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7호] 편집자의 말 – 아이가 되기 위한 인문학

- 기픈옹달(수유너머 R)

편집자의 말 – 아이가 되기 위한 인문학

3년 전 즈음, 어느 어린이 독서캠프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철학 강연을 해달라는 거였는데요. 제목이 ‘철학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아마도 세상의 여러 물음 중에 제일 무서운 게 ‘…란 무엇인가’ 아닌가 싶어요. 요즘 제 딸이 글자, 특히 받침 없는 글자를 조금씩 읽는데요. 어제는 책상에 있던 플라톤의 <정치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보더니, 두 글자가 똑같다고 ‘정치’를 가리킵니다. 아직 읽지는 못하고요. 어떻게 읽는 거냐고 해서 ‘정치’라고 소리 내 읽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정치가 뭔데?’라고 묻습니다. 숨이 탁! 막히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질문하는 사람이 제일 밉습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습니다만, 이런 질문의 무시무시함을 알면서도 어린이 독서캠프의 강연요청을 덜컥 수락한 것은 그 망할 놈의 로망 때문이었습니다. 영화 속 장면이었는데요. 쇼펜하우어를 좋아하는 어느 철학자와 똘똘한 꼬마 여자 아이가 이러저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던 모습, 그렇게 부럽더라고요. ‘나도 나이가 들면 꼬마들이랑 철학 공부하면 좋겠다.’ 강연 청탁 전화를 받자마자 주책없이 이 현실 모르는 로망이 깨어난 것이죠.

강연 원고를 준비하면서 대단한 고생을 했어요. 초등학생들에게 ‘철학’이라는 두 글자를 어떻게 설명해야하는지 막연했죠. 강연 장소에 가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제 로망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여기서 안드로메다 쯤 되는 것 같더군요. 제가 도착하자마자 안내하는 선생님은 2-30분에 한 번씩은 꼭 쉬어달라고 했죠. 아이들이 몸을 비틀고 난리를 칠거라고. 최소한 5-10분 사이에는 재밌는 이야기가 들어가야 한다고도 했고요.

사실 아이들을 자리에 앉히는 것도 쉽지가 않았어요.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뭔가 그럴듯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려 안간힘을 쓰는데,  한 아이가 ‘난 장군이 좋아요’라고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고, 그러면 다른 아이가 ‘니가 무슨 장군이야 넌 꼬붕이나 해라’고 웃고 떠듭니다. 게다가 다른 쪽에서는 종이 한 장을 잡고 앞뒤 아이들 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지고… 그래도 거긴 책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이 참석해서 분위기가 좋은 편이었습니다. 뭔가 그럴 듯한 질문도 나왔고 제가 떠날 때는 음료수를 안겨주는 아이도 있었거든요.

이번호 <위클리 수유너머>에 소개된 ‘파랑새 공부방’을 처음 방문했을 때는 정말 대단했죠. 그 작은 방에서 누군가는 싸우고,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큰 소리를 지르고. 선생님들은 뒤에서 아이들 앉히기 바쁘고. 공부가 한마디로 전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이들이 인문학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수유너머에서 진행하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인문학’ 프로그램 중에는 아이들에게 동서양고전과 현대시를 무작정 암송시키는 게 있습니다. 근데 아이들은 그 들어본 적도 없는 낱말과 구절들을 신기하게 잘도 욉니다. 집단으로 소리 내서 외우는 게 노래처럼 재밌어서인지, 얼른 외우고 놀려고 그러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요. 저 난해한 낱말과 구절들, 단지 혀의 근육 어디엔가, 뇌의 신경 어디엔가 맥락 없이 들어갈 저 것들에 우리가 어떤 기대를 걸어도 좋을까요?

이번호 제게 큰 감동과 가르침을 준 <전선인터뷰>의 주인공 성태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언젠가 아이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세우고 자기 이야기를 만들고 싶을 때 그때 아이들에게는 자기 낱말들이 필요해요.” 성선생님이 생각을 전하는 수단으로 ‘낱말들’을 말씀하신 건 아닌 것 같아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낱말’은 생각이 자라나는 ‘토양’이랄까 ‘바탕’ 같은 것이죠. 땅에 마디마디 심는 고구마순처럼, 우리 몸과 맘속에 던져진 낱말들에서 생각들이 자라나는 것 같아요. 살다가 어떤 일을 겪을 때 있죠, 그때의 외부 충격이 우리 내면의 낱말들로 하여금 생각의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고 덩굴을 이루게 하는 거겠죠.

이번 <위클리 수유너머> 특집을 준비하며 ‘아이들을 위한 인문학’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인데요. 우선은 ‘아이들을 위한 인문학’은 장사꾼에게나 어울리는 모토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인문학은 아이들을 위한 맞춤 상품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이들과 만나는 곳에 필요한 인문학’이죠. 다시 말해 인문학은 만남의 공통 장소일 뿐입니다. 아이와 아이, 아이와 어른이 만날 때, 인문학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를 고민해야겠습니다. <보리학교>의 시성씨가 지적한 것처럼 “내가 아는 걸로 아이들 생각을 해석하려 하면 아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봐야 아이들이 보입니다.” 내가 나인 채로는 아이들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때 인문학은 만남의 공통의 장소가 아닙니다.

‘아이들을 위한 인문학’이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인문학이 ‘아이들을 어른으로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나를 내려놓은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의 성장을 지켜보며 같이 버텨낼 뿐”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인문학’은 ‘어른들을 위한 인문학’이라고 하겠습니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극도로 축소된 어른들에게 자신의 ‘아이’를 되돌려주는 것 말입니다. 맑스는 어른이 아이 흉내를 내는 것은 유치한 짓이지만 어른의 과제는 “높은 차원에서 아이의 진실을 재생산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아이의 천진난만함, 아이가 가진 잠재성, “나는 아직도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낱말을 배우는 어린아이가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이번 주에도 아이들은 공자를 읽고 현대시를 암송합니다. 아이들이 그걸 아느냐고요? 그러는 당신은 그걸 압니까? 단지 우리 모두가 그 자리에서 함께 읽고 이야기할 뿐입니다.

참, 이번호에 새로운 코너가 생겼습니다. 메뉴판을 잘 보세요.  네 ‘여강만필’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여강’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은 수유너머 김융희 선생님의 호입니다. 삶의 먼 길을 걸어오셨으면서도 여전히 배움을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는 분입니다. 연천에서 직접 기른 상추며 깻잎이며 고추며, 몰래 슬쩍 두고 가시는 분이라 수유너머에서는 ‘우렁각시’로 통합니다. 선생님의 상추, 깻잎, 고추는 수유너머에 와야 드실 수 있지만, 여강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위클리수유너머>에서 만날 수 있답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 고병권(수유너머R)

응답 1개

  1. […] 좀 더 들어오려는지. 아이들의 인문학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병권이 형의 아이가 되기 위한 인문학이나 시성씨의 글을 읽어보는 것이 더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