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울음이 타는 강, 낙동강 순례를 다녀와서

- 기픈옹달(수유너머 R)

강이 더 망가지기 전에 한번 다녀와요

그동안 파괴와 살육에 시달리는 강의 비명소리를 진즉부터 듣고 있었음에도 선뜻 현장을 향해 걸음을 내딛지 못했던 건 사소한 일상을 핑계로 한 ‘귀차니즘’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따라서 휴일 아침의 이른 새벽, 단잠을 포기하고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는 게 당연하다 싶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침대로 돌아가고픈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강을 향하며 ‘강이 더 망가지기 전에..’라는 문구를 주문처럼 되뇌었다.

내가 낙동강을 처음 밟았던 건 5년 전 이 맘 때이다. 우연히 들린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뒷 켠에서 찾게 된 낙동강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이라는 김소월의 시구가 단순히 머릿속에서 그려낸 묘사가 아니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왜 학창시절 한국지리 교과서에서는 강의 사구에 대해 설명하며 이것들이 이렇게나 처연하고 아름다운지를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걸까. 이렇게 내가 처음 만난 강은 선인들이 이야기하던 자연과의 물아일체가 어떤 의미였는지 그 뜻을 절실히 깨달을 정도로 감동적이고도 슬픈 장소였다. 이후 일상의 험한 일에 지칠 때면 무엇보다 먼저 강을 찾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강을 찾기만 하면 이상하게도 쉬이 흐르는 강물에 상념을 떠내려 보낼 수 있었으니 강은 내게 있어 일종의 치유제였던 셈이다.

이렇게 추억을 더듬으며 낙동강으로 향하고 있자니 여러 기억들을 품고 있는 강이 얼마나 망가져있을지를 상상하는 일이란 단순히 무거운 몸을 뛰어넘는 괴로운 과정일 수 있겠다는 망설임이 찾아왔다. 한때, 지금은 헤어진 연인과 함께 걷던 골목길이 어느 순간 불도저로 파헤쳐져 있음을 보게 되었을 때 느끼는 서러움과 비슷한 감정이다. 어쩌면 강을 향한 걸음을 미뤄왔던 이유라 내세우고 있던 일상의 피로함은 그저 둘러대기 좋은 핑계였을 수도 있다. ‘사라지는 것들은 목도한다는 것’, 그 잔인한 애상의 감정이 선사할 마음의 피로함과 내 작은 발걸음이 사라져가는 그것을 과연 지켜낼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에 시작부터 마음이 여러모로 착잡해졌다.

눈물과 분노의 현장

얼마쯤 달렸을까. 이윽고 버스가 도착한 곳은 낙동강 강창교 부근이다. 구불구불 흐르는 강과 빛나는 모래톱에 감탄했던 건 잠시 포크레인으로 파헤쳐진 모래와 강창교 언저리에 고여있던 탁한 색깔의 작은 웅덩이가 눈에 띄었다. 어떻다는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부쩍 감성이 메마르고 있다는 위기의식으로 절절한 낭만주의 시구를 읽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파헤쳐진 강 언저리를 보자마자 단 몇 초 만에 고였던 것이다.

이어 목도한 상주보 공사현장은 강창교를 바라보며 한껏 유약해진 감성에 분노의 불을 지폈다. 언제고 당연히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곳이 사라져있었고 그 자리에는 도심 아파트 공사현장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토목장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진기를 들이밀고 있자니 안전모를 쓴 공사관계자가 넌지시 말을 건넨다. “아가씨. 거기 뱀 나오는 데야. 얼른 비켜. 뱀 나와!”

그 순진한 위협에 헛웃음이 터졌지만 입 안은 씁쓸해졌다. 공사를 주도하는 현 정권이라는 게 이런 식이다. 다시 말해 ‘죽은(?)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 ‘다가올(?)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출처 불명의 ‘물 부족 국가’라는 주장을 통해 우릴 겁박하며 4대강 사업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한다. 도래하지 않은 위험을 이용한 위협으로 자신의 이권을 위한 사업을 너무 쉽게 합리화해 버린다. 그러나 그 가공의 위협이라는 것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광경을 직접 보고 있는 누구에게 들이댔을 때 힘을 잃는다. ‘뱀 나오니 강가에 가지 말라’는 것처럼 ‘실소’가 나왔지만, 저들은 스스로 그 순진한 위협을 만들어냈다. 스스로 창조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다른 모든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강을 위해서는 누가 울어줄 것인가


상주보 현장을 떠나 일행은 자전거로는 전혀 오르지 못할 것 같은 자전거도로를 걸으며 청룡사 전망대로 향했다. 저 멀리 보이는 낙동강의 모래톱, 그 한가운데 오리섬이 있다. 오리섬은 한때 버드나무 숲이 울창했던 곳으로, 수십 마리의 노루와 수많은 철새가 오가던 생태의 보고였던 곳이다. 이곳을 밀어내고, ‘동물원’과 같은 생태 공원을 조성하려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대한민국 행정을 책임지고 있다는 고위 관료가 한 말이 떠올랐다. 4대강을 ‘어항’으로 만들겠다는 그 솔직한 속내가.

4대강 사업으로 이미 파괴되거나 파괴될 것으로 예상되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있다. 이대로라면 멸종의 길을 걷게 될 단양쑥부쟁이 군락이나 떼죽음당한 수천마리의 물고기를 흙으로 덮어 은폐하려는 시도는 이미 언론으로 보도된 바 있다. 정권은 “공사 기간 중에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 따르겠지만, 인공적인 생태 공원이 조성되면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때 자리 잡게 될 생명들로 지금 살육당하는 생명들을 위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논리일까. 쉬이 납득할 수 없지만, 그래,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사라진 강과 사라질 기억들은 누가 어떻게 복원해줄까. 울어 주기는 할까?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보것네.

– (울음이 타는 가을 江 / 박재삼)

흔히, 생명이 없는 것들은 생명이 있는 것들에 그 우선순위를 빼앗겨 먼저 희생되는게 당연하다고 여겨지곤 한다. 또한 생명들 간에 있어서도, 우리가 인간이라는 한계로, ‘사람이 먼저다’라는 논리를 ‘생명에는 우선순위가 없다’라는 논리보다 앞세우곤 한다. 인지할 수 없는, 우리가 아닌 것들의 아픔과, 파괴되는 우리의 감성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 쉽게 ‘별 것 아닌 일’ 이라며 망각해버린다. 그래야 좀 더 나은 삶이 도래한다고, 내가 그리고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란 게 필요하다고 주입받으며 살아왔던 탓일 수도 있다.

상처받은 마음을 안고 찾았던 기억 속의 강, 그때의 나를 대신해 하염없이 울어주던 바로 그 강 때문에, 이제는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 기가 막힌 살육을 그만해달라고, 그 아스라했던 흔적들을 지우지 말아달라고, 눈물로 외치고 돌아오는 길, 노을로 붉게 물든 낙동강에는 울음이 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었을 강, 내게는 감성의 회복제이자 치유제였던 강, 그 강이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 김은영(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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