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운명 앞에서 인간은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진다

- 김대경

며칠 전 수유 너머에서 고미숙 선생님과 함께 했던 마음 세미나를 끝냈다. 3월부터 시작해서 10월까지 했으니 꽤 긴 시간 동안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셈이다. 물론 중간에 마음이 흔들려서(내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본다는 게 무척이나 힘이 들고 고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빠지기도 했고, 여름에 제주에 내려간 기간 동안 참석을 못하기도 했다. 이제 세미나를 정리하고 나니, 이제야 겨우 내 마음자리의 언저리에 발을 디뎌 놓은 것 같은데, 무척 아쉽기만 하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서점가에서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는 책들이 대부분 마음에 관한 책들이다. 나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마음의 문제를 끌어안고 힘들어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게다가 최근에 일어난 두 사건이 한동안 내 마음을 무겁게 했는데, 최윤희씨 자살 사건과 타블로의 학력 의혹과 관련한 방송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전자의 경우,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한 방식으로 끝낸 것에 대해 내가 뭐라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왜 그 사건이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으로 남는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더불어 권정생 작가나 장영희 교수의 죽음도 함께 생각하면서, 공연히 마음 한켠이 무거워졌다. 후자의 경우, 처음엔 단순한 가십거리로만 생각했던 사건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모습(남의 일에 그토록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는 많은 네티즌의 모습이 내게는 오히려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이 믿고 싶은 것만 보고 믿기 싫은 것은 죽어도 보지 않으려는 그 마음과, 자신의 마음자리를 들여다볼 여유조차 없는 우리들의 마음 때문에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다.

인간은 왜 이렇게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극한적인 고통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우연히 책장에 먼지를 덮어 쓴 채 꽂혀 있던 책을 읽게 되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였다. 두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는 빈 의과대학의 신경정신과 교수였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 3년 동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이 책에는 그의 의사로서의 경험과 극한적인 고통을 당한 한 인간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가슴 깊은 곳에서 눈물이 솟아나오는 것 같았다. 그건 슬픔에서 우러나는 눈물이 아니라, 인간의 위대함과 거룩함에 대한 감동에서 나오는 눈물이었다.

그는 정신과 의사답게 자신의 수용소 경험을 담담하게 털어놓으면서 당시 수용되었던 많은 사람들의 심리를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처음엔 실낱같은 희망을 품던 사람들이 엄청난 충격적 경험을 한 후, 자신이 왜 그런 상황에 놓였는지 궁금해 하다가 결국에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 모멸감, 무감각 상태에까지 가는 과정을 그는 자세하게 사례를 들어 이야기한다. 시신 앞에서 태연히 수프를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내의 생일날 멀리서 들려오는 흐느끼는 아내의 바이올린 연주 소리를 들으며 덩달아 흐느꼈던 그의 경험을 토로할 때쯤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도대체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인간의 잔임함과 횡포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양심적으로 행동할 뿐만 아니라 자살하려는 사람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사소한 행복을 놓치지 않고, 유머 감각을 되살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집단 치료를 하기도 한다.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날, 운명이 엇갈리면서 다시 한번 죽음의 문턱을 비껴 간 이야기를 듣다 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120쪽)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138쪽)

삶의 의미를 상실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그는, 실제로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했던 사례를 들고 있다. 그 때 사망률이 증가한 원인은 더욱 가혹해진 노동조건이나 식량사적의 악화, 기후의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었다.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다가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고,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국 그들의 저항력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것이었다.

수용소에서 벗어난 이후 그는 ‘로고테라피’라는 분야의 정신의학을 구체화시키게 된다. 이 책의 뒷부분에 로고테라피의 개념과 방법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밑줄 그으며 읽으면서 되새겨 볼 만한 구절이 많다. 로고테라피란 기존의 정신분석과 달리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추면서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깨우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마음의 평온보다는 내면의 긴장이 오히려 정신건강에 매우 필요하다고 하면서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우울증과 공격성, 중독증의 원인을 실존적 좌절에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현대인이 흔히 겪는 예기불안(환자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면 바로 그 증상이 정말로 나타나는 경우)에 대해서는 그것이 환자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해서 일어나는 증상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역설의도(환자로 하여금 강박증과 맞서 싸우기를 중단하고 대신에 아주 반어적인 방식으로 그 상황을 비웃어 주는 방법)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어 덧붙이고자 한다.

그가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을 때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고(그 와중에 그는 그동안 심혈을 다해 써오던 원고를 모조리 빼앗기게 된다), 이미 가스실로 보내진 수감자의 누더기 옷을 물려받아 입게 된다. 그 때, 그 외투에서 그는 히브리 기도책에서 찢어낸 종이 한 장을 발견한다. 그것은 유대교의 기도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셰마 이스라엘이었는데, 그는 그렇게 기막힌 ‘우연의 일치’를 단지 종이에 적지만 말고 그대로 ‘살라고’ 하는 신의 계시로 해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읽으며 전율을 느꼈는데, 나도 그와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극도로 우울해졌을 때, 누군가가 또는 어떤 책의 한 구절이 나를 어둠 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 준 적이 있었다. 인간은 계속 삶의 의미를 찾으며 살아야 한다는 필자의 말은 어쩌면 그런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필자는 그것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였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이 적극적으로 살 궁리(그의 말을 빌리자면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안간힘을 쓴 것)를 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당시 가장 악마적인 사람으로 손꼽혔던, 일명 ‘스타인호프의 도살자’라고 불린 J박사(그는 엄청난 유태인들을 가스실로 보낸 사람이었다고 한다)의 일화였다. 전쟁이 끝나고 J박사는 스타인호프의 어느 감방에 갇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감방 문이 열려 있고 아무도 J박사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남미로 도망갔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필자가 모스크바에서 악령 높기로 유명한 루비앙카 감옥에 있었던 어느 외교관을 상담하는 도중에, 그가 갑자기 필자에게 J박사를 아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안다고 대답하자, 그는 그 수용소에서 J박사와 함께 지냈으며, 그가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고,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도덕적 차원에 도달했던 사람이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필자는 이 사례를 들면서 말한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감히 인간 행동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겠느냐?’고.

위의 두 사례를 통해 나는 희망을 품어 본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있고, 세상을 좀더 나아지게 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다만, 한 가지 과제가 남아 있다. 이 어려운 숙제를 이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그는 이 책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우리 세대는 실체를 경험한 세대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응답 2개

  1. 박경내말하길

    결국 우리를 정의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꼭 읽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

  2.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구사구용(YJH), Progress_News. Progress_News said: [수유너머] 운명 앞에서 인간은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진다: 며칠 전 수유 너머에서 고미숙 선생님과 함께 했던 마음 세미나를 끝냈다. 3월부터 시작해서 10월까지 했으… http://bit.ly/aHCo6l http://suyunomo.jinbo.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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