 태양 같은 경우에는 적용될 수 없는 것 아닌가? (참고로 물리학에서 말하는 가속운동은, 실제로 속도가 가속되거나 감속되는 경우만이 아니라, 속도가 같아도 방향이 달라지는 것까지 포함한다). 바로 그렇다. 그런 의문을 품어야 마땅하다. 그럴 때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왜 “특수”한 상대성이론에 만족할 수 없었는지, 다시 말해서 그 어떤 종류의 운동을 하는 물체 간에도 모조리 성립하는 상대성원리를 개발하려고 했는지, 왜 특수상대성원리를 온전히 일반화 해서 일반상대성이론을 구축하려 했는지, 그 마음을 열렬하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아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인슈타인이 직접 말하게 하자. 그의 『물리 이야기』의 3장 중 10절 「일반 상대성 이론」과 11절 「엘리베이터의 내부와 외부」에서 한 말이다.“우리는 등속운동 하는 좌표계뿐만 아니라 서로 상대적으로 임의적인 운동을 하는 좌표계를 포함하는 모든 좌표계에 대해 타당하도록 모든 물리법칙을 정식화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우리의 어려움은 해결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좌표계에 대해서도 모든 물리법칙을 적용할 수 있게 된다. 프톨레마이우스의 관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관점까지 이어지는 과학의 초기 시대에 격렬히 일어난 논쟁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 그래서 양쪽의 좌표계가 모두 동등한 타당성을 지니고 사용될 수 있게 될 것이다. “태양은 정지해 있고 지구가 움직인다”와 “태양은 움직이고 지구가 정지해 있다”라는 두 말은 서로 다른 좌표계에 의해 운동을 묘사하려는 두 개의 방법으로서 단지 관례적인 문제일 뿐이다. 절대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운동이 상대적인, 그리하여 운동 상태에 관계없이 모든 좌표계에서 적용될 수 있는 정말로 상대론적인 물리학을 구축해 낼 수 있을까? 실제로 이것은 가능하다! (…) 모든 관성계에 적용될 수 있는 물리법칙을 형성하는 문제는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해 해결되었다.”(p. 188~189). “절대운동과 관성 좌표계라는 유령은 이제 물리학에서 사라질 수 있게 되었고 새로운 상대론적 물리학이 형성되었다.”(p.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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