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넌 애국시민을 원하니? 난 야만인을 기다린다

- 고병권(수유너머R)

–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1. 당신에게 읽어주는 시 한편

<야만인을 기다리며>

-왜 우리가 이렇게 광장에 모인 거지?
야만인들이 오늘 도착한다나봐.

-그런데 왜 원로원에선 아무 일도 없는 거지?
원로원들은 법률을 제정하지 않고 뭘 기다리는 거지?

그건 야만인들이 오늘 도착할 게 틀림없기 때문이야.
원로원들이 어떤 법을 만들 수 있겠어?
야만인들이 와서 법을 공표하겠지.

-왜 황제는 이리도 일찍 일어났을까?
게다가 도시의 관문 위에 앉아 있는 건 뭐야?
옥좌까지 차려 놓고, 화려하기도 하군, 왕관도 썼네.

그건 야만인들이 오늘 도착할 게 틀림없기 때문이야.
그리고 황제는 그들의 족장을 맞이하려고
기다리는 걸세. 심지어 황제는
그에게 수여할 작위까지 준비했다네. 그것도
작위와 칭호가 여러 개라지?

-그런데 왜 오늘 두 명의 집정관과 총독들이 온 거지?
번쩍거리는 것 좀 보아, 자주색 토가를 입고 한껏 멋을 냈구나.
자수정들이 빼곡 박힌 팔찌들이며
최상급으로 세공된 에메랄드 반지는 또 뭐야?
황금과 순은을 멋지게 새겨 넣은
예전용 주장도 들었네.

그건 야만인들이 오늘 도착할 게 틀림없기 때문이야.
그런 것들이 야만인들을 홀리게 하거든.

-그런데 우리의 의젓한 수사학자들은 왜 안 오는 거지?
평소 같으면 어서 와서 덕담을 달고 한 말씀 가르쳐주어야 하는 거 아냐?

그건 야만인들이 오늘 도착할 게 틀림없기 때문이야.
그들은 미사여구에는 취미가 없거든.

-그런데 갑작스럽게도 웬 불안한 기운이지?
이 소란은 뭐고? (저 심각한 표정들 좀 보아!)
거리와 광장이 금세 텅 비어버리네.
모두가 근심스런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그건 해가 떨어졌는데도 야만인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야.
국경으로부터 돌아온 몇몇 사람들은 심지어
야만인이란 이제 없다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야만인 없이 어찌 살아야 할까?
어떤 점에서는 그 자들은 해결책이었는데. – 콘스탄티노스 카바피

존 쿳시가 소설 제목으로 따오면서 회자된 카바피(C.P. Cavafy, 1863-1933)의 시. 나는 그 일부를 진은영 시인의 글에서 처음 접했다. <<코뮨주의 선언>>에서 그가 인용한 시를 읽었을 때 꽤 강한 충격을 받았다. 일반적 해석에 따르면 “이 시는 야만인과 같은 타자를 만들어냄으로써만 존속할 수 있었던 로마제국의 논리를 풍자하고 있다.” 북한을 하나의 해결책으로 이용했던 남한의 반공 독재자들처럼, 타자를 만들어냄으로써 자기동일성을 생산하는 체제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하지만 내게는, 진은영 시인도 그랬다지만, “야만인, 그들은 일종의 해결책이었다”는 말이 그렇게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정말 야만인이야말로 해결책이 아닌가! 동일자의 타자, 제국의 다른 얼굴인 그런 야만인 말고, 동일자의 한계로서, 제국의 불가능성으로서의 야만인 말이다. 누구인지, 언제 왔는지, 왜 왔는지, 도무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데, 번개처럼 어느 순간 새까맣게 나타난 야만인들. 제국은 만리장성을 쌓지만 벌써 담을 넘을 태세인 야만인들, 아니 이미 성 안에 돌아다니고 있는 야만인들. 그들의 도래는 법과 권력의 정지이자 학자와 웅변가의 침묵이다.

법이 멈추고 말이 멈추는 시간, 법(혹은 문법)의 외부 지대에 서게 된 시간. 나는 카바피의 야만인들을 벤야민의 메시아처럼 느꼈다. 우리 이웃이 아닌 이들의 도래, 낯선 야만성, 익숙하지 않는 새로운 삶의 침입, 순전한 억지이자 몰상식, 무조건인 요구가 국경을 넘어온다. 정의가 그렇게 국경을 넘어온다. 국경을 넘어오는 것이 정의다. 더 이상 그들이 오지 않는다면, 국경 안의 사람들에겐 상식과 통념, 습속이 있을 뿐 정의는 없다.

2. 샌델이 누구였더라

마이클 샌델. 현재 활동 중인 미국 정치철학자 중 이만한 명성을 얻은 이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십여 년 전 대학원 마지막 학기였을 것이다. 하이에나처럼 학점 채우려고 여기저기를 기웃기웃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기어들어간 정치학과의 <현대정치철학> 수업에서 샌델의 이름을 들었다. 수업의 주제는 ‘자유주의자(liberals)와 공동체주의자(communitarians)의 논쟁’이었고, 샌델은 공동체주의자의 주요 논객이었다.

사실 미국의 정치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으면 각 진영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자유주의자의 대표적 논객으로 보통 롤스(J. Rawls)를 꼽지만, 그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신념과 복지국가에 대한 지지를 함께 밝힌다. 정부 간섭의 극단적 배제와 사적 소유의 절대적 긍정을 주장하는 노직(R. Nozick) 같은 이의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공동체주의도 마찬가지다. ‘공동체’에 중요성을 부여한다고 해서 이들을 한국에서 공동체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부 통하는 면도 있지만 미국 공동체주의자들 상당수는 ‘공화주의자들’이고 공화당 지지자이다. 물론 공화주의자들도 다양하다. 공화주의자 중에는 국가가 도덕적, 종교적 리더쉽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문하는 사람들(이라크 전쟁을 거의 종교적 성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부터, 정치의 초점을 국가가 아니라 작은 지역 공동체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어떻든 미국 사회에서 자유주의나 공동체주의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우리 통념과 많이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이들 논쟁을 우리 식 진보 대 보수의 구도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렇게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미국의 시장경제를 사랑하고 미국식 개인주의, 미국적 가치를 지지한다. 공동체주의자인 샌델이 말하듯 아주 큰 틀에서 보면 ‘자유주의’는 전제되어 있다. 다만 어떤 식으로 해야 자신들이 만들고 지켜온 미국의 자유주의가 더 잘 보존되고 더 강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다를 뿐이다.

1971년 미국의 반전시위 사진 -롤스의 <<정의론>>에는 이때 자유주의자들이 느낀 위기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논쟁의 시발점으로 지목되는 것은 대체로 롤스의 <<정의론>>(1970)이다. 이 책의 출간 연도를 보자. 소위 68혁명으로 서구 사회가 들끓고 특히 미국은 반전시위로 몸살을 앓을 때였다. 다양한 가치들의 난타전이 벌어지고 사회 가치체계가 붕괴되는 것처럼 보였을 때 <<정의론>>이 출간된 것이다. 이 책은 위기에 빠진 자유주의 사회의 기본 가치를 다시 확인하려는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이 점에서 롤스의 자유주의는 종교 전쟁 이후에 나타난 서구 자유주의의 한 전통, 가령 로크식의 ‘관용론’을 계승하고 있다. 그는 종교적 도덕적 가치판단이 공적 영역에 난입했을 때, 사회의 목적(telos)에 대한 논쟁이 정치 영역에 들어왔을 때,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생각한다.

상당수 자유주의자들에게는 한마디로 ‘가치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 이들은 가치의 영역, 서로 통약불가능한(척도가 다른, incommensurable) 차이의 문제는 사적 자유의 영역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 도덕, 문화,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등등은 개인이 알아서 선택할 문제이고, 이를 공적인 장으로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국가가 여기에 개입하려고 하면 가치 전쟁이 불가피하고 이는 사회를 위험에 빠뜨린다. 나중에 롤스가 <<정치적 자유주의>>(1985)에서 취한 입장에 따르면, 우리는 사회구성원들의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가 큰 영역, 다시 말해 구성원 대다수가 합의한 사안들을 공적인 의제, 정치적인 의제로 삼아야 한다.

롤스를 비판한 공동체주의자들은 1980년대 본격적으로 ‘뜨기’ 시작했다. 그들은 롤스의 소극적인 태도가 못마땅했던 것 같다. 공동체주의자들에 따르면 정치란 원래 시끄러운 영역이고, 공동체는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성원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가령 바버(B. Barber)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자신들의 주장이 왜 옳은지도 말할 수 없는 이들’이라고 비꼬았다. 한국에 일찌감치 번역된 그의 대표작 <<강한 민주주의>>의 제목을 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1980년대 레이건 정부의 시작과 공동체주의자들의 등장이 맞물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노동운동은 물론이고 낙태나 동성애 운동에 대한 보수주의의 반격이 시작된 것, 탈냉전 시대에 미국적 가치를 전 세계에 공격적으로 표방한 것, 복지를 ‘퍼주기’라고 비판하며 시민성을 기른다는 이유로 웰페어(welfare)를 워크페어(workfare)로 바꾼 것이 이때였다.

공동체주의자들에게는 가치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들은 개인들이 소비자들처럼 이것저것 물건 고르듯 가치를 설정하는 것을 공동체 와해의 병리적 현상으로 본다. 자신들의 자유가 어디에 기반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고 어떻게 계승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공동체주의자들은 강력한 교육적(혹은 의학적) 열망을 느낀다. 1982년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를 발표하면서 화려하게 등장한 샌델도 바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3. 매력적 샌델과 무서운 샌델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글을 쓰라고 했을 때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별로 유쾌하지 않았던 이 논쟁 구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 샌델이라는 이름이 여기저기서 나올 때만 해도, 그 ‘샌델’이 내가 아는 그 ‘샌델’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뭐 중요하다면 중요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몇 주째 베스트셀러가 되고 수십만 부가 팔려나갈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샌델은 마이클 샌델 뿐인데’라고 했을 때, ‘그래, 바로 그 마이클 샌델’이라는 지인의 말 덕에, 속된 말로 정말 ‘확’ 깼다.

아니 왠 샌델? 뒤늦게야 상황 파악을 하고 개인적으로는 이 이상한 열풍을 이렇게 정리했다. 우선 ‘하버드대 최고의 명강의’라는 출판사의 광고 카피가 제대로 먹혔다. 서울대만 해도 난리 굿판이 벌어지는 사회에서 ‘하버드대’에 대한 선망은 말할 것도 없다. 거기서는 도대체 어떤 강의를 할까. 최고의 수재들에게 최고 평가를 받는 교수의 강의라는데. 둘째, 조선일보부터 프레시안, 유시민, 노회찬까지 들어간 독서 권장 릴레이가 있었다. 독서인구의 상당수는 아마 여기에 다 커버될 거다. 셋째, ‘정의’와는 담쌓은 줄 알았던 청와대가 ‘공정사회’를 주창하는 기적이 일어나고 말았다. 넷째, 책을 보니 그 구성이 완전 논술교재다. 책의 주제들이 다 시험문제감이고 서술 내용은 완전 모범 답안이다.

조선일보는 “샌델은 … 우파 입장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좌파적으로 오독되고 있다”는 지적을 전했다. 어느 전문가의 입을 빌어 “현실적으로 마땅한 이론적 대안을 갖지 못한 좌파들이 책 제목에 기대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하는 것 아닌가 싶다”고 진단까지 했다. 정말 왜 그랬을까. 왜 조선일보만이 아니라 그 반대자들까지 샌델을 좋아하게 된 걸까.

분명 샌델에게도 매력이 있다. 특히 자유주의의 한계를 지적할 때 그의 논리는 한국 진보주의자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이다. 가령 기여입학제에 대한 입장을 보자. 일단 그는 대학의 소수자 우대정책이 정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골 출신이라거나 소수 인종이라는 점이 대학이 지향하는 가치와 대학의 학문 발전에 기여한다고 판단했다면 그들을 뽑는 것은 대학의 자율이라는 것이다. 그럼 기여입학제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대학에는 고유한 사명이 있고 그 사명에는 ‘돈’이 들기 때문에, 기여 입학한 학생은 대학 전체의 이익에 기여한 게 아닐까. 그리고 대학은 자율적으로 그런 사람을 뽑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샌델은 대학의 소수집단 우대정책은 누군가를 편견 때문에 거부한 게 아니라 대학 자신의 사명에 따라 선발했으므로 공정하다고 말하면서도, 기여 입학은 지원자 문제가 아니라 대학 자신의 청렴성(대학은 연구와 교육을 하는 곳이지 수익을 내는 곳이 아니다) 문제라며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다.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도 샌델은 한국 진보주의자들이 좋아할 만한 말을 했다. 그는 일본군의 ‘성노예’ 문제를 직접 거론하며 사과할 줄 모르는 일본 정부를 질타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과거 세대의 일을 거기에 관여하지 않은 현 세대가 왜 사과해야 하느냐는 식의 사고는, ‘내 책임은 내가 떠맡은 일에 한정한다’는 자유주의의 도덕적 사고라고 비판한다. 산델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독립적 개인의 판단이나 합의로 환원할 수 없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 우리는 항상 어디엔가 소속되어 있고(가족, 도시, 나라 등) 거기서 나오는 다양한 빚, 유산,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그는 매킨타이어(A. MacIntyre)의 입을 빌어, “내 삶의 이야기는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한다”고 말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의 입장에 따르면 ‘나’는 항상 공동체에 속해 있고 그 유산과 기대를 함께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사를 무시할 수 없고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조선일보는 느끼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곳곳에 한국 ‘좌파’들이 발견할 수밖에 없는 매력 포인트들이 널려 있다. 하지만 자유주의 비판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순간 샌델은 꽤나 무서운 존재가 된다. 자유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곳에서 공동체주의를 역설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순간 말이다. 가치 문제에 대한 국가의 중립적 태도를 비판하는 샌델은 국가가 시민의 삶에 더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개념 중에는 ‘형성 프로젝트(formative project)’라는 게 있다. 일종의 건전한 시민 양성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오래 전에 읽은 거라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이 개념과 관련된 어떤 예가 생각난다(샌델이 직접 말했는지, 그를 인용한 다른 공동체주의자가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그냥 제공되는 복지수당을 비판하면서, 저자는 그들에게 아무리 쓸모없는 일이라도 시키고 나서 돈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 땅을 파고 내일은 그 땅을 묻는 한이 있더라도(정확한 표현을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취지였다). 왜냐면 그것이 바로 건전한 노동윤리를 심어주는 것이며, 이 사회에 자신도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 바로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시민의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국가는 공동체에 바람직한 정체성, 좋은 인격을 그렇게 길러내야 한다. 나는 그때 샌델이 참 무서운 인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샌델에게, 아주 완곡하게 이런 비판이 제기되었을 때, 그는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한다고 했다. 자유주의자들처럼 ‘회피’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샌델의 공동체주의에는 어떤 위험이 있을까. <<정의란 무엇인가>>의 논리를 따라가 보자. 가령 물에 두 사람이 빠졌다. 한 사람은 가족이고 다른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여건상 단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고 했을 때 당신은 누구를 구할 것인가. 샌델의 말처럼 가족을 구한다고 해서 부정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가족끼리는 연대와 소속의 의무가 있다. 내 어머니, 내 자식을 돌보는 것은 우리가 특정한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보여준다. 공동체의 성원들은 서로에게 ‘충직’의 의무를 갖는다. 우리는 보상과 관계없이 가족 공동체의 성원에 돌봄의 의무를 갖는다.

샌델은 논의를 조금 더 확장한다. 우리 동포라면 어떤가. 우리 가족과 다른 사람의 충직의 의무가 달랐듯이, 우리 동포와 다른 나라 사람들을 같이 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에게 친숙한 자들, 우리 공동체에 속한 자들을 우선 배려하는 것, 같은 공동체 성원을 돌봐야 하는 연대의 의무에서 그는 애국심이 정의일 수 있는 기초를 발견한다. 처음엔 가족을 구하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다음에는 조국과 민족, 자국 회사 제품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간다.

샌델은 물론 연대의 의무가 ‘우리 사람만 챙기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가령 베트남전 반전운동을 보자. 샌델은 자기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그 공동체가 저지른 일에 대해 느끼는 수치심과 통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자신들이 일으키는 전쟁에 수치심을 느낀 반전운동 역시 미국인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공동체의 유산인 것이다.

나는 온갖 민족과 인종들이 모여든 미국 사회에서 민족주의 내지 국민주의가 가능한 하나의 논리를 샌델이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샌델을 비롯해서 많은 공동체주의자들이 ‘서사(narrative)’를 중시하고, 아버지들에게 자신과 할아버지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들려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어떻게 이 자유를 일구었고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그리고 그것이 교육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에서 역사교과서 개정 방향과 묘하게 통하지 않는가. 어떻든 국가치고는 그 나이가 아주 어린 미국이, 그리고 다민족과 다인종으로 구성된 미국이 어떻게 ‘시민민족주의(civic nationalism)’ 내지 ‘국민주의’를 가질 수 있는지 샌델은 아주 잘 보여준다.

4. 정의란 국경 안에 없다

솔직히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아이에게 들려주는 할아버지와 ‘너희가 빨갱이를 알아’ 하고 가스통을 메고 나온 할아버지를 이론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어떤 할아버지는 아이가 인생의 좁은 경계에 갇히지 않도록 낯선 이야기를 선사해주지만, 또 어떤 할아버지는 아이의 인생을 자기의 경험 안에 가두어 버린다.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경험한 것, 그 한계를 넘어설 때 정의가 문제로 떠오르는가, 아니면 우리가 친숙한 것 속에 머무를 때 그것이 정의로운가. 연대의 의무란 우리에게 친숙한 것, 우리가 소유한 것들을 철저히 지킬 의무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들, 우리에게 낯선 것들을 만났을 때 오히려 요구되는 것인가.

멕시코-텍스사 국경을 지키는 경찰

샌델의 ‘정의관’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기괴한 장면이 하나 있다. 불법이민을 감시하는 민간인 국경순찰대의 애국심에 대한 것이다. 불법 이민으로 골머리를 앓는 텍사스주의 보안관이 국경감시에 인터넷을 활용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국경 곳곳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고 그 영상을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생중계하는 것이다. 그러면 국경감시를 돕고 싶은 시민이 인터넷에 접속해서 ‘보안관 대리’로 활약할 수 있다. 국경을 넘는 사람들을 보면 그는 곧바로 보안관 사무실에 신고를 하고, 보안관이 현장출동을 해서 이민자를 연행한다. 샌델은 “아무런 보상도 없고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지루한 일”을 수행하는 애국심의 원천을 묻고는, 또다른 공동체주의자인 왈저(M. Walzer)의 입을 빌어, 그것이 “삶과 역사를 공유하는” 공동체를 지키려는 정의로운 행동임을 암시한다. 아무에게나 입국을 허가하면 “서로에게 특별히 헌신하고 공동의 삶을 꾸려가는” ‘덕성 있는 공동체’가 존속할 수 없기에, 이민자들을 감시하는 일은 정의로운 일이다.

나는 국민을 보안관으로 활약하게 하는 이 ‘덕성 있는 공동체’가 끔찍하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순간의 방심이 나라를 무너뜨린다’며 간첩, 용공분자, 좌익사범이 없는지 주변을 잘 감시하라는 국정원 표어가 나올 것이다. 전두환식 ‘정의사회구현’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보인다. 가장 글로벌한 행사라는 G20을 치르며 테러리스트가 있을까봐 이주자들을 마구잡이 단속하고, 외국인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며 노점상을 몰아내고, 여기저기서 ‘기초질서’를 확립하자고 주장한다. 이것이 덕이고 정의인가.

공동체 성원들이 공유하는 건전한 시민성이란 대개의 경우 그 사회를 지배하는 상식이나 통념이고, 그 사회를 지배하는 의지에 불과하다. 건전한 가치관을 지닌 시민을 육성하겠다는 것은 대체로 지배 질서를 재생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불과하다. 지금의 내 것을 지키고 우리 것을 지키는 것이 현실이고 또 불가피할 때가 있다고 치자. 그래도 그것을 정의라고까지 부르는 건 너무 몰염치한 일 아닌가.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는 이민자들

공동체주의자들은 비르투스(virtus), 즉 덕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상황의 우연 속에 내맡겨진 자유주의자들의 삶을 비난한다. 하지만 덕을 길러야 한다고? 도대체 덕이란 무엇인가? 니체의 입을 빌려보자면, 진정한 힘, 비르투스는 내게 닥치는 운명(fortuna), 그 우발성에 기꺼이 자신을 여는 것이고, 그것을 기꺼이 다루려는 힘과 의지이다. 비르투스는 통제할 수 없는 운명과의 싸움이 아니라 그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그것은 친숙한 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낯선 것, 내게 운명처럼 나타난 타자에 대한 사랑이다. 우발적으로 닥치는 타자에 귀 기울이고 자신을 기꺼이 개방하려는 의지와 힘 속에서 공동체는 유덕해지고 정의로와진다.

네 이웃을 사랑하지 말라! 그것이 ‘우리’가 ‘우리’에 갇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의의 목소리다. 네 이웃이 아닌 자들과 연대하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라. 그것이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정의의 요구이다. 따라서 정의란 국경 안에 없다. 그것은 국경 바깥에서, 야만인들로부터 온다. 그것은 한마디로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는 이주자들로부터 온다. 그 불법이주자들과 교섭하지 않고서는, 그 야만인들과 교섭하지 않고서는 정의가 없다. 정의는 우리가 소속된 곳에서 한 발 나가려는 용기를 보일 때, 비로소 우리에게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

응답 6개

  1.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기픈옹달, Dhandhan. Dhandhan said: RT @zziraci: 위클리 수유너머 독자의 질문에 대한 병권이 형의 긴 답글 http://bit.ly/bX3YNk […]

  2. 고추장말하길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긴 생각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법과 정의를 동일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법에 대한 모든 문제제기 내지 법의 변경 사태는 정의의 파괴가 되겠지요.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법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법은 정의 자체가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는 수단이라고 합니다. 사실 ‘법의 힘’(실정성은 법의 본질적 특징이죠)은 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 너머에 있습니다. 어느 학자의 말을 빌자면, 법은 그 힘을 받아옵니다. 법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 그 권위는 분명 ‘정의’와 긴밀한 관련을 맺습니다. 통상적으로 말하자면 ‘어? 법이 저러면 안 되지 않나’하는, 법으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힘들의 영역(경쟁하는 온갖 정서나 감정들의 영역)이 있습니다.
    정의를 현실화하는 것은 ‘법’이라고 합니다만, 법에게 힘을 부여하는 ‘법 이전의 영역’, 정의의 영역은 항상 미결정의 영역입니다. 법 이외의 정의는 없다고, 법만이 정의의 수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미결정의 영역을 닫아버림으로써, 사실상 지배적인 충동과 정서, 통념을 승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완전한 폐쇄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자폐적으로 닫아버릴 수 없는 틈은 항상 열려 있고, 도둑을 막기 위해 창문을 모두 닫는다면 우리는 집을 감옥으로 바꾼 뒤 스스로 죄수가 되는 길을 택하겠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불법’을 정의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불법은 법의 다른 면일 뿐이지요. ‘법’, 즉 ‘right’과 생기면 ‘불법’, 즉 ‘wrong’은 자동으로 생겨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법(불법)의 척도, 그 경계를 계속해서 의문에 부칠 수 있는 의지와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소위 ‘불법체류자’로 불리는 ‘미등록이주자들’은 어떤 행위의 ‘불법성’이 문제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의 ‘존재에 불법성’을 부여한 것인데, 이때의 ‘불법성’이란 일반적 의미의 ‘불법’과는 아주 다른 의미입니다. 이들이 불법 행위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합법/불법’을 따지 않겠다는 것, 이 ‘영토’ 안에서 그 존재를 승인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재판을 받지 않습니다(불법/합법은 재판의 결과로 나오는 겁니다). 재판받을 ‘시민권’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아렌트식으로 말하면 ‘권리를 가질 권리’를 부인당한 거죠. 그래서 재판없이 그냥 소위 ‘보호소’에서 ‘보호’한 뒤 추방합니다. 형식적으로 ‘출입국관리법’을 위반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영토 안 존재에 대한 ‘승인과 부인’의 문제이지, 행위의 합법성/불법성을 가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적으로만 보면 한국의 ‘영토(territory)’ 안에 있을지라도, 실제로는 영토바깥 ‘치외법권지대(extra-territory)’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이들이 머무는 장소의 ‘영토성’을 부인하는 겁니다.(영토라는 개념 자체가 법적입니다.)
    이들은 국가의 보호를 자발적으로 포기했다고 하셨는데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UN에서는 대체로 ‘정치적 이유’와 ‘종교적 이유’에서만 난민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살기 어렵다’는 것에서 ‘경제적 이유’를 왜 빼야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멕시코 사람들이 사는 곳을 ‘자발적 포기’하고 미국으로 갈 때, 네팔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한국에 올 때, 그 ‘자발성’은 여행자가 여행지를 고르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실 겁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 역시 ‘법을 무시하면 정의’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법의 근거와 토대를 문제 삼는 것’이 ‘정의의 물음’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 질문은 봉쇄해도 안 되고 봉쇄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은 우리와 근거를 공유하지 않는 모든 존재들로부터 제기된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바꾸어 말하면 척도를 공유하는 자들이 아니라, 척도를 공유하지 않는 자들로부터 그 물음이 제기되는 겁니다. 그것을 단속하고 추방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우리를 바꿀 힘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교섭이라는 말을 쓴 것은 그 때문이지요. 의견 고맙습니다.

    • 박경내말하길

      경제적 이유로서의 난민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지요. 경제적 이유는 앞의 정치적, 종교적 난민과는 다르게 물질적 자원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정치적, 종교적 자원을 내 것으로 만드는 데에는 물질적 비용이 발생하지 않지만, 타인의 경제적 자원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Physical한 희생이 발생합니다. 바로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는 경제학의 대전제가 문제가 되는 것이죠. 여행자는 경계 안의 자원을 늘려줄 사람이므로 환영받고, 경제적 난민은 파이 조각을 작게 만들 사람이므로 밀려나는 것이죠.

      어디 선가 기본적으로 인간은 이기적이며 우파적인 성향을 지닌다는 말을 들을 적이 있습니다. 일례로 같은 가격이지만 공정 무역으로 거래된 커피에 대한 소비는 증가하였지만 공정 무역으로 발생한 추가 비용을 커피값에 전가한 경우엔 그 소비 증가정도가 미비했다고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피해 없이 남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선택지가 있다면 기꺼이 그것을 선택하지만 자신이 실제로, 혹은 물질적으로 bleeding해야 하는 경우에는 타인의 이익이 giving, 혹은 나눔의 충분한 인센티브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으로서의 저는 ‘고통 있는 나눔’의 지지자입니다. 그렇지만 이 고통 있는 나눔, 좀 더 의미있는 나눔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동참시킬 수 있는 인센티브가 있어야 합니다. 더 장기적으로는 ‘고통 있는 나눔’의 지지자의 수를 늘리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겠지만 말이지요.

      기본적으로 인간은 좀 더 ‘옳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믿습니다. 문제는 ‘옳음’에 대한 척도가 저마다 다르다는 거죠. 그래도 사회가 유지되는 데에는 일정 농도의 ‘Inter-subjectivity’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언젠가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은 부분입니다……웃음) 공감과 교섭, 접촉과 대화는 애정, 상호의 성장을 원하는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애정의 범위를 극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 박경내말하길

      감사 인사를 먼저 드렸어야 하는데.. 답변 감사합니다. 이번 학기 산업구조론과 노동경제론을 공부하면서 요사이 로버트 달의 ‘On Political Equality’를 읽고 있었는데 제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셨어요^^

  3. 박경내말하길

    정의가 국경 안에 있지 않다는 말은 그 국경으로서 사람과 가치, 애정을 제한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그렇담 국경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에 정의가 있는 것일까요?

    불법이주자, 노점상 문제..
    ‘불법’이라는 말 속에 그들이 국가가 정한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을 그들이 국가로부터 보호받기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으로 확대하여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따를까요?

    법은 정의로워야 할테지요. 그렇지만 법은 ‘정의’로 해석되어서는 안되는 걸까요? 불법이주자를 단속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해도 단속하지 않는 것 역시 정의라 말하기를 어려울 듯 합니다..

    진지하게 생각을 하다보면 결국 ‘이 것도 저 것도 아닌 것’이 답인 듯 하여 벙어리가 되곤 합니다.

  4.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tzara, 서원 (Seo-Won) and 황윤정(독장미), Progress_News. Progress_News said: [수유너머] 넌 애국시민을 원하니? 난 야만인을 기다린다 – 마이클 샌델, 를 읽고: 1. 당신에게 읽어주는 시 한편 -왜 우리가 이렇게 광장에 모인 거지? 야만인들이… http://bit.ly/cb8QFC http://suyunomo.jinbo.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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