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재난의 사유, 재난의 글쓰기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재난의 사유, 재난의 글쓰기

5월 2일, <수유너머N>과 그 주변의 친구들, 그리고 홍대 앞 생명 평화모임 회원들과 함께 정부의 대대적인 구호활동으로 살아나고 있다는 낙동강엘 다녀왔다. 파우스트가 보았다면 감동의 대사를 던졌을 놀라운 기적의 현장, 그러나 아직은 시작에 불과한 기적의 공사장이었다. 넓고 조용하던 강 위엔 수많은 포크레인이 떠있고, 나뭇잎 한 장의 도움도 없이 묵직한 덤프트럭들이 줄지어 강을 건넌다. “인간이 손대지 않은 자연은 ‘자연’이 아니다”라는 놀라운 철학적 명제가, “건설업자가 손을 대지 않은 생태계는 생태계가 아니다”라는 기묘한 경제학적 명제로 구현되고 있었다. 이미 벌려놓은 공사를 되돌리는 것은 국가적 낭비라는 지혜로운 판사님들 판결을 따라, 재판이 벌어지기 전에 되돌릴 수 없을 정도까지 공사를 밀고나가야 한다는 법적 사유가, 북한의 ‘속도전’이나 ‘천리마 운동’을 우습게 만드는 미친 속도로 가열 찬 공사를 진행시키고 있다. 단테의 말처럼 “모든 소심함은 여기서 죽는다.” 아니, 이렇게 바꿔 말해야 한다: “모든 신중함은 여기서 죽는다.”

물론 이렇게 하다보면 오류도 있을 수 있을 것이고, 이렇게 해 놓으면 난감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써 만든 댐들을 부수고 간척지를 되돌리는 선진국들의 많은 사례들이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지 않은가?: “문제가 있으면 그 때 가서 철거하면 되잖아.” ‘나는 공사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건설공화국의 철학적 주체는 이런 사태를 미리 예견하고 있을 것이다. “좋잖아! 공사하면서 돈 벌고, 나중에 문제 생기면 그거 철거하고 복원하며 돈 벌고.” 이런 점에서 그들은 철학적이기 이전에 이미 경제학적이다. 그냥 두면 아무런 ‘가치’를 갖지 않는 자연이지만, 개발하고(파괴하고!) 복원하면 경제를 돌리며 이중으로 GNP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정치적 사유 또한 동반하고 있다. “그래야 건설경기에 기대어 버텨온 이 나라 경제도 돌아가고(‘서브프라임 터지는 거 못 봤어? 버블이 터지면 어떤 꼴 나는지?’), 그 돌아가는 경제 덕에 정치도 잘 돌아갈 거야.” 뿐만 아니라, 실패를 극복하여 멋지게 복원하는 것은 문학적이기도 하다. 이미 일부 복원된 한강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역시 그랬군”, 혹은 “역시 되돌리길 잘했어”라는 반전과 복원의 감동 또한 주지 않는가!

그런데 이번에 낙동강 공사장을 답사하며 더욱 놀랐던 건, 공사 이상으로 공사하는 사람들이 내걸어놓은 언어들이었다. 보를 만들기 위해 마련한 현대건설의 베이스 캠프에는,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생명은 자연으로부터” 어쩌고 하는 플래카드가 전면에 걸려 있었다. 생명과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공사를 하는 것이란 말일 게다. 상주보를 만들려고 강 한가운데 일렬로 철근을 박아 세운 쇠기둥들에는 “4대강 살리기는 생명 살리기입니다.”, “낙동강이 살고, 사람이 살고, 지역경제가 살아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멀쩡한 사람 배를 갈라 칼들을 쑤셔놓고는 그것이 사람을 살리기 위한 수술이라고, 지금 와서 수술을 중단하라는 건 사람을 죽이라는 걸 뜻한다고 우기는 돌팔이 의사의 책임감 같은 것일까? 거기서 조금 떨어진 쇠기둥 벽에는 또 “우리가 꿈꾸는 강의 이름은 ‘행복’입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그래, 행복이겠지. 공사하는 회사의 행복, 거기서 일하는 사람의 행복, 그걸로 경제를 돌리려는 사람들의 행복. 다만 그 공사장 울타리에 걸어 놓은, 공사장 바깥에서 다가하는 사람들 보라고 걸어놓은 “접근금지”라는 경고문이, 그들이 꿈꾸는 ‘행복’이란 글자와 어울려 기묘한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또 그 옆에 붙여놓은 “추락주의”라는 또 다른 경고문은, 생명, 행복 등에 눈이 팔려 있는 우리에게 정신차리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또한 기묘했다. 그 옆에 세워놓은 공사안내판에도 멋진 말들이 가득했다. “낙동강 천년의 미래를 여는 풍요와 오복의 대표 랜드마크”, “유토피아를 꿈꾸는 다기능 보의 다섯 가지 기능.” 저 멀리 보이는, 강의 흙이 자연히 만들어놓은 섬은, 생태공원을 만들겠다고 쌓아놓은 모래로 새하얗고, 그 사막 같은 모래 속에 반쯤 묻혀 간신히 서있는 버드나무 하나가 인상적이다.

생태계를 파괴하여 만들어내는 ‘생태’ 공원, 거대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생명 살리기’, 포크레인으로 후벼 파고 철근들을 줄줄이 쑤셔 박곤 콘크리트로 처바르는 ‘자연’, 그리고 미시령 고갯길처럼 브레이크 파열시 쓰는 모래무지까지 만들어 놓은, 철인경기 아니곤 결코 자전거로 올라갈 수 없을 자전거 길 등등. 개발주의적 발상에 반대하기 위해 사용되던 말들을 그들은 이런 식으로 포획하여 어이없는 방식으로 되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다다이스트를 능가하는 시적인 반어를 실험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언어를 둘러싼 ‘계급투쟁’을 실행하고 있는 것일까? 어쨌건 이런 식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언어를 찾아낸 듯하고, 우리가 항상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말들은 무의미한 것이 되거나 무효화되고 만 것 같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이제 생명이니 생태니, 자연이니 하는 말들이 그들의 귀에 들리고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인 것 같다. 반대로 ‘접근금지’나 ‘추락주의’ 같은 말들이 사태의 진실을 알려주고 사람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오늘, 뒤늦게 멕시코만을 가득 메우는 원유 유출의 재앙에 대해 들었다. 대서양으로 확산되어가는 거대한 기름의 넓이는, 지구 전체의 하늘로 확산되어가는 오염된 대기에 비하면 결코 넓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후자와 달리 인간의 생존조건을, 아니 강대국 인간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잠식하고 파괴하기에 쉽게 눈에 보인다는 점에서, 오직 개발과 돈만을 볼 뿐인 자본가와 정치인, 둔감한 관료들까지 강하게 긴장하게 하고 있는 것 같다. 돈과 권력으로 눈을 가린 그들의 시야에, 그들이 지구를 휘저으며 준비하고 있는 끔찍한 미래가 보일 수 있는 것은 이제 거대한 재난 말고는 없게 된 것 같다. 인간의 삶을 덮쳐오는 직접적 재난 말고는 어떤 것도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없고, 어떤 것도 그들을 되돌아보게 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재난이나 재앙이야말로 저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끔찍한 미래를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 된 것 같다.

그렇다면 긍정적 희망을 내세우기에 거꾸로 쉽사리 포획되어 그들의 것이 되어버리는 ‘대안’의 사고를 이제는 멈추어야 하게 된 건 아닐까 싶다. 생명, 생태, 살리기 등과 같은 것의 소중함을 상기시키고 일깨우는 것으로는 전지구를 장악하고 착취하고 있는 저들 트리오의 만행을 중지시킬 수 없게 된 것이 분명하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이제 우리는 대안을 보여주는 긍정적 사유를, 재난을 긍정하는 역설적 사유로 바꾸어야 하게 된 건 아닐까?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절망적인 세상에서 가능한 미래를 꿈꾸는 희망의 언어가 아니라, 절망적 상황을 절망으로서 받아들이는 절망의 언어가 아닐까? 거대한 재난을 통해, 그 절망적 재난 속에 담긴 역설을 통해, 저들의 발 빠른 반어를 깨부수는 ‘재난의 글쓰기’가 필요하게 된 게 아닐까? 니힐리즘에 빠지지 않으면서 재난을 사유할 수 있는, 재난의 긍정적 힘을 사유할 수 있는 ‘재난의 사유’가 필요하게 된 게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건설 자체가 재해가 되어버린 지금 시대에, “건설재해를 반으로 줄이”는 방법을 제대로 생각하게 해 줄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거대한 재난들이 빈발하기 시작한 지금의 지구 위에서, 혹은 이미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거대한 멸종의 시대에, 생명의 문제, 인간의 문제를 근본에서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전환의 사유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 이진경 (수유너머 N)

응답 5개

  1. 미카딤말하길

    하면 안 되는 것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해야 하는 것을 말해야 하는 책임이 뒤따르는 것 아닐까요? 삽질의 대체는 무엇일까요..

  2. 선완규말하길

    “니힐리즘에 빠지지 않으면서 재난을 사유할 수 있는, 재난의 긍정적 힘을 사유할 수 있는 ‘재난의 사유’가 필요하게 된 게 아닐까?”
    재난의 사유! 이것으로 생명, 인간을 다시 생각하는 생각의 흐름이라는 문제의식을 배웠습니다.
    감사^^

  3. 재난말하길

    이해관계의 다양함, 관점의 다양함이 삽질의 이유가 되는 시대엔
    그 삽질한 땅에 덮쳐올 거대한 재난이야말로,
    건설재해를 반으로 줄이자는 어설픈 안전의 구호를 휩쓰는 처참한 재앙이야말로
    끝도 없이 확대되는 이 미친 멸망의 선을 중단시킬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올해엔 장마가 좀 일찍오길, 홍수같은 비가 퍼부어주길, 저 삽질한 땅을 휩쓰는
    거대한 태풍이 밀어닥치길 기원합시다.

  4. 달타냥말하길

    재난을 긍정하는 역설적 사유 = 절망적 상황을 절망으로서 받아들이는 절망의 언어, 절망적 재난속에 담긴 역설을 통해 저들의 발빠른 반어를 깨부수는 ‘재난의 글쓰기’.

    우리들의 희망의 말, 대안적 언어들이 손쉽게 자본과 권력에의해 포섭되어 사용되는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 글쓴이는 절망과 재난의 언어를 구사하는 전략을 사용하자고 제안하고 있는듯합니다.

    글 어디에도 “초월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신 같은 말”은 없고 오히려 절망적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고발하자라는 정직한 절망의 글인듯합니다.

  5. 놈리말하길

    다양함을 인정합니다. 이 글을 쓰신 목적은 사유의 전환이신지…
    초월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시는 신 같으신 말씀.
    삽질하지 말라고 싸우는 우리에게는 약간 기운 빠지는 글^^;
    MB는 숨통이 트이겠어요
    거대한 멸종의 시대에 재난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기..
    선생님! 이게 저희같은 범인 또는 속물들에게
    가능하길 원하시는 거지요?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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